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나는 어떻게 까페키드가 되었나

나는 어떻게 까페키드가 되었나

 

 

고등학생 때부터 카페를 다녔다. 그땐 카페라기보다 커피숍에 다녔다. 밤이 되면 눈에 띄게-이런 표현은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조도가 낮아지고 물탄 양주를 파는 곳들이었다. 7층짜리 러브모텔 같은 것 옆에 붙어있는 커피숍들.

 

우리가 살던 J시는 좁은만큼 소문도 빠른 동네라, 또래들이 가는 캐주얼한 카페에 갈 순 없었다. 여학교와 남학교 애들이 떼를 지어 미팅을 하거나 동아리 대면식을 하거나 하는 옆에서 담배를 피울 수도 없고, 무엇보다도 그런 곳에 드리운 레이스 커튼과 소파는 너무, 소문처럼 지저분하고 고향처럼 촌스럽고 학교처럼 열악한데다 강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설적이게도 고향처럼 강압적이고 학교처럼 촌스러운 어른들이 드나드는 곳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복 후레아 치마를 입고 재킷을 손에 들고 있어도, 들어서는 우리를 제지하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다. 사나운 눈빛의 ‘마담’은 묵묵히 돈을 받아 세었다. 난 더 어른이 된 것 같았지만 아침이면 아빠 지갑을 뒤져 지폐를 꺼내는 고등학생, 어차피 이 돈은 이곳 이집 그리고 내 모든 불행과 악행의 근원인 술이 다 먹어버릴 거였다고 위안하며, 그 진한 화장의 수많은 ‘마담’들에게로 쪼글쪼글 구깃한 채 넘겨질 운명인 종잇돈들을 교복 주머니에 떨지도 않으며 집어넣는, 어쩔 수 없이 문제집 잔뜩 든 책가방을 메고 콧김을 씩씩이며 아빠차에 앉아 등교하는, 옆자리에서 양말을 끼워신기나 하다 꾸중이나 듣는, 고등학생. 학교에선 잠을 자도 맞지 않고 가방에 담배가 들어있어도 소지품 검사에서 내 가방만은 채 열려보지도 못하고 늘 무사한, 신경질적인 여고생. 운동장 트랙을 몇 번이고 빙글빙글 돌아도, 잔디밭 위에 벌렁 드러누워봐도 지겹기만 한 야간자율학습이 끝날 무렵이면 날 데리러오는 친구가 있었다.

 

아빠에게, 아빠 같은 어른에게, 엄마에겐 없는 밤생활이 있듯이 내게도 밤의 생활이 있었다. 아빠에게 지기 싫고 엄마와는 다르고 싶던 우리들 두 여자아이들은 존재감 없이, 은밀하게, 눈에 띄지 않았으므로 더 대담하게 그들의 세계를 침범할 수 있었다. 나는 교복을 입었지만 내겐 학교를 다니지 않아 교복도 입지 않는 친구가 있었다. 온종일 심심하단 말을 달고 살던 그애의 귀에는 반짝이는 귀걸이가 열 개씩 스무 개씩, 아니 서른 개쯤이었나, 머리칼은 발끝까지 내려올만큼 아닌가, 무릎만큼이었나 길고 칠흙같이 검었고 어른들이 다니는 상점에서 우리 엄마 것보다 몇 곱절씩 비싼 코트를 사 입는, 얼굴이 하얗고 코는 오똑하고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빨리 거기에 실리콘을 집어넣고 이빨엔 도자기를 깔았다고 했었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겠지만 그애는 참 어른처럼 보였다. 나야 늘 교복을 입고 주말에 고작 청바지를 입었지만 우리는 똑같이 어른들을 두려워했고 경멸했고 늘 집이 싫었다. 우리는 절대 망가져선 안 될 밤의 생활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시작했다. 담배를 처음 피울 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배웠듯이 그렇게, 멀겋고 쌉쌀하고 프림이 들지 않은 커피를 배워나갔다. 엄마가 설거지하고 식탁에 앉아 마시는 커피와는 전혀 다른, 멀겋고 쌉쌀한 한 사발의 커피. 묽어서 그런가 양도 참 많았지. 

 

어둡고, 격리되어있고, 누구나 자신의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그런 가게들의 소파를 하나씩 차지하고 나른하게 드러누워 우리는 각자의 삶이 얼마나 비루한지만 읊어대었고 우리는 이제 담배와 커피를 한꺼번에 배워나갔다. 지금에 와서야 모든 걸 기억할 수도, 이제 물어볼 수도 없게 되었지만 우리는 아마 외롭고 슬프고 연약한 감정들을 계속 교환했었던 것도 같고 그런 얘긴 안했지만 서로를 많이 좋아했고 그리고 어쩌면 의지했을까, 각자의 말만을 하면서, 상대가 말을 할 수 있도록 그저 내버려두면서 격려했을까. 아마 혼자서는 내 몸을 그런 곳에 맡기지 못했을 거다. 난 나만 그런 걸지 의구심이 들었었지만 이제는 그 애도 똑같이 내게서 용기를 얻었음을 안다. 우리가 거멓게 지친 얼굴로 피워 올린 담배연기만큼이나 우리는 허무해지기만을 바랐다. 허무라는 말에는 멋이 있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초라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에서는 정말이지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울렸다. 내가 보고 있는 너의 모습, 소파에 푹 파묻힌, 온통 검은 실내와 작게 피워진 조명들, 아주 묽은 커피와 담배, 간섭하지 않고 마음껏 부끄러운 짓을 하던 어른들까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이야기였다. 나의 십대를 떠올리면 늘 같은 풍경이 떠오른다. 하나도 퇴폐적이지도 못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야말로 가장 더럽다고 자부했던, 애초에 가장 깨끗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가장 더럽자고 무언으로 다짐하던, 작은 두 여자아이들. 밤의 커피숍에 반쯤 드러누워 겨우 심심하다고 지껄이기나 하던 불만 가득한 얼굴들. 그렇게 우리는 까페키드로 자라났다. 다방커피도 아니고 아메리카노도 아닌 멀건 커피를 술처럼 들이키면서 붉은 얼굴과 쿵쿵 뛰는 심장을 얻어내며 딱 그만큼 어설프게.

