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otic] #4

‘본능’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은 처음부터 미심쩍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나는 동성애자를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어.” “본능적으로 남성은 종족번식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본능’은 동물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갖추고 있는 능력, 혹은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이라고 한다. 이 뜻에 따르면, 예로 든 두 문장은 각각 동성애를 향한 혐오, 이성애자 남성의 성적인 욕망을 어쩔 수 없는 감정 혹은 충동으로 보는 듯하다. 동성애 혐오와 이성애자 남성의 성적인 욕망은 끊임없이 ‘본능’으로 정당화된다.

동성애 혐오와 이성애자 남성 성욕만 담긴 서사들 사이에서 나는 갈 곳을 잃었다. 결국 나를 조심스럽게 게이라 선언했으나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엔 가까운 게이 커뮤니티를 찾았다. “포지션이 뭐에요?” “잘 모르겠어요.” “섹스 해봤어요?” 이어진 질문에 나는 답변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설명하려면, 섹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섹스를 했다.

포지션을 묻고 섹스를 해봤냐는 질문들에는 게이라면 누구나 섹스를 한다는 전제가 숨어있다. 많은 경우, 게이 커뮤니티에서 섹스는 권장하여 마땅할 존재다. 지속적으로 섹스하는 게이는 ‘본능에 충실한’ 이가 된다. 자주 섹스하면 체력도 좋아지고 피부에도 좋고 덜 우울해지고. 섹스 예찬은 차고 넘친다. 반대로 섹스하지 않는 게이는 불안정한 위치에 남겨진다. 섹스하기 이전의 내가 불안했던 것처럼. 그렇다고 이후의 섹스들이 나를 안정시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고 성소수자 단체에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안정을 얻었다. 하지만, 종종 섹스 안하냐는 질문들은 불안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한 이성애자 친구가 내게 물었다. 언제부터 게이가 된 거냐고. 딱 잘라 답할 수는 없다며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본능’이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선천적으로 남성을 좋아했다고, 남성과 섹스하고 싶다고 느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이성애자 남성의 성욕은 곧 ‘본능’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게이의 성욕 또한 ‘남성’을 향해있을 뿐, ‘본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일지.

만일 이성애자 남성의 섹스가 ‘본능적’이라고 한다면, 게이의 섹스 또한 딱 그만큼만 ‘본능적’이다. 마찬가지로 섹스하는 것이 ‘본능적’이라고 한다면, 섹스하지 않는 것 또한 그만큼만 ‘본능적’이다. 그렇다고 ‘본능’이니까 입 다물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말은 어디서 많이 본 듯도 하다. 그러니까, ‘이성애자 남성’의 성 환상을 고스란히 정당화하려는 그 수작들에서. 오히려 말하고 싶은 건 이미 ‘본능’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다. 원래 그렇다는 말은,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erotic] #3 에로틱이 필요해

