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변태 제 4호 [할 말]


Download (PDF, 7.48MB)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텍스트 버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글 순서는 잡지 수록순입니다.)

「”그런 애들” 발에 치이도록 많다」(날_해)

「[기고] 폭력적 퀴어 정치학을 위한 단상: 발터 벤야민을 오독하며」(루인)

「   」(안팎)
「똥에 관한 단상」(안팎)
「항문/애널 그리고 섹스」(마쯔)
「소문: 임태훈과 김조광수에 대해서」(상어)
「동물권」(상어)
「   」(안팎)
「동성결혼 합법화가 아닌 결혼제도 폐지를 주장한다」(상어)
「위계를 생산하는 개념들」(마쯔)
「결의문」(유하)
 (덧붙임) 「“모든 시작은 ‘어쩔 수 없잖아’ 였던 것을 기억하세요.”」(안팎)

결의문

결의문

; 유하

 

글이 쓰고 싶다. 잡지가 완성되어 가는 이 시기에, 이것은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글을 보면서 무언가 머릿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할 말’들을 끄집어 내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취업을 하고, 나 자신을 회사와 ‘정상적 사회’의 틀에 우겨 넣으면서, 나의 ‘할 말’들은 회사의 발목을 잡는 부정적이고 눈치 없는 푸념이 되고, 사회 초년생으로서 겸손하지 못한 자존심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나의 ‘할 말’들은 언어도, 화자도 잃어 버리게 되는 것 같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다. 분명 나의 불편함들은 언어를 찾지 못했어도 실존하고 있는 것 같고, 이것은 두통으로 화로, 그리고 다음 날의 숙취로만 구현되고 있을 뿐이다.

뭐가 됐든 좋으니 토해내고 싶다. 다음 잡지에는 꼭 글을 쓰리라.

똥에 관한 단상

똥에 관한 단상

; 안팎

 

<항문/애널 그리고 섹스>와 <소문: 임태훈과 김조광수에 대해서>에서 똥의 위상이 너무 다르다. 도시에서 쓸모를 잃은 똥은 순전한 오물이 되어 버렸다. 고향 시골마을에서 똥은 거름이었고 소중한 것이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내겐 그저 오물이었지만

위계를 생산하는 개념들

위계를 생산하는 개념들

; 마쯔

 

은둔과 오픈

최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은둔이라는 단어를 (주로 트위터에서) 참 많이 보고 들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과연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지 언제나 의문이 든다. 어떤 사람이 은둔인 것일까? 성소수자 인권 활동에 부정적인 사람? 잭디만 하는 사람? 종로와 이태원 술집만 다니는 사람?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결혼까지 하는 소위 기혼이반? 도대체 누가 은둔인 것일까? 사실 오픈 혹은 은둔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서 일정하게 규정될 수 없는 그때 그때의 전략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가령 나의 경우 서울에 올라와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대부분 나의 성정체성에 대해 오픈이지만 고향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대부분 굳이 밝히지 않는다. 공익을 하고 있을 때는 상사들과의 관계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메이데이 집회에서는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다. 이러한 나는 은둔인 것일까? 오픈인 것일까? 사실 이것은 성정체성을 밝혔을 때 유발될 수 있는 갈등, 긴장을 내가 처리할 수 있는가, 그것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전략에 불과하다. 이러한 하나의 전략에 불과한 은둔/오픈이라는 것이 어째서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며 그 사람을 ‘규정’할 수 있는 단어로 자꾸 사용되는 것일까? 이 말이 사용될 때 발생하는 효과가 과연 무엇인 것일까?

은둔이라는 말은 등장과 함께 위계를 생산한다. 오픈과 은둔이 나뉘고 이를 따라 한 쪽에겐 비정치적 주체, 다른 한쪽에게는 정치적 주체라는 태그가 달린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나뉠 수 있는 것일까? 더군다나 한 사람의 삶에서 여러 차례 모습이 바뀌는 은둔과 오픈으로 특정한 사람이 정치적인지 비정지척인지 나뉠 수 있는 것일까? 정치라는 것을 엄밀한 의미로 한정하여 법적 장을 둘러싼 것만으로 규정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성정치가 지향하는, 지향해야 하는 정치인 것일까?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인지하고 담보해야 하는 성소수자의 욕망과 실천이라는 것이 공적 장으로 나올 수 있는 것만으로 한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은둔과 오픈이라는 규정이 하나의 위계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단어는 오로지 자조적 웃음 속에서만 유효할 수 있다.