 

스무 살이 넘어 내가 J시를 떠나오고도 몇 해가 지난 후, 한동안 이런 나의 성장담은 내게 참기 어려운 부끄러움이 되었다. 내가 훔쳐다 펑펑 써댄 돈은 아빠에 대한 복수도 뭣도 아니라 그저 가족 중 누군가에 대한 인정사정없는 갈취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유흥업소를 경영했었다. 그토록 더럽게 벌어댄 돈이라면서도 친구는 외국으로 여행을 다니고, 돌고래처럼 미끈한 자가용을 한 해가 멀다하고 바꿔댔다. 내 보기에 그 얄팍한 취향으로, 라미네이트한 치아와 실리콘을 넣은 코로, 가끔 고향에서 만나면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며 투덜댔고 그녀를 위협하는 유일한 압박은 이제 겨우 슬그머니 어른들의 입에서 하나마나한 말로 비어져 나오는 시집가란 소리 정도 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쉬운 경멸을 보냈다. 마침내 어느 날 친구와의 술자리에 왠 마초가 동석했다. 첫눈에 지방‘건달’ 같은 그 남자가 건들거리며 빚 안 갚는 연놈들 어쩌고 하는 소리를 지껄여댈 때, 정말로 골치가 아파왔다.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마초들의 영역에 도저히 포섭조차 안되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내 곁에 앉는 순간 나는 그만 두 손 들고 말았다. 우리의 생활은 이제 맞닿을 수도 없게 떨어져있었다. 우리 관계의 역사는 감히 내 입에서 무슨 소리를 할 수도 없게 만드는 무거움으로 기능할 뿐이었고 입이 굳게 닫힐수록 나는 속에서부터 피어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J시와 서울은 이제 너무 멀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J시가 떠올랐고, J시를 생각하면 그녀가 떠올랐다. 피하고 싶은 과거들이 너무나 구체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시시때때로 나를 위협해왔다.

 

그러나 그녀는 때때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토록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로. 뭐해? 로 시작해, 커피나 한 잔 하자. 로 끝나는 짧은 통화들. 지금도 기억하는 어떤 새벽엔, 이쪽은 다음날 아침 발표준비로 똥줄이 타는데 그 나른한 목소리로, 세상에 그 게으른 목소리로, 이 새벽에 안자는 사람은 너뿐일 것 같아서, 라며 전화를 해왔었다.

 

어쩌면 나의 경멸은 너무 쉬웠다. 이제 와서야 겨우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여전히 어두운 커피숍의 자장 안에 있던 친구는 적어도 나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나는 이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로부터 쉴새없이 부끄러움과 분노를,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가려내는 방법과 새로운 원칙들을 배울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대낮의 밝은 길가에서 실컷 담배를 태울 수도 있고, 환하고 예쁜 카페에서 허무 따위를 동경하지 않으며 커피를 마실 수도 있는 완전한 타지에서 홀로 살게 되었다. 타지에서의 낯선 생활, 정확히는 집을 잊을 수 있는 생활, 을 우리가 그 무렵 얼마나 동경했었는지를 나는 너무 쉽게 잊었다.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혐오하는 것은 가끔 집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짜증이 나곤 하는 일처럼 너무나 쉬웠다. 그곳에 있는 불안과 수많은 억압들. 끔찍한 책임감과 기대와 모순들. 지난 이십 년이 고스란한 기억들. 모두 다 내가 서울에 오면서 거기에 놓고 온, 나의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쉬웠던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모른 척 하기는. 또한 경멸을 보내기는.

 

그애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봄의 장례도 사십구제도 몇 달 지나 뜨겁던 한 여름의 일이다. 마음을 추스릴 필요가 있었다. 석관동에서 버스를 타고 종로로 나가 하릴없이 걸었다. 딱 한 명 남은 고향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그 때의 우리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 모두가 고스란히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무도 모르던 밤의 커피숍 같은 일들은. 시커먼 밤을 산책하던 일들은.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던 일, 그 멀건 커피에 익숙해지던 하루하루와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없던 테니스 코트에서의 대화 같은 건, 무엇보다도 그때의 우리 같은 건, 아무도 모르니까. 카페 뎀셀브즈로 갔다. 커피를 고르고 계산하고 기다리고 계단을 오르는 분주하고 복잡한 절차가 익숙하게 사고를 정지시켰다. 삼층으로 올라가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빨대로 쓴물이 끌려 올라오고 눈과 코는 축축하게 젖었다. 이렇게 쓴 커피를 마시는데도 내가 흘린 액체들에선 여전히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는 게 새삼스럽다.

 

한 때 온전히 내 편이라고 생각했었던 내 친구가 죽었다.

나는, 멀리 떠나온 줄 알았는데 아무데도 가지 못했다.

<편> 조각모음

조각모음

 

*

길고 마른 몸에 어울리기 위해 만들어진 옷들을 아무 가책도 없이 내 몸에 대어보고, 내가 마음에 드는 옷을 사이즈에 상관없이 입는 것. 규격화 된 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옷을 입어보는 것. 다리가 통통해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배가 나와도 몸에 딱 붙는 티셔츠를 입어 본다. 거울을 보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고른 건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까 반품을 하거나 옷장에 모셔둔다. 아주 새빨간 옷을 입고 싶은데 내 얼굴이 더 빨개 보이니까 입지 않는다. 어느 날은 기껏 열심히 꾸며놓은 내 모습이 너무 맘에 들지 않아, 약속도 취소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고 싶었지만 도살장 끌려나가는 소처럼 밖에 나가 내내 우울했다. 패션잡지 속의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게 내 태도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자기가 자신을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당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겠어요?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해지세요. 살을 빼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으라는 허튼 소리.

