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가 주최한 2010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의 자료집을 추천합니다.

2010 연세대학교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기획단이 만든 자료집입니다.

완전변태가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추천합니다.

PDF 파일: 몸이 없어졌다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내가 몸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1. 직시

내 몸을 샅샅이 쳐다본 적이 언제였던가. 내 몸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있었던가. 어떤 이미지를 재현하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몸을 연기하지 않은 채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몸을 직시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내 몸을 똑바로 바라볼 때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쾌한 기분이 든다. 내 몸에 대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 내 몸은 항상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그 순간. 그 순간이 나를 불쾌하게 만든다.

2. 알몸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벗은 몸을 바라본다. 나는 불쾌하다. 노란 피부, 처진 유방, 둥근 배, 두꺼운 허벅지. 저 몸은 내가 어젯밤 꿈속에서 그리던 나의 몸과 다르다. 나는 저런 몸을 가진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더 날씬하고 탄력 있는 몸매를 가진 매끈하고 하얀 피부의 젊은 여성이어야 한다. 하지만 더욱 불쾌한 사실은, 거울 속의 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내 의지에 100% 맞추어 움직일 수 없는 뻣뻣한 관절, 내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은 지방을 품고 있는 배와 허벅지, 내 희망보다 누렇고 우둘투둘한 피부 혹은 거죽. 내가 연기하는 육체에 비해 나의 몸은 보잘 것 없다. 나의 시선으로부터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나는 성급히 옷을 입는다. 옷 속으로 몸이 숨겨지자 나는 왠지 모를 안도의 기분이 든다.

3. 배탈

변기 위에 앉은 채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아랫배의 통증이 나를 괴롭힌다. 배탈이 났다. 4시간 전에 무엇을 먹었는지 짐작해본다. 아까 먹었던 우유가 상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마신 우유가 식도와 위장을 지나 소장과 대장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변기 안에서 악취를 풍기고 있겠지. 나는 무언가를 삼키고 무언가를 배설해내는 몸을 가졌다. 한 겹 피부 아래에서는 붉고 축축한 내장이 내 몸 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 나는 물을 내리고 화장실에서 도망쳐 나온다.

4. 월경

월경혈이 내 몸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헝겊으로 만든 월경대를 흠뻑 적신다. 월경혈을 잔뜩 집어삼켜 축축해진 월경대를 찬물에 집어넣는다. 시뻘건 피가 확 퍼져나간다. 피비린내가 난다. 이상하다. 때로는 신기하다. 내 몸에서 피가 나온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이상하다. 다리 사이에서 주르륵 흐르는 월경혈에서 느껴지는 온도와 감촉은 정말이지 기묘하다.

5. 뱃살

뱃살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내가 맛있게 먹었던 음식, 친구들과 마신 술, 침대 위에 늘어져서 책을 읽던 시간, 소파에 누워 좋아하던 쇼프로를 보면서 깔깔대던 시간. 그러한 과거의 경험이 내 몸에 달라붙어 있다. 그 경험이 나의 배에 붙어있는 살이 되었다. 내 배에 붙어있는 지방을 내 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지방에 달라붙어있는, 그래도 제법 행복했던 수많은 경험들이 내 경험이 아니라고 모두 부정해버렸다. 잊어야 하는, 지워야 하는 기억으로 몰아붙였다. 뱃살이 내 몸에서 없애버려야 할 이물질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 모든 기억은 게으르고 탐욕스럽고 수치스러운 과거가 되어버렸다.

6. 만져본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몸을 바라본다. 몸에서 오는 낯설음을 바라본다. 내 몸인데 왜 낯선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홀랑 벗은 채, 멋대로 굴러다니는 내 몸을 바라본다. 방금 먹은 음식을 열심히 소화하고 있는 위장의 움직임을 느껴보려고 한다. 월경혈이 월경대를 흠뻑 적시는 것을 지켜본다. 말랑말랑해진 뱃살을 만지작거려본다. 슬며시 불쾌해지지만 그래도 계속 해본다. 나쁘지 않다고 억지로 말해본다. 언젠가는 내 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겠지?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그래도 불쾌하다. 어떡하지?

하늘에서 몸들이 비처럼 내려와_기린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거울 보기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A: 오늘은 그리스 신화 중 나르시서스 이야기를 들려줄게.