에로틱이 필요해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원안 통과를 위한 농성 때다.
보수기독교 측에서 40여명이 교육위원들에게 의견을 전달하겠다며 왔다. 단체로 들어가 만나겠다고 경비원과 실랑이를 벌였다. 우린 그 앞에서 농성중이었다. 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은박스티로폼을 바닥에 깔고 피켓을 들고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싸움을 걸어오진 않았다. 하지만 혐오의 표정, 쑥덕거림, 비아냥, 경멸의 시선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노골적이었다. 우리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를 그렇게 대하는 그들이 당황스러웠다. 시선이 화살이 되어 얼굴에 박히는 듯 했다. 얼굴을 숨기고 싶기도 했고, 더 꼿꼿하게 쳐들었다. 결연했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초연했다. 나는 그들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나의 시선은 허공에, 바닥에 고정되었다. 같은 장소, 다른 시간대에 문화제가 진행되었다. 이반지하! 이반지하! 이반지하! 한겨울의 헐렁한 나시, 떡칠한 립스틱과 빤스속의 곰인형(의 삐져나온 팔다리), 발레슈즈와 걸걸한 목소리. 그 목소리로 <오염>이란 노래를 불렀다. 서울시 의원회관에서. 나는 뒤집어졌다. 몸을 크게 앞뒤옆으로 흔들면서 박수를 치고 정신없이 웃었다. 마치 신을 영접하듯이. 아는 사람만 아는 가사에 오해될 여지가 가득했지만, 뭐 어떠랴. 이해받기 위해 하는 말은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성소수자보다 변태가 되고 싶었다. 공연 중에 서울시 의원들이 지나갔는데, 참 다행이지 싶었다. 우리를 똑바로 보라고. 우리 그렇게 불쌍하지 않다고. 우리 변태 맞다고.
(게이인 내가) 주로 이성애자 남성에게 커밍아웃할 때다.
그들은 대체로 명확히 선을 긋고 싶어한다. 커밍아웃을 사랑고백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구리지는 않지만,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에게 고백하면 안된다고 말하던 친구가 있었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분리된, 다른 종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따로 사는 게 더 편하고, 서로는 에로틱한 관계를 가져서도, 가질 수도 없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 쯤 되어야 자신의 세계는 위협받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 같다.(그러면서 자신은 호모포비아는 아니다. 동성애자를 인정하니까.) 그런 친구에게 커밍아웃할 때는 에로틱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진다. 내가 널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지도 모른다고. 우리의 관계는 말랑말랑하고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묘한 암시로 상상을 자극하고 싶어진다. 너와 하는 스킨쉽은 성적일까? 아닐까? 내가 “보고싶다” 말하는 건 우정일까? 사랑일까? 그에게 있어 분명한 동성애/이성애의 경계를 부숴버리고 싶다.(그치만 보통은 씨알도 안 먹힌다.)
퍼레이드에서다.
미국에서 처음 동성애 운동이 생겼을 때 이야기를 영화로 봤다. 게이, 레즈비언들이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원을 돌더라. “평범한 중산층”으로 보이는게 전략이었단다. (지금 여기서 성소수자들이 그러고 있음 웃길 거 같긴 하다. 정장 투피스라……흠 땡기는데) 요즘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퍼레이드하면 경찰이 펜스 치고 퍼레이드 차량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어 준단다. 사람들은 펜스 밖에서 구경하고. 한국의 퍼레이드도 한번쯤은 경찰의 협조와 기업들의 막대한 후원을 받으며 진행되면 좋겠다 싶다가도, “시민”들의 축제가 되는 건 싫다. ‘쟤네는 저러고 놀지, 1년에 한 번쯤 볼거리’가 되는 건 싫다. 우리가 여성/남성의 경계, 세련됨/촌스러움의 경계, 운동권/골빈애들의 경계, 익숙함/낯설음의 경계를 흐트려도, 그들은 그저 하나의 이벤트로 만들어버릴 거다. 1년의 하루가 아니라, 일상을 바꾸면 좋겠다. 매혹적인 공포가 되면 좋겠다.
에로틱이 필요하다.

 

[erotic] #2

미술을 다루는 수업시간, 이런저런 작품 슬라이드들이 넘어간다. 다행히, 한 여성 누드 작품이 나왔을 때 남학생들의 함성은 나오지 않았다(내가 불쾌해 하며 보고 있던, 같은 그림이 실린 책을, 내 뒤를 지나가며 본 한 아저씨는 “그런 좋은 그림이 다 있어?”하고 말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근육질의 남성의 누드 사진이 나오자 한쪽에서 윽,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페미니즘 수업이 싫다고 한, 남성의 몸을 가진 이가 낸 소리였다.

