치사하게 막 섞어 말하지 말자.

퀴어퍼레이드에 와보지도 않고 이런저런 말을 던진다면 몹시 별로이긴 하지만, 와보지 않았다고해서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막고 싶지는 않다. “나는 보지풀빵이 불편하다.” “나는 노출이 불편하다.” 식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럼 그 불편한 지점에 대해 왜 불편한지를 이야기하고 서로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그럴 수도 있을거야 아마도.

그런데, “이런 것들은 성 소수자들의 이미지만 더 손상시킬 뿐이다.” “소수자라고 뭘 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하는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다른 층위와 막 섞어 말하는 것은 치사한 짓이다. 퀴어퍼레이드의 노출이나 보지를 호명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떠나서, 이런 방식의 발화는 변태와 안 변태를 자신의 삶과 떨어뜨려 구별지을 수 있는, 그리고 객관적인 ‘외부자’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는, 그러한 자신의 지위를 성찰없이 굳건히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뒤섞임을 알아채고 성찰하는 것이 바로 차별과 혐오에 대한 민감함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 성소수자 발언대회 “WANTED: 그 많던 10대 퀴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WANTED: 그 많던 10대 퀴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학교, 가정, 친구, 애인, 한국사회와 세상에서 받은 모든 상처 여기서 다 까발려 보아요!

시간 및 장소: 10월 15일 (토) 향린교회 1층 (성소수자 지지교회) 13:30부터 18:00까지

(본 프로그램은 2시에 시작합니다.)

*서울 학생인권조례에서 성정체성과 성별정체성으로 인한 차별금지조항 등이 빠질 위기입니다. 여기서 말씀해주신 사례들은 익명으로 교육청과 의회에 항의하는 데 쓰일 수 있으며 그러나 아웃팅 될 가능성은 거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가면, 공연, 간식 뒤풀이 등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그 외 궁금하신 사항은 o1o 99o2 95l7 로 문의해주세요.

– 후원: 친구사이, 동인련, 익명의 어느 분

덧) 을지로3가 12번 출구로 1시 20분까지 나오시면 안내해드립니다.

명동 10번 출구로 1시 15분까지 나오시면 안내해드립니다.

폭식을 하고 나서

가끔, 아니 종종 음식을 생각없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내 앞에 음식을 가져다놓고 끊임없이 집어먹고 싶다. 무언가 스트레스가 생길 때,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할 의욕도 나지 않을 때, 그런데도 잠은 오지 않을때면 이런 폭식의 욕구가 생겨난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지만,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요리를 해먹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 일단 무엇을 먹을지를 고민한다. 많은 양의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과 그래도 ‘먹는다’는 느낌이 드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쓸 수 있는 돈은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서로 교차한다. 천사백원짜리 고기반찬과 천원짜리 생선1/4토막앞에서, 사백원짜리 국을 집을까 말까, 이러저러한 고민이다. 여럿이 음식을 먹을때면 오히려 이런 고민은 줄어든다. 특히 술을 마실 때, 그 음식과 술의 가격이나 양은 아무래도 좋은 것마냥 먹고 마신다. 물론 모든 것을 먹은 그 종국에서야 후회하지만, 혼자서 무엇인가를 사다 먹을 때면 매순간에 후회해버린다.

2시까지 영업하는 버거킹에서 버거 2개와 후렌치후라이, 작은 콜라 하나를 사와서 방으로 돌아와, 네 시간에 걸쳐서 먹었다. 도합 만이천원, 헛구역질이 날 때까지 먹었다. 분명히 이것은 만이천원의 가치를 하지 않는 음식이다, 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돈으로 평소에 다섯끼는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잠시간은 먹지 않은 아침, 점심, 그리고 때로는 저녁값 대신에 여기에 돈이 들어가는 거다, 하고 생각해보지만, 어찌되었건 먹지 않았다면 나는 그 돈을 다른 곳에 사용할 수도 있었을테고, 건강을 생각하더라도 더 나을 것이다. 어쩌면 살이 찔지도 모른다. 이러한 걱정이 나를 괴롭힌다. 정말로 먹는 것이 ‘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기분은 분명하게도 ‘죄책감’이고, 자책이다.

먹는 것으로 인해, 식비로 인해 생활이 파탄나는 상황은 분명히 피하고 싶으나, 생활에 먹는 것이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커다란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나중의 식사를 위해 지금의 식사를 줄이고, 먹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른다. 먹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고, 그 모든 것이 어찌되었건 ‘먹어선 안 될’ 것임에도, 그나마 ‘먹어도 좋을’ 것을 골라 먹어치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조금은 나아진 기분으로, 그러나 나빠지면 나빠졌지 결코 어떤 것도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쏟아지는 식곤증에 몸을 기대어 잠든다. 분명 일어나면 또 이렇게 생각할테지. 어젯밤에 내가 그것을 왜 먹었을까. 몸 상태가 이렇게 안 좋아지는데. 그 돈이면 몇 끼는 더 먹었을 것인데, 하며.

짜증 대신에 화

언제부터일까. 짜증만 낸 것은,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누군가는 ‘짜증’과 ‘화’가 같은 것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였나. 간혹 겉으로 표출하던 화 조차도 사실은 짜증이었던 기억들. 결국 그 짜증의 끝에서 원인의 화살 끝을 내 안쪽으로 돌려버렸던 기억들. 모두 다 내가 히스테릭하고 소심한 인간이라서 그런거지, 응, 그런거지 하며.

화를 내지 말라고 한다. 진정하고 이야기를 하라고.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하자고. 그런데,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언제나 이 감정들은 뭘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걸까? ‘이성적’으로 화를 낼 수는 없는걸까? 짜증이 북받쳐올라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나도, 워워, 진정하고 머리를 식혀, 그리고 이야기해, 라는 말에 더 화가 나는 걸. 그렇게 화를 낼 수 없는, 내서도 안 되는 인간이 되어간다.

짜증, 으로 화를 바꿔버렸다. 이것이 ‘나’의 문제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짜증을 만들고, 그것마저 속으로 삭여버린다. 가끔 통제를 벗어나 표출되는 짜증은 그냥 짜증이고 투정이다.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버리며,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화가 나는 상황에도, 이건 그냥 짜증일거야 라며 움직이지 않고, 부딪히지 않게 되는 것에. 이윽고 감정이 움직이지 않게 되고, 어떤 꿈틀거림도 그냥 그런거지, 뭐ㅡ 라며 넘겨버리고, 움직이고 싶을 때마저 그것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그런 상태가 된다.

그렇게, 화를 내지 않는 만큼, 화를 짜증으로 삭여 삼켜버리고 억지로 탈난 배를 움켜쥐는 만큼, 다른 이의 화에 직면했을 때 약해진다. 막상 다른 이의 화를 만나서 진정해요, 머리를 식히고 이야기해요, 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나 또한 머리를 식힐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일까? 같이 화를 내거나, 서로 화를 내서 서로 부딪히거나 하는 일이 점점 사라져가며 화에 대한 면역도, 화를 파고들 힘도 사라져간다.

이제 슬슬, 이 짜증에도 진력이 난다. 계속되는 불편이 단지 짜증인 이 상황이 ‘짜증’나, 문득 화를 내고 싶어졌다. 짜증 대신에 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