  나르시서스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님프 리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야. 리리오페는 나르시서스를 낳고 나서 테베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아들이 오래 살 것인지를 물었는데, 테이레시아스는 “자기 자신을 모르면 오래 살 것”이라고 대답했대. 나르시서스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해서 숱한 처녀들과 님프들이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느 날, 나르시서스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이들 가운데 한 명이 그 역시 똑같은 사랑의 고통을 겪게 해 달라고 빌자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이를 들어 주었다. 산에서 사냥을 하던 나르시서스는 목이 말라 샘으로 다가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하게 되어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고 샘만 들여다보다가 결국엔 쓰러져서 죽었대. 아, 샘물에 빠져 죽었던가? 어쨌든 뭐, 죽은 거지.

B: … 정말 나르시서스는 죽어버렸어? 슬프다…

A: 응. 그렇다는데? 그러니까 오늘의 교훈은, 이런 자아도취에 너무 빠지면 안 된다는 거지.

B: 진짜? 진짜 그래? 그렇게 말고… 다르게 거울을 볼 수는 없어?

  *아래 채록된 구술사에서  “-”는 말을 길게 늘인 것을, “…”는 잠시 멈추며 망설이듯 말한 것을 의미한다. 이야기 도중 웃음이나 표정 등의 표현 및 부연 설명은 ( ) 안에 넣었다. 채록자의 말이나 웃음, 행동은 이탤릭체로 썼음을 밝힌다.

 [전략] 그러니까 그건 어느 여름 수요일 아침이었어요. 모처럼 친구랑 점심 약속이 있었거든요. 친한 친군데 걔랑 같이 밥 먹은 적은 별로 없어서 좀 들떠 있었죠. 아, 또 그 날 친구랑 같이 가기로 한 식당이 예전에 잠깐 일했던 곳 근처였거든요? 그래서 거기도 잠깐 들리려고 딱 계획을 짜놨죠. 제가 원래- 먼저 연락해서 밥 약속 잡고 이런 걸 잘 안 해서 그런 바쁜 사교적인 날이 흔치 않은데(웃음)… 여튼 그 날은 좀 많은 사람들을 만난 날이었어요.

 입을 옷을 겨우겨우 고르고 나서 딱 거울을 봤는데! 와- 그 날 진짜 한 15분 넘게 거울만 쳐다보고 있었던 거 같아요. 괜히 이런저런 표정 지어가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뭐 머리 손질하다가 아니면 화장하다가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 거울 속 저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어요. (잠시 정적)

 평소에는 입을 옷 고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그때그때 다른데… 평균적으로… 한 10분? 15분? 제가 꾸미는 데 그렇게 공을 많이 들이는 편은 아니에요. 그냥 자연스럽고 편하게 입는 거 좋아해요.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패션에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건 아니구요-. 자연스럽게 제 스타일을 말해줄 수 있는 거 있잖아요. 그런 거 좋아해요.

 그 날도 그렇게 입긴 했는데, 그래도 그 날은 옷 고르는데 한 30분 넘게 걸린 것 같아요. 오랜만에 보는 사람도 있어서 좀 신경 쓰이기도 했고. 아, 맞다! 사실 전날 밤 대충 다음날 아침에 입을 옷을 정해놨었거든요? 근데 아침에 좀 밍기적대다 보니까- 우리 엄마가 그 옷을 입고 외출해버리신 거예요! (하하!) 아, 진짜-. 그래서 입을 옷 다시 고르고 하다 보니 더 오래 걸린 것 같아요. 하여튼 그래서 결국 그날 캐러멜 색 반바지에 속이 좀 비치는 잔잔한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었는데요. 입고 나서 제 방 화장대 거울을 딱 봤는데, 오- 괜찮은 거예요! (웃음) (하하) 근데, 그 때 느낌이 진짜 좀… (그녀는 갑자기 진지해졌다.) (15초간 정적)

 그 때 느낌이 어땠는데요?

좀… 이상하고 묘-했어요. 내가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있는데… 거울 속에 비친 내가 ‘나’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닌 타인인 것 같은 느낌 있잖아요-. 꼭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서스가 된 기분이었어요. 막… 자아도취. 그 날 제(외적인 모습)가 너무 예쁘고 멋있어 보이는 거 있죠? 으아—부끄러워. 아, 죄송해요. 진짜 부끄럽다. 지금 속으로 ‘얘 뭐야? -_-;;’ 이런 생각 드시죠?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들 가끔 자아도취에 빠질 때 있잖아요. 하하!

