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정신장애인, 사회적소수자들을 차별하고 혐오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정부의 ‘여성대상 강력범죄 및 동기없는 범죄 종합대책’부터 철회시키자

5호 「쾌락」 수록글 중 하나를 선공개합니다!

 

여성, 정신장애인, 사회적소수자들을 차별하고 혐오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정부의 ‘여성대상 강력범죄 및 동기없는 범죄 종합대책’부터 철회시키자

 

잇을

약 보름 동안 이 사회의 혐오는 그 실상을 낱낱이 드러냈다.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인근의 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었다. 가해자는 어느 ‘여자’든 죽이기로 마음먹고 흉기를 소지한 채 기다렸고 약 한 시간 동안 남성으로 보이는 여섯 명이 그 화장실을 이용했다. 피해자는 ‘첫 번째 여성’이었다. 가해자는 ‘여자가 무시해서’ 일면식도 없는 어느 여성을 죽였다고 말했고 이는 언론에 보도되었다. 언론은 피해자 또는 피해자가 속한 집단 전체를 비난하는 여성표적살인 가해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썼다. ‘내가 피해자일 수 있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여성들의 추모와 절규가 이어졌고 일베는 이를 신상털이, 협박, 모욕으로 윽박질러 닫아버리려 하고 있다. 그 사이 경찰은 ‘대한민국에는 아직 증오범죄가 없다’고 단언했고, 경찰과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회를 감시·통제하며 인권침해를 자행하겠다는 식의 대책을 내놓았다.
위험수위에 다다랐다는 경고가 울렸다. 너무 끔찍해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이 문제의 해법은 엄벌주의가 아니다. 폭행, 강간, 살인과 같은 형태로 드러난 증오범죄는 (범죄이기 때문에) 현행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 새로운 처벌제도를 도입하거나 형량을 높이는 것이 처벌의 확실성을 담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강력범죄 사건 이후에 ‘안전’을 강조하며 등장한 신상정보공개와 전자발찌 등의 처벌정책이 실효성 검증 없이 무분별하게 확대되고 있는 문제를 짚어야만 한다. 병역기피자에게 번진 신상정보공개는 트랜스젠더에 적대적인 징병국가가 ‘트랜스여성을 병역기피자로 만드는 현실’과 맞물려 트랜스젠더 인권을 적극 침해하고 있다. 이번에 정부가 대책으로 내놓은 보호수용제도 재도입이 여성대상 강력범죄 뿐만 아니라 다른 ‘범죄’로 확대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니, 애초에 그것이 목적일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가 외쳐야 하는 것이 증오범죄의 (지금도 가능한) ‘처벌’일까, 무엇이 증오범죄인지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할 ‘차별금지법’일까? 더 극단적인 범죄로 언제든 발전할 수 있는, 공공연한 혐오표현과 일상적 차별의 규제도 중요하다. 정부와 언론의 소수자혐오를 제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엄벌’보다 중요하며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선, 경찰과 정부의 대책을 철회시켜야 한다. 경찰이 자의적 판단으로 ‘정신질환자를 행정입원 조치’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을 대책으로 발표한 데 이어, 6월 1일 법무부, 여가부, 복지부 등은 ‘여성대상 강력범죄 및 동기없는 범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CCTV 확충, 성별분리화장실 확대, 여성대상 강력범죄의 최고형 구형, ‘정신질환’ 조기발견과 행정입원, 보호수용제 재도입 등이 그 내용이다. 특히 정부는 정신장애인 행정입원 조치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인신보호관 제도 도입으로 인권침해를 방지할 수 있다는, 마치 뺨을 때려놓고 필요하다면 신고하라는 식의 모습을 보였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관리/감시를 대책으로 발표한 이상 학교과정에서 정신질환을 ‘조기발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대책 역시 저의가 의심된다. 정부야말로 정신장애인을 예비범죄자로 낙인찍고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한편으로 ‘불안감’을 이용해 공권력을 남용하고자 하면서 또 한편으론 ‘대한민국에 혐오범죄는 아직 없다’고 단언한 속셈이 뭘까? 남성혐오를 그만두라는 피켓을 들고 나선 일베들처럼 경찰은 ‘남녀갈등’을 막는 데 나서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여성혐오와 소수자를 향하는 혐오는 ‘망상’으로, 남성혐오는 국가기관이 나서야 할 ‘사회문제’로 여기고 있음을 정확히 보여줬다. 일베들이 페이스북코리아에도 있고 한국정부에도 있는 나라. 그들은 일베사이트를 이용하기 때문에 일베인 게 아니라 그런 류의 가치관을 가졌기에 일베다.