 

에로스―성적 욕망을 가리키는 이 말은 죽음에 대한 욕망을 뜻하는 타나토스와 반대되는 말로서, 삶에 대한 욕망을 또한 뜻한다. 어떤 삶에 대한, 누구의 삶에 대한 욕망일까. 그가 내뱉은 신음은 분명, 사진 속 인물의 삶에 대한 거부였다. 살아 있는 누군가를 거부한다는 것, 어쩌면 에로스의 실상은 그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통적인 서양의 누드화 속 여성들은 화면 너머를 보지 않는다. 관객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눈을 내리깔고 있거나 혹은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림 속 인물과 관객의 대면에서, 오직 관객만이 살아 있는 사람인 것은 그림 속 인물이 그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보기 좋은 물건처럼 그곳에 가만히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신음을 내뱉은 그가, 앙상한 남성의 누드를 보았거나 혹은 다비드 상을 보았더라면 그런 소리를 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죽었거나 살았거나 상관없다. 앙상한 남성은 힘으로 누르면 그만이고, 다비드는 적이 아닌 영웅, 나를 위해 자신의 삶을 쓸 사람이니 말이다. 그는, 그저 자신이 이성애자 남성이라서 다른 남성의 누드를 보고 신음한 것이 아니라, 사진 속 인물이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나체의 여성처럼 자기 멋대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서 신음한 것이다.

(어느새 나는 그가 이성애자 남성이라고 단정하고 있다.)그가 모든 여성의 누드를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다. 여성의 누드를 다룬 미술은 고전적인 누드와 그로테스크한 누드로 나눠볼 수 있다. 황금비율에 가까운 몸을 가진, 혹은 황금비에서는 벗어났지만 ‘곡선미’를 강조한 몸을 가진 (그리고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여성의 누드와 뚱뚱하거나 늙었거나 상처가 있는 여성의 누드. 후자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그저 그 몸이 ‘보기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기 좋지 않은 몸을 당당히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누드화에서와 달리, 그림 속 인물이 스스로의 욕망을 가진 주체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에로스가 삶에의 욕망이라면, 그것은 온전히 자신만의 삶에의 욕망인가 보다.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는 내 뜻에 따라야 한다. 자신의 뜻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내가 그것을 제어할 수도 혹은 이용할 수도 없는 상대로는 나의 에로스를 충족시킬 수 없다. 상대방이 살아 있다면 나는, 사랑이나 쾌락이 아니라 오히려 공포만을 느끼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섹시’해도, 그는 드센 언니는 싫어했을 것 같다.

 

 

[erotic] #1

재미 없다.

‘빅자지쇼’라는 것이 열렸었었다. 홍대 독립 예술가들의 자립을 위한 공동체의 첫 무대라고 했다. 뜻은 Vic(tory) 自 地 Show. 승리하여 스스로 일어나는 땅을 만들기 위한 예술가들을 위한 쇼. 하지만 흔히 하듯 앞글자 따와서 스일승쇼라 하지 않고, 영어와 한자를 조합해 남성 성기, 즉 ‘자지’의 음을 사용했다. ‘빅자지쇼’에 대한 비판이 트위터에서 일자, 주최 측은 이렇게 대응했다. “뭐가 그리 남사스럽나?”
남사스럽지 않다. 재미 없을 뿐이다. 성적인 요소를 외치는 것이 재밌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부류를 성엄숙주의로 몰아가기 십상이다.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 ‘굳이’ 그런 의도는 아니라는 설명을 반복한다. 아마, 웃기고 싶었을 것이다. 주진우의 “코피 퐈-”처럼. 그런데, 남성 성기와 남성의 욕망이 뭐 그리 재미있겠나. 사용되는 욕의 대부분은 남성 성기의 사용에 관한 것이고, 남성 성기 사용에 대한 이야기는 술자리에서 자주 듣는 레파토리다. 모 국회의원처럼 춘향전에서도 남성 성기 사용의 내용만을 뽑아내기도 한다. 예술가의 자립이라는 혁명을 꿈꿨다면, 이런 지난한 진부함에서는 벗어났어야 한다.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식상해서야.

섹스.