 

커밍아웃과 아우팅

‘아우팅은 범죄다’라는 슬로건은 성정체성이 의도하지 않은 채 드러났을 때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으며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던 몇몇의 사람들에 의해 지지받았다. 따라서 당시 이 프레임은 단순한 하나의 슬로건이 아니라 무너지는 이들을 도울 수 없었던 이들의 통한이 함께 엮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슬로건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소심한’ 운동으로 국한시킨다며 비판받았고 이제는 거의 폐기된 슬로건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슬로건이 여전히 계속해서 소환되고 다시 비판받는 것을 보았다.(심지어 이것을 주장하는 이들조차 더 이상 남지 않은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이 해묵은 슬로건이 주장하는 이조차 없는데 억지로 재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 슬로건이 해묵은 것이 아니라면 이 슬로건의 등장과 퇴장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효과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 슬로건의 재등장과 퇴장은 위계를 발생시킨다. ‘아우팅은 범죄다’라는 슬로건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이들을 소심하고 시대착오적 정치를 주장하는 이들로 위치시킨다. 이것은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아우팅은 범죄다’라는 것은 (애당초 존재했는지에도 의문이 있지만) 최소한 공적 정치의 장에서는 그 유효성이 다했다. 하지만 이 슬로건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사람들 그리고 이 슬로건에 여전히 동조하는 이들이 품고 있는 욕망과 두려움을 이렇게 쉽게 내쳐도 괜찮은 것일까?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이러한 ‘두려워하는’, ‘소심한’ 이들을 버리고 앞으로 나가도 괜찮은 것일까? 물론 스스로를 국한시키는 사람들을 ‘끄집어 내는’ 방식은 계속해서 실패해왔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두려워하는 이들, (이미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벽장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이들, ‘온건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요구하는 이들, 이러한 이들의 욕망과 두려움에 대한 이해가 삭제된 성소수자 인권운동이라는 것이 과연 어떠한 모습일지 우려스럽다. 이러한 ‘온건’과 ‘두려움’이 지배적인 성소수자 운동이라는 것이 존재해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대한 고려와 이해가 삭제된 성소수자 인권이 과연 괜찮은 것일까?

 

두려움과 용기

이러한 위계를 따라 나뉘어지는 것은 두려워하는 자와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아닐까? 두려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정치적 역량도 힘도 없는 것일까? 그것은 그저 어둠 속으로 스멀스멀 사라지는 그러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두려워하는 눈빛에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일까? 두려움은 다가올 폭력에 대한 예감에서 도래한다. 움츠려 드는 몸, 흔들리는 눈빛, 목 뒤를 타고 흐르는 식은 땀에서 지금 당장의 폭력 혹은 다가올 것이 분명한 폭력이 감지된다. 두려움은 폭력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정확히는 폭력에 대한 예감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당한 폭력에 맞서 싸우고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 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기에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보수 기독교인들의 혐오스런 눈빛과 언설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며 미디어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일까? 오래전 한 활동가의 말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지금 활동하고 이러고 있는 것은 각자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잖아.”라고 말했다. 트라우마, 지울 수 없는 폭력에 대한 기억에서 활동이 생겨난다면 활동가들은 용기 있는 자들인 것일까? 용기는 두려움, 공포의 반대말인 것일까?

<폭력의 예감>을 쓴 도미야마 이치로는 20세기 초 일본에서 징병거부 운동 더 나아가 반전평화 운동이 ‘죽음을 두려워한’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두려워한’ 이들에 의해 ‘용기 있는’ 운동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은 두려움과 용기가 정반대의 감정이 아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감정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앞서의 ‘트라우마’를 통해 활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 또한 이러한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두려움은 폭력에 대한 예감을 통해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폭력을 예감함으로써 이에 맞선 용기 있는 활동들이 생겨난다. 용기는 두려움을 통해서만 가능해지고 생겨나는 감정이며 움직임인 것이다. 따라서 두려움은 삭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성해지게 논의되고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이 두려움의 공유를 통해 가능해지는 것들이 존재한다.