폭력의 위험과 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동등하게 살아가기 위한 외침이 다른 사회적소수자를 향하는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무엇보다 이 사건은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도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공공장소를 이용하면서 여성들이 겪어온 부당한 경험들은 단지 ‘여자라서’로만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패싱, 젠더표현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여성으로 보여서’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은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여성으로 패싱되는 성소수자 역시 그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기존에도 성적목적의공공장소침입죄를 신설해서 화장실몰카를 방지하려 했듯이 이번에도 공용화장실을 성별분리화장실로 바꾸면 안전이 보장되는 것처럼 사태를 호도하고 있다. 남자냐 여자냐 라고 캐물음을 당하다가 맥주병에 맞아야 했던 어느 폭행사건에 대한 기사는 ‘성별이 불분명한’ 것을 ‘참지 못하고’ 바로 폭력을 가하는 이 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태껏 그래왔듯이 성소수자를 ‘괴물’로, ‘(탈동성애)치료대상’으로 그려내는 이 사회의 ‘혐오표현’들이 계속된다면 성소수자는 증오범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 원흉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정부가 언제든 ‘성별이 불분명한 자’를 성폭력가해자 또는 흉악한 범죄자로 덮어씌울 태세다. 어느 살인자의 ‘동성애자’ 정체성 또는 경험을 언론에 흘린 경찰과 음흉한 저의를 갖고 보도해대는 언론을 보면 더욱 짐작이 되듯이.

우리는 사회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 무엇보다 먼저 정부와 가열차게 싸워야 할 것 같다. 그 시작은 정부의 ‘여성대상 강력범죄 및 동기없는 범죄 종합대책’ 철회부터.

완전변태 제 4호 [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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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텍스트 버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글 순서는 잡지 수록순입니다.)

「”그런 애들” 발에 치이도록 많다」(날_해)

「[기고] 폭력적 퀴어 정치학을 위한 단상: 발터 벤야민을 오독하며」(루인)

「   」(안팎)
「똥에 관한 단상」(안팎)
「항문/애널 그리고 섹스」(마쯔)
「소문: 임태훈과 김조광수에 대해서」(상어)
「동물권」(상어)
「   」(안팎)
「동성결혼 합법화가 아닌 결혼제도 폐지를 주장한다」(상어)
「위계를 생산하는 개념들」(마쯔)
「결의문」(유하)
 (덧붙임) 「“모든 시작은 ‘어쩔 수 없잖아’ 였던 것을 기억하세요.”」(안팎)

결의문

결의문

; 유하

 

글이 쓰고 싶다. 잡지가 완성되어 가는 이 시기에, 이것은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글을 보면서 무언가 머릿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할 말’들을 끄집어 내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취업을 하고, 나 자신을 회사와 ‘정상적 사회’의 틀에 우겨 넣으면서, 나의 ‘할 말’들은 회사의 발목을 잡는 부정적이고 눈치 없는 푸념이 되고, 사회 초년생으로서 겸손하지 못한 자존심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나의 ‘할 말’들은 언어도, 화자도 잃어 버리게 되는 것 같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다. 분명 나의 불편함들은 언어를 찾지 못했어도 실존하고 있는 것 같고, 이것은 두통으로 화로, 그리고 다음 날의 숙취로만 구현되고 있을 뿐이다.