아우~ 그래도 그 날은 좀 달랐어요. 왜냐면- 왜냐면… (좀 작은 목소리로) 그 때 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서 잠재적인 연애 상대로도 호감이 가는 그런 감정을 느꼈거든요. 만약 밖에서 그런 사람을 봤으면 순간 ‘아, 좀 내 스타일인데? 좋은 사람일까? 꺄아~ >_<’ 하며 연애 걸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았어요. 이런 거… 너무 좀 이상하지 않아요? (5초간 정적) 제가 소위 “중성적”이라고 하는 외모에 끌리는 편인데- 아, 성별 상관없이요. 근데 지금 제 머리 스타일이 커트형이잖아요. 그래서… 아, 모르겠다. 여튼 저한텐 되게 특별한 경험이었는데, 부끄럽고 민망해서 다른 사람한텐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봐 다른 사람한테 말을 못하신 거예요? 그… 거울에 비친 자기(여자) 모습을 보면서 마치 타인을 향할 때처럼 연애 감정이 일었다고 얘기하면, 상대방이 “야, 그럼 너 원래 다른 여자를 보고도 그런 느낌을 느껴?” 라고 할까봐? 원치 않는 커밍아웃으로 이어질까봐 라거나…?

음… 제 주변 사람들 중 어떤 이들에게 그 때의 제 느낌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 데에는 그 이유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제 (양성애자) 정체성을 알고 또 굳이 “이해”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친구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냥… 부끄럽잖아요. (수줍은 미소)

 그리고 일단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거 자체가 어려웠어요. 그 때 거울 앞에 선 순간 나와 타인의 경계 자체가 되게 모호해졌고, 거울 속 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 속에 ‘내가 나를 보는 시선’과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 그리고 ‘내가 타인을 보는 시선’ 세 개가 다 한꺼번에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며칠 전에 친구랑 이야기하는데- 걔가 이러더라구요. 앞에 놓인 상을 지금처럼 선명하게 반사하는 거울이 나온 이후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시선으로 우리 몸을 볼 수 있게 된 게 아니라 사실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또, 어떤 연구자들은 우리가 현재 이미지 산업시대에 온통 거울 혹은 디카, 핸드폰 같은 거울의 변형에 둘러싸인 나르시시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기도 하고요. 근데… 나르시시즘적인 의미에서 자기 몸을 보는 거랑,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 몸을 보는 게 다른 거예요? 같은 건가? (이 때 그녀가 말을 잠시 멈춰서 나는 ‘내가 대답해야 하는 건가’ 싶어 순간 긴장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곧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우리의 몸을 육체자본으로 여기면서 우리의 몸을 외모를 중심으로 기획하고 통제하려 들 때- 내 몸에 대한 “나”의 욕망과 타인이 내 몸에 대해 간섭하는 근거가 되는 욕망, 그러니까… 소위 사회적으로 구성된 욕망을 어떻게 완전히 철저하게 구분할 수 있어요? 이런 맥락에서는 타인의 시선과 나르시시즘적인 시선 이 두 개가 절대로 서로 모순되는 의미가 아닌 것 같아요.

에휴… 이렇게 뒤범벅된 몸인데, 거기다가 그 날 아침엔 내가 타인을 보는듯한 느낌까지 더해졌으니- 그 날 제가 얼마나 멍-했겠어요. 아, 아니다. 멍했다기보다는 묘-했죠. 그 느낌이. 아, 근데 좀 재밌는 게- 그 때 전 제가 제 몸을 타자화하고 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어요. 마치 타인을 보는 듯이 끌리는 마음을 가지고 거울 속 제 모습을 보긴 했지만.

 네? (나는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 다시 물어야 했다.)

음- 그러니까… ‘타자화’라는 건 자아 혹은 주체가 어떤 ‘타자’를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그 타자를 배제하고 또 (부정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뭐 그런 과정이잖아요? 이성을 가진 ‘주체’가 몸을 타자화하고, 자기 몸에 대해서 소유권, 통제권을 주장하고, 막… 몸을 자기 맘대로 기획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성형외과에서 “견적(=성형비용)” 뽑아보고 이런 상황에선 몸/정신 이분법에서 타자화된 몸의 위치에 대해 별 의문이 안 들긴 하는데… 모든 사람이 항상 자기 몸을 타자화하지는 않잖아요. 그 맥락에 따라 다르고… 아, 어쩌다 보니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왜 이야기가 막 이렇게까지 흘렀지? 어쨌거나, 그 날 거울 앞에서 전 설레면서도 편안했어요. 거울 속 나를 ‘타인을 보듯이’ 본 거랑 ‘타자화하면서’ 본 건, 말장난 같지만 서로 다른 것 같아요. 전 그냥 그 때… 제 몸이 제 몸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때 거울을 보고 있던 내 시선엔 아까 말했던 세 가지 시선(내가 나를 보는 시선/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 내가 타인을 보는 시선)이 정말 역설적이게도, 조화를 이루고 있었거든요. 세 가지 빛이 거울 속 내 몸을 관통하는 것 같은? 그리고 또 그 거울에서 반사되어서 거울 앞에 선 내 진짜 몸도 관통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세 가지 시선이 뒤죽박죽 모두 공존한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어지럽진 않았어요.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였거든요. 그냥 그 사실을 내 몸은 조용히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다양한 종류의 시선들이 모두 겹치고 또 만나는 곳. 그게 몸인 것 같아요. 나중에 내 몸이 또 그 날처럼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하면… 또 그 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요. (웃음)