오픈과 은둔, 커밍아웃과 아우팅, 이러한 개념들의 구분과 대조를 통해 두려워하는 비정치적 주체와 두려워하지 않는(용기 있는) 정치적 주체라는 위계가 생산된다. 그리고 이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시작되고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기반을 삭제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이들, 은둔인 이들, 숨고 싶어하는 이들, ‘덜 나내는’, ‘조신한’ 인권 운동을 원하는 이들, 이러한 이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이야말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시작점(하나의 트라우마로서)이자 계속해서 이러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이어져 나가며 이어져야 할 이유이다. 이를 언제나 직시하고 느끼며 이들의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성소수자 인권 운동과 성정치가 지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에 대한 낄낄대는 비웃음과 경멸이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웃음들에서 삭제되어버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으면 좋겠다.

 

 

동성 결혼 합법화가 아닌 결혼 제도 폐지를 주장한다.

 

동성 결혼 합법화가

 

 

 

아닌

 

 

 

결혼 제도 폐지를

 

 

 

주장한다.

 

 

; 상어

 

 

 

 

 

 

<가가 페미니즘>의 저자 잭 핼버스템은 한 강의에서 “내가 직장에서 받는 의료보험을 내 파트너에게 줄 수 있다면, 왜 옆집의 할머니에게 혹은 어느 노숙자에게 그것을 줄 수 없느냐?”라는 물음을 던졌다.

한국에서도 개인이 가지는 국민건강보험을 같이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가족관계증명서에 나타나는 친족 혹은 결혼 상대자와 그의 친족으로 한정된다. 직장에서 주는 복지 혜택이나 휴가 역시 마찬가지다.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수술 동의서에 타인이 싸인을 해줘야 하는데, 법적 친족 관계를 가진 자만이 가능하다. 친족 관계는 결혼을 통해 생성되기 때문에, 동성 결혼만 합법화된다면 동성 커플도 이 권리들을 가질 수 있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동성 커플 파트너가 서로의 보호자로서 수술 동의서에 싸인할 수 있고, 신혼여행 휴가를 받을 수 있고, 건강보험을 공유할 수 있고, 연금 혜택을 상속할 수 있도록 한다. 이 과정 속에서 동성 커플에 대한 사회적 차별도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질문해보자. 왜 우리는 그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꼭 결혼을 해야 하는가?

 

동성 결혼 합법화에 대한 주장은 사법 기관이나 행정 기관이 임의적으로 해석하는 성별에 대한 제약 외에는 기존 결혼 제도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지는 않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현재 결혼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혼인 계약은 민법에 속해있지만, 이 계약의 실효성을 따지는 이유는 대부분 상속에 대한 분쟁 때문이다. 친족 상속법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자녀에게 상속을 하지 않겠다고 문서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사후에 법적으로 정해진 만큼의 상속에 대해서 요구할 권리가 있다. 자신의 가족관계부에 돈을 벌고 있는 자녀가 존재한다면 그 자녀는 법적으로 부양 의무자로 해석된다. 가족으로, 부부로 묶여버린 관계에 대해 국가가 부당한 강제를 제시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 법 속에서 성별의 표시만 제거해서 들어가면 되는 것일까?

게다가 동성 결혼 합법화는 종종 두루뭉술한 로맨틱의 환상 속에 파묻힌 듯 보인다. 결혼의 의미를 되묻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결혼의 환상, 즉 사랑하는 두 사람의 지상 최대의 로맨틱 쇼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 결혼 합법화 이슈를 가장 크게 알린 김승환-김조광수의 결혼식은 결혼‘식’, 결혼식‘케잌’, 축의금1) 등 한국의 일반적인 결혼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 결혼식에서 가장 현실적이었던 것은 다음의 현수막이었다. “주여! 동성커플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지옥을 맛보게 하소서 – 한국기혼자협회.” 난 이 현수막만큼 지금의 동성 결혼 합법화 운동을 잘 설명하는 문구는 보지 못했다. 우리는 바로 그들의 지옥으로 가고 있다.