 

**

자신의 취향이란 것을 뭉뚱그려서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취향을 드러낸다. 인명, 브랜드, 장르나 경향, 혹은 국가 같은 것들. 어떤 사람들이 ‘혈액형별 성격특징’처럼 명료해 보이는 마술에 기분 좋게 속아 넘어가주고 분류당하는 것을 즐기듯이, 우리가 참고하고 인용하는 어떤 단어들은 즐겁고 가볍게, 또한 끊임없이 우리자신을 정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명사들-옷의 분위기나 디자인의 특징, 소재에 이르기까지를 대변하는 브랜드이름, “히피”나 “프렌치 시크” 같은 말들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들, 등-로 즐겁게 자신을 정의할 때 여기에는 분명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는 우리 모두가 각자 은연중에 이 함정의 위험을 감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함정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정치적 신념, 죄책감, 미숙함, 열등감, 무언가 폭로당하거나 은폐될 것에 대한 우려, 그리고 타인의 판단, 내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가치저하될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일 수 있다.

 

**

특히 그 함정의 밑바닥에는 결국, 어떤 단어와 도구를 사용해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와 닿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그와는 완전히 별개로 움직이는 것 같은, <타인의 판단>이라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스스로에게 스트리트 패션의 테마를 줬어도 남들은 나에게 비렁뱅이라 이름 붙일 지도 모른다.

 

**

나는 그 함정의 위험성을 과도하게 경계하는 편이다. 어쩌면 부풀려진 결벽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경우 이러한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되어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인가, 좋아하는 감독은 누구인가, 하는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을 못하는 지경으로까지 악화되었다.

 

**

취향의 신화성. 취향이란 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는 신화, 마치 자신의 미감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정해져있었다는 듯한 태도, 아름다움이란 정치나 경제와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순수한 믿음의 신화, 취향이라면 존중받아야 하므로 그게 포르노그라피건 뭐건 비판도 비난도 해선 안된다는 괴이쩍은 신화. 취향의 신화는, 우리가 서로의 취향에 대해서 털어놓을 수 없도록 우리의 입을 막는다는 점에서 참 나쁘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뭔가를 만들어가기 보다 강요당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입이 막혀있으므로 울려퍼지는 단 하나의 목소리는 강요하는 쪽으로부터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다.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끝없이 ‘촌스럽게’ 남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더 나은 것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라는 자본주의의 주문. 비교급으로만 한정된 수사들.

 

**

취향의 우위를 논하고자 하는 어떤 사람들은 티비에도 나온다. 주로 연예인들의 시상식 베스트와 워(ㄹ)스트를 꼽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은 인터넷 댓글로 심한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댓글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증오하는지 절절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최고로 인기 많은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 연예인들이다.

 

***

대학에 들어갔다. 내 몸과 온 마음으로 가난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래도 난 어려서부터 온갖 패션잡지와 브랜드 옷에 단련된 몸이니까, 그 와중에도 루이비통 짝퉁 같은 건 쳐다도 안봤다. 미국브랜드를 카피한 국내브랜드들도 무지해보여서 싫었다. 그 종잇장처럼 얄팍한 여름 티셔츠들. 이 머저리들아 이건 그냥 아베크롬비앤피치 짝퉁일 뿐이야! 역시 경멸이 짱이다. 진짜가 아니면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입고 들고 신겠다는 변형된 허영이 고개를 들었고, 그때부터 허름한 헌옷 쇼핑에 눈을 부라렸다. 말이 좋아 빈티지지, 아주 새것처럼 보관되고 소재도 고급이며 디자인도 당대를 대표해야 한다는 잡지 속 빈티지의 원칙은 가볍게 무시하고 이대 앞의 창고 같은 옷가게들에 죽치고 앉아 먼지에 기침하며 싸구려 옷더미 속을 뒤적였다. 수입옷집에서 이상은이 입을 것 같은 옷도 사다 입고 이상은이 할 것 같은 치렁치렁한 귀걸이나 팔찌도 사봤다. 빈티지샵을 하는 친구가 외국에 나가면 옷을 사다달라고 부탁도 하고, 아무튼 뭔가 특이하고 최대한 새옷 같은 걸 건져내려고 노력했다. 싼 맛에 이것저것 사다보니 쌓인 옷값도 만만찮고 안입는 옷도 많아져서, 그럴 바에야 비싼 걸로 하나 사지(근데 그럴 돈은 또 없네), 라는 생각이 들 무렵부터는 청바지를 사러 동대문에 갔다. 솔직히 내 입장으로서는 아예 어떤 욕망을 포기한 거나 다름없었다. 똑같은 바지를 더 싼값에 파는 곳을 찾아 거대한 미로를 바쁘게 헤매는 일은 애초에 쇼핑의 일탈적 즐거움과 거리가 멀었고 차라리 가계부를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과 더 가깝게 느껴졌다.