-구술자: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이야기를 잘 해주었던 타라(Tara)

-채록자: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이야기를 잘 들었던 타라(Tara)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폭식, 거식, 어떤 식으로든 나는 괴물이 아니다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죽음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지독한 경련을 일으킬 만큼 자극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녀를 지배하며, 그래서 자신의 상상 속에서 어떤 종류의 환영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히스테리성 정신착란증을 보이는 여성은 과거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미래로 날아가기도 하여 모든 시간대를 그녀의 현재로 만든다. 이 모든 이상한 상념들은 그녀의 성에서 나온 것이다. […] 황홀감이나 환영, 예언, 계시, 도취경에 빠진 시, 그리고 히스테리, 이러한 것들보다 서로 유사한 것은 없다. […] 히스테리에 사로잡힌 여성은 지옥의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천상의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때로 나는 소름이 끼치기도 하였다. 나는 그 여성이 자신의 일부인 난폭한 짐승의 분노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았고 소리를 들었다. (Denis Diderot, 『여성에 대하여』, Frankfurt 1981, 174)

내 몸은 무엇에 대해 소화불량 상태가 된 것일까? 버스를 타러 가다가 아침에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냈을 때 나는 거식(폭식)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어쨌거나 나의 몸은 닥치는 대로 집어 삼키고 뒤집어지고 게워내고 있다. 이러한 비명소리를 간과할 수는 없다.

거식의 <조건>에 대해서 써 본 적은 있다. 배고픔과 유리된 낮, 깜깜한 자취방, 삽시간에 몰려드는 허기에 대해서. 진공청소기처럼 음식물을 흡입하던 내 혀와 식도에 대해서. 초코파이 한 통을 해치웠고 처음으로 토했고 식탁엔 아무도 없었던 밤에 대해서. 서문에서 자취방으로 가려면 거쳐야했던 5개의 편의점과 만원어치씩 구입했던 몽쉘, 캬라멜 마끼아또, 다이제, 갖가지 맛의 월드콘과 구구콘과 처음으로 토했을 때 목격한 초콜렛과 유지방 덩어리들에 대해서. 변기를 내려다보면 흡사 악귀나 연체동물 같은 형상들이…… 나는 불도 켜지 않고 냉장고 문, 찬장 문, 책상 서랍을 차례로 열어젖혔고 씹을 수 있는 것이면 아무것이든 끄집어내어 삼켰다. 샤니 호빵은 차가운 채로 삼켰고 스팸은 굽지 않고 삼켰다. 버터크림, 글래이즈드 도넛, 금지되었던 음식, 동생이 잠든 시간, 내 방에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눈과 동생의 눈과 신촌거리에서 나를 위아래로 훑었던 수천 개의 눈들이 이무기처럼 벽 사방에 뻗쳐있는 허공. 위장이 터질 듯이 부풀어 열기구처럼 나를 허공으로 소환했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나는 흡사 걸신이나 괴물 같은 형상이었다.

어떤 날은 별 생각 없이 쵸코칩 봉지를 뜯었다가 연쇄적으로 마치 발작처럼 다른 음식을 마구 집어먹게 된다. 가끔 거식의 의례들은 내 몸을 34-24-34의 숫자와 비하는 모든 체계와도 닮았다. 삼킨 것들을 칼로리로 수치화해보고 하루 권장섭취량인 2000kcal와 비교해보고 초과한 분량만큼 굶거나 다시 죄책감을 극대화시킨다. 거식은 질서정연하게 치러진다. 과자 한 조각을 참지 못했다는 작은 죄책감에서 비롯해서 종국에는 몸을 오도 가도 못하는 벼랑 끝까지 밀고나간다.