김승환-김조광수의 결혼식 행사와 영화는 계속해서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과 결혼은 필요충분조건의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반드시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결혼한다고 반드시 사랑하는 관계라고도 할 수 없다. 물론 이성 커플은 결혼과 비혼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반면, 동성 커플에게 비혼은 선택이 아닌 권리 없음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이 권리 없음의 상태에서 이성 결혼 커플과의 동일화 전략을 택한다. 그리고 “한국기혼자협회”의 지옥으로의 환영사를 듣고 있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일종의 제도 싸움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권리에 대한 법적 보장을 요구한다. 동성 커플 간의 재산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고, 의료보험 혜택을 받으며, 유사시 재산 상속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돈에 대한 이야기다. 친족상속법에서 보장하는 돈이 오갈 수 있는 가족 관계에 대한 국가 개입을 다시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의 개입과 한정은 어떤 문제들은 가족과 부부의 범주 안에서만 해결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다. “배우자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까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는 한탄은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 노년을 전혀 보호하지 않는 현실과 맞닿는다. 따라서 우리의 가족 구성권에 대한 요구와 동시에 노년층에 대해 가족 외의 보장 장치가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야 한다. 혼인 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는 현실은 우리 모두에게 부당한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성 커플, 비혼을 선택한 커플들, 결혼이나 혈연관계가 아닌 커뮤니티를 구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결혼이 아닌 다른 방식의 권리 획득을 원한다.

많은 국가들에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구체화되고 법제화되는 반면, 또 동성 결혼 합법화의 법제화도 매우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동성 결혼 합법화는 상대적으로 보장된 길일 수도 있다. 동성 커플이 결혼 제도에 진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견고한 이성애 중심적 결혼 제도를 흔들어놓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얼만큼이나 균열이 생길까? 미국의 레즈비언 리얼리티 쇼 <The real L word>를 보면, 레즈비언 주인공이 자신의 파트너를 가족에게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의 결혼을 원하는 가족과 안정을 원하는 파트너는 주인공에게 결혼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설파한다. 일정한 나이가 되어서 결혼할 것을 요구받고, 임신 혹은 입양을 종용당하며, 이성 커플과 동등한 ‘의무’(?)를 짊어진 삶이 레즈비언 주인공에게 펼쳐지고 있었다.

 

결혼은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아니라,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특정한 관계의 두 사람에게만 한정시킨 부당한 제도에 불과하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결혼을 선택하지 않을 동성 커플의 권리와 부양가족을 벗어나 독립하고자 하는 장애 퀴어의 삶을, 자식과 배우자 없이 홀로 지내는 노년의 삶을 보장받고자 하는 퀴어들을 삭제할 것이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여러 운동들 중에 하나의 전략이지만, 이 전략이 다양한 퀴어의 삶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동성 결혼이 아닌 방식의 삶도 포괄할 수 있을 때 획일적이지 않은 퀴어들의 권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여전히 걱정은 있다. <이티비티티티 위원회>1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급진적 레즈비언 단체를 지향하는 이티비티티티 위원회는 결혼제도 폐지를 외친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요구하는 퀴어 단체와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 보수 단체의 대립하는 계단 중앙에서 결혼제도 폐지를 외치던 이티비티티티 위원회는 양쪽 단체에서 계란을 맞고, 메인 뉴스에 호모포비아 단체로 둔갑하여 소개된다. 멤버들은 경악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더라.2

 

 

 

  1.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인걸>의 감독, 제이미 배빗의 2007년 작품.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10대 레즈비언 주인공이 급진 페미니스트 펑크 그룹 이티비티티티위원회에 가입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렸다.
  2. 라는 것은 뻥이다. 사실 영화에서 그들은 미국의 전쟁기념탑을 성기모형물로 만들어, 발사 및 폭파 시키는 장면을 공중파 탈취를 통해 전국적으로 방영한다. 그리고 체포된 일부 회원이 감옥에서 이티비티티티위원회 지부를 만드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