왜 재미없냐면 다들 남성 성기의 사용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여성 성기와의 결합 이야기일테지만, “따먹는” 그들의 섹스는 남성 성기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남성 성기는 무릇 여성 성기에 결합해야만 한다.
성적 쾌감을 위해 열심히 섹스/성기에 집중하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달리고 있으면, 에로틱은 원심력에 따라 저 멀리로 날아가기 일쑤다. 사실 에로틱한 상황은 예상치 않은 순간에 나타난다. 길을 가다 스치는 바람이나 나뭇잎이 우연치 않게 적절한 쾌감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승부를 위해 뛰어다니는 운동 선수의 몸동작이 나에게만 판타지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그런데 에로틱한 수많은 상황들 중에 왜 굳이 그 하나의 섹스만 이야기되는 걸까. 눈 앞에는 남자, 여자만 보이고, 남자도 성기, 여자도 성기. 성기가 제일 발칙한가? 남성 성기의 여성 성기에 대한 삽입, 만만세. 이런 상황에서 “잤냐?”라고 했을 때, “’거기’까진 가지 않았다”라고 성기 결합이 ‘불발’되었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은 더할나위없이 적절하다.

그러니까, 게이 레즈비언의 섹스에 대해 하는 질문은 ‘어떻게 하는 거야?’라는 왜 묻는지 알 수 없는 질문 뿐이다.
그러니까, 남성 성기가 여성 성기에 가한 폭력은 그냥 좀 더 발칙한 섹스다.
그러니까, 섹스는 더럽게 재미없다.

원나잇.

그러니까, 그 지난하고 재미없는 섹스 이야기말고 다른 이야기 좀 해보자는 거다. 그런데 내가 섹스 이야기를 하기에는, 레즈비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하지 못하는 말들이 있다. 바로 원나잇. 지금 나랑 섹스할 파트너를 구하는 것은 금지다. 글 삭제, 회원 강제 탈퇴 조치까지 이어지는 만큼의 금지다. 그리고 온갖 비난을 들여야 하는 금기다.
누군가 회칙에 떡하니 존재하는 원나잇 금지에 대해, 이유를 묻는 글을 올리자 온갖 비난의 댓글이 달린다. “사랑은 거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원나잇은 서로의 쾌락을 위해 거래하는 것이니 문제적”이라는 말이 있다. “원나잇 하는 ‘더러운 카페’로 알려져 속상하다”라는 어느 소규모 커뮤니티 주인장의 말도 있다. “처음 만났는데, 원나잇을 하쟤요. 제가 그렇게 쉬워보였을까요?”라는 말도 있고, “너 같은 애들 때문에 레즈비언이 욕먹는다”라는 말도 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섹스 이야기는 로맨틱한 판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곳에서 섹스란 서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함께 사귀기로 결정하고 일 대 일로 ‘일반적’인 섹스의 형식을 기본으로 치뤄져야 하는 ‘성스러운’ 예식인 듯하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원나잇 금지는 마치 어느 종교의 서적 같아서, 이미 규약에 써져있으므로 논쟁 불가, 질문 불가, 믿음 만이 살 길이다.
사랑에 빠질 일 없는 누군가의 섹스는 갈 곳 없이 헤맨다.

한바퀴 돌아온 것 같지만, 절대 같은 자리는 아니다.

이 글이 오독된다면 술 먹은 아저씨와 나누는 이런 대화 같겠지.

  • “섹스 해봤어?”
  •             “그런 이야기 불편한데요.”
  • “섹스 안 해봤구나?”
  •            “해봤는데요”
  • “근데 왜 내숭이야.”
  •             “…”
  • “그래도 결혼도 안 한 아가씨가 섹스 해봤다고 하면 안돼.”

전생에라도 이런 대화를 해본 것처럼 글이 술술 써진다.

섹스 프레임에서 벗어나 이제 다른 이야기 하고 싶다.
그래서 섹스 이야기할거야, 말거야라는 질문은 그러니까 접어두자.
쿨한 척, “나는 상관 없어”도 그만 하고.
프레임에서 벗어난 것, 이상한 것, 다른 것, 나 같은 것,
이런 것 이야기하다보면,
저 재미없는 상황들도 좀 변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