 

***

브랜드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그 이미지를 구입하는 것이라는 말은 어느 기준에서나 유효할까? 때로 시장에서 옷을 사면 시장의 활기나 인간미 같은 것들보다 엄마처럼 힘들게 사는 누군가의 생활이 묻어있는 느낌이 난다. 아침에 해먹은 김치반찬이나 카레냄새가 종일 몸에 묻은 느낌이 썩 행복한 것은 아니듯이, 어떤 관계 속에서 내가 건넨 돈이 판매자의 밥과 찬이 되고 차비가 된다는 어쩌면 참으로 명징하고 간단한 사실이 가끔은 구차하고 짐스럽다. 내 생활에 대해 떠올릴 때처럼. 환상을, 혹은 기꺼이 환상에 속아 넘어가기를 포기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

어느 날 아메리칸 어패럴이 생겼다. 사람들은 뉴발란스와 아메리칸 어패럴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나는 뉴발란스를 신은 케네디 주니어의 사진과, 무늬나 장식 없는 면티셔츠에 아르마니를 걸쳐입고 운동화를 신은 발로 뛰어가면서도 테이크아웃 커피를 즐기는 90년대 뉴요커의 클래식을 떠올렸다. 아메리칸 어패럴은 옷에 무관심한척 하면서도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브랜드였다. 티셔츠 중에서도 소재와 핏이 죽인다는 평이 어딜가나 작렬. 한편 무관심한척하면서도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브랜드의 대명사로는 무인양품이 있다. 브랜드 텍을 옷이나 물건에 표시하지 않으면서도 이집트산 면사니 뭐시깽이 린넨이니 소재 표시를 보면 내가 브랜드같이 천박한 것들에 기대지 않고서 웰빙을 지향하는 것 같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무인양품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의 최대치는, 무인양품이라고 적힌 재활용 종이봉투에 새물건을 가득 담고 길거리를 활보할 때 얻을 수 있었다. 탐스슈즈는 가난한 제3세계 아이들도 돕고 뽐도 낼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인데, 어찌나 얇고 허술한지 차있는 사람들이 드라이빙 슈즈로 신기에나 좋다(고 차있는 친구가 말해줬다. 난 얻어 신은 탐스신발 신고 평소처럼 걸어다니다 내 발로 노면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는 쾌거를).

 

***

학교에서 친구들이 시퀸이 다닥다닥 붙은 바네사 브루노, 3절 스케치북도 거뜬히 들어갈 듯한 루이비통 캔버스백들을 아무리 지고 메고 다녀도 이젠 그나마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을 무렵, 말로만 듣던 진짜 부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수업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샤넬로 무장하고 나타나고, 야외답사가 있을 때면 가볍게 비비안 웨스트우드 카디건을 입던(이게 덜 충격적이었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함께 수업을 듣던 그녀가 진짜 충격적이었던 때는, 보랏빛으로 번쩍이는 메탈릭한 소재의 샤넬퀼팅백을 들고 미술관에 왔던 날이었다. 주여, 가난뱅이들이나 어중간한 봉급생활자들은 몇 달치 봉급을 악착같이 모아, 고작 가장 기본적인 핑크나 그레이, 블랙 퀼팅백 중의 하나를 사고선 자랑에 차 번뜩이는 얼굴로 턱을 쳐들고 다닙니다. 가방에 흠이 갈까 애지중지하면서, 어느 옷에나 어울리니까 이런 색상이 최고라고 자위하면서. 하지만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은 저 정도 파격은 돼줘야 지갑을 여나이다! 그들은 할머니 옷장에 널린 고루한 색이 아니라, 금빛으로 번쩍이는 펌프스나 보랏빛이 눈 아프게 발광하는 가방을 사는 것이었다! 레알 부자니까! 사실 내가, 무슨 마르지엘라니 드뮐미스터니 자시고 잡지 속 찬사나 광고니 런웨이 따위에 이상하리만치 무감하게 되었던 데에는 그녀의 공이 가장 컸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았다. 대체 난 뭘 위해서 뭘 추구했으며 무엇을 경멸하고 누굴 부러워하고 뭘 뽐내려 했던 거지? 좌절? 맞다. 난 평생을 벌어도 샤넬매장에 가서 분홍과 회색과 검정을 두고 메탈 바이올렛 퀼팅백을 고를 배짱도 돈도, 죽었다 깨나도 없을 것이다. 허탈감? 그것도 맞다. 하지만 덕분에 취향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영역에서,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가난한 나는, 나를 무엇으로 차별화할 수 있을까?

 

***

언젠가 트위터에서 ‘홍대소녀’들을 비아냥거리는 우스갯소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때 내가 그걸 읽으며 명시된 대로 떠올린 모습을 이야기하자면, 빈티지한 무늬의 원피스 같은 것에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긴 카디건을 걸쳐 입고 북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뭐 이런 거였다. 처음엔 웃음이 나왔지만 나중엔 조금 슬퍼졌다. 사실 지마켓 같은 인터넷쇼핑몰에 싼값으로 널려있는 옷들이 이런 거다. 자잘한 무늬의 스커트나 원피스, 기계로 짜이고 몇 번 입으면 보풀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니트 의류나 커다란 목도리, 명품 가방을 어설프게 따라한 레자가방, 그나마 왠만하면 브랜드 전자제품이고 개중 싸게 구비할 수 있는 헤드폰, 국민신발 캔버스 운동화, 길바닥에서 사도 티도 안나는 레깅스, 이런 것들. 누구나 각자 자신의 경제적 한계에 부합하는 물건들 속에서 뭔가를 드러내려, 골라내려, 예쁘게 보이려, 만족하고파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그걸 보며 취향이 저열하다고, 혹은 속물이라고 코웃음 칠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가게에서 랄프로렌을 발견하고 올레를 외치고, 스타벅스 대신 공정무역 커피를 마셔도 미심쩍은 마음이 드는 나도 그들과 하등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미치자 어떤 비웃음도 내게 돌아올 것 같아 위축되는 마음이 들었고, 또 나중엔 약간의 분노(빡침)와 수치심도 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소비의 방식으로 발현된다, 는 거 다들 알면서. 돌이켜보면 돈이 없건 몸이건 마음이건 가난한 우리 중 누구도 우위에 있진 않다, 는 것도 다들 알면서, 잔인하긴.