뭐가 됐든 좋으니 토해내고 싶다. 다음 잡지에는 꼭 글을 쓰리라.

똥에 관한 단상

똥에 관한 단상

; 안팎

 

<항문/애널 그리고 섹스>와 <소문: 임태훈과 김조광수에 대해서>에서 똥의 위상이 너무 다르다. 도시에서 쓸모를 잃은 똥은 순전한 오물이 되어 버렸다. 고향 시골마을에서 똥은 거름이었고 소중한 것이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내겐 그저 오물이었지만

위계를 생산하는 개념들

위계를 생산하는 개념들

; 마쯔

 

은둔과 오픈

최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은둔이라는 단어를 (주로 트위터에서) 참 많이 보고 들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과연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지 언제나 의문이 든다. 어떤 사람이 은둔인 것일까? 성소수자 인권 활동에 부정적인 사람? 잭디만 하는 사람? 종로와 이태원 술집만 다니는 사람?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결혼까지 하는 소위 기혼이반? 도대체 누가 은둔인 것일까? 사실 오픈 혹은 은둔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서 일정하게 규정될 수 없는 그때 그때의 전략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가령 나의 경우 서울에 올라와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대부분 나의 성정체성에 대해 오픈이지만 고향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대부분 굳이 밝히지 않는다. 공익을 하고 있을 때는 상사들과의 관계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메이데이 집회에서는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다. 이러한 나는 은둔인 것일까? 오픈인 것일까? 사실 이것은 성정체성을 밝혔을 때 유발될 수 있는 갈등, 긴장을 내가 처리할 수 있는가, 그것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전략에 불과하다. 이러한 하나의 전략에 불과한 은둔/오픈이라는 것이 어째서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며 그 사람을 ‘규정’할 수 있는 단어로 자꾸 사용되는 것일까? 이 말이 사용될 때 발생하는 효과가 과연 무엇인 것일까?

은둔이라는 말은 등장과 함께 위계를 생산한다. 오픈과 은둔이 나뉘고 이를 따라 한 쪽에겐 비정치적 주체, 다른 한쪽에게는 정치적 주체라는 태그가 달린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나뉠 수 있는 것일까? 더군다나 한 사람의 삶에서 여러 차례 모습이 바뀌는 은둔과 오픈으로 특정한 사람이 정치적인지 비정지척인지 나뉠 수 있는 것일까? 정치라는 것을 엄밀한 의미로 한정하여 법적 장을 둘러싼 것만으로 규정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성정치가 지향하는, 지향해야 하는 정치인 것일까?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인지하고 담보해야 하는 성소수자의 욕망과 실천이라는 것이 공적 장으로 나올 수 있는 것만으로 한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은둔과 오픈이라는 규정이 하나의 위계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단어는 오로지 자조적 웃음 속에서만 유효할 수 있다.

 

커밍아웃과 아우팅

‘아우팅은 범죄다’라는 슬로건은 성정체성이 의도하지 않은 채 드러났을 때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으며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던 몇몇의 사람들에 의해 지지받았다. 따라서 당시 이 프레임은 단순한 하나의 슬로건이 아니라 무너지는 이들을 도울 수 없었던 이들의 통한이 함께 엮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슬로건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소심한’ 운동으로 국한시킨다며 비판받았고 이제는 거의 폐기된 슬로건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슬로건이 여전히 계속해서 소환되고 다시 비판받는 것을 보았다.(심지어 이것을 주장하는 이들조차 더 이상 남지 않은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이 해묵은 슬로건이 주장하는 이조차 없는데 억지로 재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 슬로건이 해묵은 것이 아니라면 이 슬로건의 등장과 퇴장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효과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 슬로건의 재등장과 퇴장은 위계를 발생시킨다. ‘아우팅은 범죄다’라는 슬로건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이들을 소심하고 시대착오적 정치를 주장하는 이들로 위치시킨다. 이것은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아우팅은 범죄다’라는 것은 (애당초 존재했는지에도 의문이 있지만) 최소한 공적 정치의 장에서는 그 유효성이 다했다. 하지만 이 슬로건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사람들 그리고 이 슬로건에 여전히 동조하는 이들이 품고 있는 욕망과 두려움을 이렇게 쉽게 내쳐도 괜찮은 것일까?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이러한 ‘두려워하는’, ‘소심한’ 이들을 버리고 앞으로 나가도 괜찮은 것일까? 물론 스스로를 국한시키는 사람들을 ‘끄집어 내는’ 방식은 계속해서 실패해왔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두려워하는 이들, (이미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벽장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이들, ‘온건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요구하는 이들, 이러한 이들의 욕망과 두려움에 대한 이해가 삭제된 성소수자 인권운동이라는 것이 과연 어떠한 모습일지 우려스럽다. 이러한 ‘온건’과 ‘두려움’이 지배적인 성소수자 운동이라는 것이 존재해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대한 고려와 이해가 삭제된 성소수자 인권이 과연 괜찮은 것일까?

 

두려움과 용기

이러한 위계를 따라 나뉘어지는 것은 두려워하는 자와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아닐까? 두려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정치적 역량도 힘도 없는 것일까? 그것은 그저 어둠 속으로 스멀스멀 사라지는 그러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두려워하는 눈빛에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일까? 두려움은 다가올 폭력에 대한 예감에서 도래한다. 움츠려 드는 몸, 흔들리는 눈빛, 목 뒤를 타고 흐르는 식은 땀에서 지금 당장의 폭력 혹은 다가올 것이 분명한 폭력이 감지된다. 두려움은 폭력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정확히는 폭력에 대한 예감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당한 폭력에 맞서 싸우고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 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기에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보수 기독교인들의 혐오스런 눈빛과 언설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며 미디어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일까? 오래전 한 활동가의 말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지금 활동하고 이러고 있는 것은 각자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잖아.”라고 말했다. 트라우마, 지울 수 없는 폭력에 대한 기억에서 활동이 생겨난다면 활동가들은 용기 있는 자들인 것일까? 용기는 두려움, 공포의 반대말인 것일까?

<폭력의 예감>을 쓴 도미야마 이치로는 20세기 초 일본에서 징병거부 운동 더 나아가 반전평화 운동이 ‘죽음을 두려워한’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두려워한’ 이들에 의해 ‘용기 있는’ 운동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은 두려움과 용기가 정반대의 감정이 아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감정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앞서의 ‘트라우마’를 통해 활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 또한 이러한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두려움은 폭력에 대한 예감을 통해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폭력을 예감함으로써 이에 맞선 용기 있는 활동들이 생겨난다. 용기는 두려움을 통해서만 가능해지고 생겨나는 감정이며 움직임인 것이다. 따라서 두려움은 삭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성해지게 논의되고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이 두려움의 공유를 통해 가능해지는 것들이 존재한다.

오픈과 은둔, 커밍아웃과 아우팅, 이러한 개념들의 구분과 대조를 통해 두려워하는 비정치적 주체와 두려워하지 않는(용기 있는) 정치적 주체라는 위계가 생산된다. 그리고 이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시작되고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기반을 삭제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이들, 은둔인 이들, 숨고 싶어하는 이들, ‘덜 나내는’, ‘조신한’ 인권 운동을 원하는 이들, 이러한 이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이야말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시작점(하나의 트라우마로서)이자 계속해서 이러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이어져 나가며 이어져야 할 이유이다. 이를 언제나 직시하고 느끼며 이들의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성소수자 인권 운동과 성정치가 지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에 대한 낄낄대는 비웃음과 경멸이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웃음들에서 삭제되어버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