 

****

내가 가장 최근에 구입한 “새”옷은, 작년 여름에 샀던 똑같은 디자인의 회색 티셔츠 서너벌과, 작년 겨울초입에 유니클로에서 구입한 검은색 히트텍 한 벌로 마지막이다. 아마 히트텍은 겉옷이라기엔 너무 기능적인데, 하여간 BYC가 아니라 유니클로를 택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타협점이었다. 타협점이라고 가책 받는 듯 점잖게 쓰고 보니 웃긴다. 정말이지 끝도 없는 전쟁이다.

<편> 동지라 불러 본 적 없다

동지라 불러 본 적 없다

* 이 글에 담긴 것은 내가 겪은 ‘한 번’의 경험이다. 하지만 이 글에 담지 않은 다른 경험들에서도, 나는 같은 것을 느꼈고 같은 판단을 내렸다. 그럼에도 한 번의 경험임을, 나의 개인적인 경험임을 명시해 두는 것은, 나의 것과는 다른 경험과 판단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같지는 않을 것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공유되는 꿈을 가진 이들, 일방적으로 요구되는 동등함이 아닌 평등을 공유하며 서로를 동지라 부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평등한 동지에 관해 알지 못하지만, 이 글을 읽을 사람들 중에도, 내가 들은 바 있는, 내가 경험한 바 없는 ‘동지’에 관해 아는 사람들, 혹은 알게 될 사람들이 있으리라. 그래서 적어 둔다. 이것은 나의 제한된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동지들과 함께 한다면 다시 힘차게 일어설 수 있으리, 이젠 절망, 두려움 다 버리고서 나가리라. 우리들의 단결로, 이제는
해방, 우리는 영원한 동지.(원래 가사는 이게 아닌데 난 이렇게 알고 불렀다.)

 내가 평소에 쓰지 않는 몇 개의 단어가 들어 간 것, 그 외에 집회에서마다 불렀던 <동지가>의 가사에 거짓은 없었다. 일어설 수 없는 이들과 늘 함께 있었기에―내가 저 노래를 부른 것의 절반쯤은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장애인 집회에서였다―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적어도 나는 일어설 수 있었다.   동지들과 함께 한다면 이제는 해방, 그 말은 아마 참일 것이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동지들과 함께 한다면, 이 말들이 진실이 되겠지만, 나는, 누구도 동지라 불러 본 적 없다. 

‘동지’라는 말은 소위 운동권 내에서 평등한 관계를 맺기 위한 호칭이자, 말 그대로 동지, 그러니까 서로의 뜻이 같음을 확인하고 긍정하는 말이다. 사뭇 비장한 어조로도, 보통의 사람들이 누구누구 씨, 아니면 아주머니 아저씨 하고 부르듯 편안한 어조로도, 많은 이들이 쉽게 쓰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동지라 불러 본 적 없다, 누구도.

처음에 그랬던 것은, ‘빨갱이 냄새’ 때문이었다. 친구라든가 하는 다른 말로도, 나는 다른 이들이 동지라 부르는 관계와 그 속의 사람들을 충분히 가리킬 수 있었다. 굳이 ‘빨갱이’ 소리 들을 만한 튀는 말을 쓰지 않아도 좋았다. 집회에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성적이나 취업 따위 관심에 두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이미 충분히 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의, 그리고 나를 대하는 다른 이들의 ‘빨갱이 콤플렉스’를 버리고 또 떨친 후에도 나는 동지란 말을 쓰지 않았다. ‘뜻’이 같은 이는 사실 없었다. 당장의 목표가 같다 해도, 그 목표를 가진 이유가 달랐고 그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이루려는 더 큰 목표가 달랐다. 그러니까 애초에, 동지는 없었다.

동지라 부를 수 없었던

메이데이였을까, 다른 학생단체와 함께 공동 실천단을 꾸려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 단체의 사람들은 내가 속한 단체의 사람들을, 나를 포함해, 스스럼없이 동지라 불렀다. 그들이 무엇을 꿈꾸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나와 다른 꿈을 가진 것만은 확실했다. 적어도, 글씨 잘 쓰는 여자애들이 피켓 쓰라고 말하는 그 단체의 남성 활동가들의 꿈은, 나와는 달랐을 것이다.(고백하자면, 내가 속한 단체는 여성이 견디기 힘든 곳이었고―구성원들이 사상이 반여성주의적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단체는 명확히 반여성적이었다― 피켓 글씨를 떠넘길만한 ‘여자애’들이 애초에 없었다.)

한 달 반가량의 공동 활동 기간 내내 나는 그 단체의 사람들을 이름 뒤에 씨를 붙여 불렀고, 그들은 내 이름 뒤에 동지를 붙여 불렀다. 노동자를 조직화하고 혁명을 선도하겠다는, 그러니까 지도하는 전위가 되겠다는(무슨 말인지 나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스스로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 말 외에는 그들을 설명할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내게 붙이는 동지라는 이름은 섬뜩했다. 왜 동지라고 부를까, 무슨 근거로 내가 자신들과 같다고 생각할까, 늘 궁금해 했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 역시 그들을 동지라 불렀다면, 그들이 내가 되거나 내가 그들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굳이 그들을 나로 만들고 싶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들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든, 실천단 밖의 사람들에게 들리고 보이는 모습에서든, 그랬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 달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매일 함께 해야 했고, ‘분위기’를 위해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 했지만(그들도 우리의 비위를 맞추려 무언가 노력했을 것이다. 예컨대 자기네들의 반절도 되지 않는 우리 단체를 동등하게 여긴다든가 하는.), 끝내 동지라 부를 수는 없었다. 그들과 나는 전혀 다른 꿈,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음을 나는 너무도 잘 알았다. 알기 전에 느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나는 그들을, 단 한 번도 동지라 불러 본 적 없다.

동지라 부를 수 없었던

동지라는 말이 더 불편했던 것은, 그들이 우리가 연대했던 파업 노동자들에게 붙이는 동지라는 호칭이었다. 고백해 두자, 나는 이 고된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를 택한 것만으로도 나이를 존중하는 사람이고, 해서 그들이 자기네 나이의 두 배쯤 되는 이들을 마치 반말의 뉘앙스로―그러니까 온전히 동등한(평등이 아니라) 관계맺음―실은 일방적인―의 뉘앙스로 동지라 부르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불편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임을 나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불편했다. 그 파업 노동자들이, 그들과도, 나와도, 같은 꿈을 갖고 있지 않음을 그들이 알고 있음을 나 역시 알았기에 나는 불편했다.

그 노동자들 중에도 혁명을 꿈꾸는 이가 있었을는지 모른다.(서로 다를 그 꿈들을 혁명이란 말로 묶어 놓은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지금의 세상을 뒤엎는 꿈을 공유한다면, 한 번쯤은 동지라 말할 수 있을지도, 그러니까 서로의 뜻이 어느 정도는 같다 여길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적어도 내가 만난 그들은, 그런 혁명을 꿈꾸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만 자기네 일자리가 안정되고 자신의 삶이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이다. 그 꿈이 나의 꿈에 비해 얕다거나 덜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 어떻다고 평가하건 간에, 우리의 꿈은 서로 달랐다.

그런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붙이는 동지라는 호칭이 불편했던 것은 그것이 ‘호명’이자 ‘명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신의 의도에 상대를 포섭하는 익숙한 전략, 지위를 매김으로써 의무를 부과하는 익숙한 전략,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 하고 나를 부를 때 그 두 글자에는 효도에 대한 요구가, 애인이 자기, 하고 나를 부를 때 그 두 글자에는 사랑에 대한 요구가, 국가가 나를 국민, 이라고 부를 땐 애국에 대한 요구가 분명히 담겨 있다. 단순히 나의 주의를 끌기 위해 내 이름을 부르거나, 저기요, 하고 부르는, 혹은 톡톡하고 뒤에서 어깨를 도드리는 행위와 이들은 명백히 다르다.

그들이 노동자를 동지, 하고 부를 때, 그러니까 자신과 다름을 알면서도 같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내가 받아들인 것은 ‘혁명에의 복무’였다. ○○주의자인 내가 당신을 동지라고 부름으로써 당신은 ○○주의자가 된다. ○○주의라는 같은 꿈을 가진 우리, 그러나 더 많은 지식과 비전을 가진 내가 당신보다 조금 앞에 있다. 같은 방향을 가는, 혹은 같은 방향을 가야 하는 우리의 관계에서 앞에 있는 내가 당신을 이끈다. 뒤에 있는 당신은, 내게 이끌려야 한다.

군소노동조합의 파업노동자들에게 학생들은 명백히 ‘도우러’ 온 이들이고, 심지어 도와 ‘주러’ 온 이들이며, 그 때도 그러했듯 대개의 경우, 자신들보다 ‘배운’ 이들이다. 물론 노동조합과 파업의 향방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였지만, 그 자리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들은, 분명히 ‘대우받는’ 존재였다.

심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계급적으로든, 우리는 분명 우위에 있었다. 우위에 있는 우리의 명명은, 설사 그들이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분명 힘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여겼기에 나는, 그들을 결코 동지라 부를 수 없었다. 시종 저기요, 라고만 불러 끝내 그들과 친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은근히조차 그들에게 내 동지가 될 것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충분히 큰 꿈을, 과하게 절박한 꿈을, 이미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꿈을 멋대로 고쳐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도, 나는 동지라 불러 본 적 없다, 그 누구도.

<편> 편들어주고 싶어서

어쩌면 사랑 받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붙여 둔 이름을 빌려다 쓰자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누가 말을 걸든 말을 받아 주고, 아무에게나 전화번호를 알려 주고, 성가실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화를 받는 것이 말이다.

몇 달 전, 전화기에서 김정아라는 이름을 지웠다. 그 몇 달 전 우연히 발견한 그 이름의 주인공을 나는 얼른 떠올리지 못했다. 활동을 그만 둔 사람의 이름도, 일 문제도 만난 학생회 간부의 이름도, 그렇다고 어느 신문사의 기자 이름이나 어느 단체의 상근자 이름도 아니었다. 틈 날 때마다 몇 달을 고민한 끝에 떠올린 김정아는, 어느 저녁 학교에서 마주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촌에서 일을 마치고, 학교에서 하는 친구의 연극을 보러 간 날이었다. 이미 어둑어둑한 저녁, 공연 시작이 십 분 가량 남았을 때 나는 버스에서 내려 비탈을 걷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일행과 함께 행인들에게 말을 붙이고 있었다.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어느 종교를 그는 나에게 권했고, 나는 관심 없다고 답했다. 그는 내게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고, 먼 곳에서 왔다며 놀라는 그를 나는 집은 근처라는 말로 안심시켰다.

그 얼굴을 떠올리고 나서도 김정아라는 이름은 한참을 전화기에 남아 있다가 지워졌다.

흔한 일이다. 지금 내 전화기에는 한 달 전에 만난 만화 공부한다는 사람과 지난해에 만난 심리 공부한다는 사람의 번호가 여전히 남아 있다. 길에서 한참을 이야기 나눈 심리학도의 전화는 끝내 받지 않았지만, 만화가 지망생과는 연락을 주고받다 결국 다시 만나 두 시간 가량 치성을 드려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두 시간 동안 치성을 드려보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귀찮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섰다. 치성을 드리면 일이 잘 풀린다는 말을 하는 그는, 이미 몇 년 째 공모에 낙방해 데뷔를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진심으로 종교를 믿고 그것을 권하는 것이든, 혹은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을 꾀어 등을 쳐 먹으려는 것이든, 당분간 그의 앞날은 계속해서 잘 풀리지는 않을 것 같아 보였다.

그저께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나오는 길에 성경 공부를 해 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꿈을 물었고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지 않냐며, 타인을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해야 한다는 그에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그것이라고 답했다. 인간의 힘은 미약하다며,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그에게 나는 아직 신에 대한 내적인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신까지 알고자 하기에는 당장의 능력 또한 부족하다고 답했다.

결론을 알고 있는―결론은 언제나,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이다― 대화를 십 여 분 동안 하면서 나는 고민했다. 어떻게 대화를 끝낼까가 아니라, 이런 대화를 해도 될까 하는 고민을 했다. 용기 내어 붙인 말이 무시당하는 아픔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슬픔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대화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기만인 것은 아닐까를 고민했다.

어쩌면 사랑 받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붙여 둔 이름을 빌려다 쓰자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상대방이 아프지 않게 하겠다는 것, 상대방의 편이 되어 주겠다는 것은 어쩌면 거짓말일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나의 길을 고수할 것임을 이미 알면서도 듣고 서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 편이 되어 주겠다, 는 것은 인생의 유일한 지침이다.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라도, 귀찮은 사람이거나 지루한 사람이라도, 일단은 그 편이 되어 주겠다는 것, 들을 수 있는 만큼은 들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은 이해해 보겠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다짐이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초여름쯤이었을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어느 영어 학원에서 온 전화였다. 영어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더니 바쁘지 않으면 한 번 들어만 봐 달라고 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는 즐거운 것인지 즐거운 척 하는 것인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밝은 목소리로 영어 잡지의 소개를 시작했다.

몇 분간의 긴 설명이 일단락되고, 그는 내게 자신이 말한 것을 잘 들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들은 상품 구성을 되새기자 그는 추가적인 혜택 또한 있다며 환불이나 교환, 그리고 할인 등의 몇 가지 혜택을 말한 다음 마지막 혜택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 말인즉슨 자신이 전담 상담원이 되어 수시로 상품에 대한 불만이나 요구사항을 확인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질문 하나를 더했다. 제 이름 기억하세요? 뭐였더라, 잠시 망설이다가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세 글자를 말했다. 어머, 감사합니다, 하며 크게 인사를 한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내가 말한 것과 한 글자가 같고 한 글자가 비슷할 뿐이었다.

어머, 감사합니다, 하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진심처럼 터져 나왔지만 어쩌면 준비된 멘트거나 습관적인 대답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 어느 여대 자연대를 졸업해 영어 학원의 콜센터 직원이 되었다는 그의 목소리를, 그 발랄한 음성을, 잊을 수가 없었다.

13분 몇 초, 생각보다 짧았던 통화가 끝나고 나는 그의 번호와 이름을 전화기에 저장했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나도 다시 전화가 오지는 않았지만 그 번호 역시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이름을 제대로 저장한 것인지도 이제 잘 모르게 되었지만, 내가 그에게 연락을 할 일은 전혀 없겠지만, 그 이름은 아마도 지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이므로.

 

정확한 이유는 역시 알 수 없지만, 가식이거나 거짓일는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그렇게 움직인다.

외로운 세상에서, 누구에게든 편이 되어 주고 싶다, 고.

더듬어 보면, 길에서나 전화를 통해서나, 무엇을 권하기 위해 내게 말을 붙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치성을 드리라는 두 시간의 대화가 아무도 양보하지 않은 채 무한정 반복되기 시작한 즈음 다음 약속을 핑계 대며 일어서긴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콜센터 상담원에게도, 학교에서 만난 성경 읽기 모임 멤버에게도, 차 한 잔의 덕만 베풀라는데 왜 혼자 바쁜 척이냐고 따져 묻는 누군가에게도, 나는 이름과 전화번호와 학교와 직장과 고향 같은 것들을 숨김없이 답했다.

만화 공부하는 사람이라며 만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던 그에게 내가 스스럼없이 번호를 알려 주자 정말로 고마워하던 그 표정이 머리에 남아 있다. 요즘 이상한 사람들 많아서 이런 거 잘 안 알려주려고 할 텐데, 믿고 알려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 말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다.

치성을 드리라는 말만 두 시간을 들었지만, 만약 그에게서 연락이 오면 나는 또 그를 만날 것이다. 끝없이 주저하면서도.

<편> Nota bene.

Nota bene.

 

제목은, 명심하라, 는 뜻의 라틴어다. 수업 때문에 논문을 읽다가 뜬금없이 NB라는 두 글자가 문장 사이에 끼어 있길래 찾아 봤더니 그런 뜻이라더라. Bene는 알다시피, 카페 베네의 그 베네다. 자고 일어나면 또 한 군데 씩 생겨 있는, 그 카페 말이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학교 앞에도 결국 카페 베네가 생겼기 때문이다. 학교 앞의 커피값은 평균 이천원 쯤 된다.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모든 커피의 평균이 말이다. 생과일 주스도 보통은 천오백 원 쯤, 제일 비싼 커피래 봐야 사천 원을 채 넘지 않는 동네다.

홀리스 커피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학교 앞’이라고 할 만한 상권에서는 조금 벗어난 곳에 있고 나머지는 전부가 그냥 동네 카페라고 불러도 좋은 개인 사업장이거나 영세 체인들이다. 그런 곳에도 드디어 카페 베네가 생긴 거다. 아직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그런 만큼 더 눈에 띄는 광고판이 길 한가운데에 떡 하니 놓여 있다.

카페 베네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조금 더 가까운, 학교 안의 이야기다. 그리고 정확히는, 그냥 나의 이야기다. 몇 년 전 학교에 들어 올 때 제일 싼 밥은 천오백 원짜리였다. 얼마 뒤 천칠백 원으로 오른 가격은 지금까지 또 몇 년 째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그 당시, 가장 비싼 밥은 이천오백 원쯤이었는데 지금은, 교직원 식당이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빼도 사천 원짜리 메뉴가 수두룩하다.

카라멜 마끼아또가 천오백 원인 동네에도 카페 베네가 들어오는 것처럼, 학교에도 이런 저런 비싼 식당들이 들어 선 것이다. 민자를 유치해 새로 지은 기숙사 식당에서 사천 원짜리 밥을 팔더라고, 삼천오백 원짜리는 잔치국수였다고,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다.

기숙사에는 김밥천국도 들어 왔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나올 때 쯤 곁에 있던 누군가가, 니가 데모를 안 하니까 그렇잖아, 라며 내게 농담을 던졌다. 변명부터 하자면, 안 한 것은 아니다. 민자 기숙사 반대를 열심히 안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동안 문을 열고 입점한 외부 업체에 대해서는, 그저 몰랐을 뿐이다.

그런 것은, 하지만 별 문제가 아니다. 이 글이 학교의 상업화가 아니라 그저 나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다. 김밥 천국이 나는, 반가웠더랬으니까 말이다. 물론 학내에 입점한 외부 기업들, 그러니까 투썸 플레이스라든가 카페 소반이라든가 더 키친이라든가 하는 데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듯이 김밥천국에도 나는 가지 않겠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김밥천국에는 언제나 야채비빔밥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 식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곳에서 사천 원짜리 밥을 파는 시대에, 프랜차이즈 기업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어졌다. 어차피 준직영이니 위탁이니 하는 학교 식당들도 프랜차이즈 기업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을.

어쩌면, 매 끼니마다 고기반찬을 올려 나를 갈 곳 없는 곳으로 만드는―내가 채식주의자라는 뜻이다― 학교 식당보다는 언제 가든 먹을 수 있는 메뉴가 하나쯤은 있는 김밥천국이 어쩌면 더 내 편이 아닐까 싶었다.

슬펐다.

학교에 들어오는 외부 기업에 반감을 안 가질 만큼 무뎌졌다, 는 게 아니라 외부 기업이나 학교 생협이나 똑같이 ‘남’이 될 만큼 내가 날카로워 졌다는 게 말이다.

익숙한 슬픔이다.

‘운동’ 한답시고 이 문제 저 문제 다 들추고 다니면서 정작 내부적인 문제에는 무디던 사람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날카로워 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때 느꼈던 바로 그 슬픔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거리에서 무언가를 외치고, 불편한 농성장에서 쪽잠을 자고 없는 시간을 쪼개 책을 읽고 토론을 하던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되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슬픔이다.

문제가 얽히고설키면서, 내 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반여성주의적인 공산주의자, 여성주의를 말하면서 반장애인적인 언동을 일삼는 사람들, 채식주의자를 귀찮아하는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적인 여성주의자, 엘리트주의에 푹 빠져 있는 전위주의자…반쯤만 내 편인 사람들, 어쩌면 ‘적’보다 더 불편한 사람들,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런 만큼 나의 자리는 좁아진다.

고기는 먹지 않는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과소비도 하지 않는 데다, 가급적이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여성 비하적인 것이든 장애인 비하적인 것이든 욕은 쓰지 않고, 어린 사람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으며, 누나나 형이라는 말도 쓰지 않고, 또 못난 사람을 보고 수군거리지도 않는다―그러니까 나는, 고깃집엔 가지 않으며, 흡연석에도 앉지 않고 쇼핑도 하지 않고, 택시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욕을 쓰는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고, 말 편하게 하세요 하고 말해 주지도 않고 어른 대접을 해주지도 않으며, 얼굴이든 실력이든 못난 사람들 욕하는 사람에게 맞장구 쳐주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담배는 피워 본 적이 없고 장애인 비하적인 욕도 써보지 않은 데다 못 난 사람을 욕하는 것도 원래부터 안 했고 물건 사는 것도 원래 안 좋아 했으니 꽤 많은 것을 안 해 보긴 했지만, 고등학생 때쯤에는 나도 몇 가지 욕을 입에 달고 살았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회식은 고깃집에서 했다. 선배를 만나면 형이나 누나라고 불렀고 후배가 들어오면 말 놓아도 되죠(될까요, 가 아니라), 하고 묻기도 했다. 서너 명 쯤 모이면, 기본요금 거리에는 버스 대신 택시를 타기도 했다.

그러니까 해가 갈수록, 하나씩 안 하게 된 거다. 해가 갈수록 말이다. 같이 고기를 먹던 친구들은 여전히 고깃집에서 회식을 하고, 혼숙만 안 하면 여성주의적 농성이 되리라 생각했던 이들은 몇 년째 똑같은 여성주의 내규를 베껴 쓰고, 나이에 맞추겠다며 조금씩 비싼 물건을 좋아하게 되는 동안, 나만 하나씩 안 하게 된 거다.

친했던 그들과, 즐거웠던 그들과 함께 있으면 이제는 즐겁지 않다. 친구, 라고 말하려면 목에서 무언가가 걸린다. 그들은 여전히 욕을 하고, 사람이 고기를 먹어야지, 하고 말하는 데다가 ‘쉬는 시간’을 ‘담배 피우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사이에서, 나는 쉼 없이 구석을 찾는다. 구석으로 파고든다.

내 편이란 거, 찾을 수 있을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이만 원짜리 외식이나 학교에서의 사천 원짜리 식사나 비싸기는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자나 좌파들이나 성차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여성주의자랑 고깃집에서 놀 수도 없고 웰빙주의 자유주의자랑 채식 식당에서도 놀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나는 말이다.

그래서 외로운 건 아니지만, 심심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예전처럼 또 해 볼 수 있을까. 농성장에서든 과방에서든 호기심에 가득 차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못마땅한 것 없는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는 것, 돈 없이 즐겁게 노는 것, 운동은 즐거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 학교에 있을 것은 김밥천국이 아니라 생협 직영 식당이라고 말하는 것―그 중 하나라도 또 해 볼 수 있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