– “내가 폭식을 한다고 말하면 <슬퍼>?”

– “너는 어떤데?”

변기를 붙잡고 있으면 머리통이 거꾸로 솟구치는 바람에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액체가 나오는 상태가 발생한다. 구토, 콧물, 눈물, 땀이 걷잡을 수 없이 흐른다. 목구멍에 넣었다 뺐다하면 손가락에까지 끈적하고 추접스러운 액체가 묻는다. 젖은 김에 엉엉 울어보기도 한다. 라면 스프나 마쉬멜로우처럼 생명이라곤 없는 식재료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토사물 그 자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외로웠고 슬픔, 추악함, 공포감, 들켜선 절대로 안 된다는 확신 같은 것을 느껴.

언제부터 거식이 시작되었는지를 반추해보면 그것은 성적존재로의 <인식>과 분명 관련이 있다. 대학에 입학한 일, 연애를 한 일, 내게 여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욕망하는가보다는 무엇에 욕망되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였고 내 몸은 욕망되어지기엔 너무 뚱뚱했다. “예뻐졌네.” “살 빠졌네.” “얼굴 부었네.” 일상적으로 건네는 인사들을 거울을 볼 때마다 얼마나 자주 강렬하게 떠올리는지 상대방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왜 나는 아름답지 않은가? 왜 나는 사랑받지 않는가? 날씬한 몸, 그래 그것이 문제임은 자명하다. 페미니즘도 거식을 멈추진 못했다. “이대로 누워있자.”고 해도 발가벗은 채로는 견딜 수 없었다.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이 몸을 통째로 응시하거나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스스로를 독립된 존재로 인지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지배규범은 나의 자화상을 일그러뜨려 놓았다. 나는 누구보다 아름다워지고 싶기도 했고 동시에 절대로 여성이 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여성이라는 성적존재가 된다는 것, 그렇게 인지되는 굴곡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몸을 입고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일련의 행위들은 곧 여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성폭력적 시선, 성형수술, 남성 등속과 절대 떨어질 수 없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든 몸이라는 거대하고 오래된 물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여성으로서 날씬해지길 바라면서 동시에 몸 자체를 거부하려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지? 세상에는 거울과 쇼윈도와 카메라가 너무 많다. 열등감이나 패배감, 몸을 가졌음을 인지할 때의 부대낌 같은 감정들이 거울에 여과 없이 비춰지고 미니홈피로 인화되곤 했다. 나는 충분히 괴로웠다.

그러나 나의 몸은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는가?

            아니다. 어떤 날엔 누구보다 맹렬하게 행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거식을 한다. 마구 먹어대거나 마구 토해낼 때, 그때만큼 나의 전체가 먹는다는 것에 대해 온전히 몰입하는 경우는 없다. 내가 궁금했던 것들은 오히려 나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왜 얌전하게 점심약속을 잡고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하지? 나는 먹는 모습을 공유하고 싶지가 않다. 나에게 식탁은 때때로 거대한 공포와 같다. 왜 다들 토하지 않지?

모두가 몸에 대해 얘기하고 동시에 먹을 것을 권한다. 내가 보기에 이건 극악무도한 모순이다. 모두들 회식자리에서 매운 것을 먹고 친구와 케이크를 먹으며 수다를 떤다. 기본적인 사회성을 갖추려면 뭐든 먹어야 한다. 최소한 커피라도 마셔야 한다. 반면에 예뻐지려면 먹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간극을 사용하여 위태로운 상품들이 발명된다. 단식원이나 식욕 억제제같은 노골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모두는 언제나 먹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고 먹을 것을 구매한다. 제로 칼로리 콜라나 다이어트 컵누들 같은 것들은 슈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물 두 컵을 식사 전에 마시면 적게 먹고도 포만감을 느낀다거나 초콜렛 두 조각을 먹으면 밥맛이 없어진다거나 하는 인터넷 지식들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위를 잘라내어 음식 섭취량을 줄이는 위우회 수술을 받는 여성들을 보고 모두는 불쌍하다거나 그렇게 까지 해야 할까 라며 혀를 차지만 일상적으로 세밀하게 이뤄지는 먹을 것에 대한 통제나 요법들의 용의주도함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다들 무딘가? 모두들 날씬한 몸을 원하지만 먹지 않는 몸을 원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말랐다거나 먹어도 살이 안찌는 체질은 칭송받지만 그 외에 살을 빼기 위해 굶거나 고기를 먹지 않는 여자는 외모지상주의에 포획된 속물이나 내면을 가꾸지 않는 그저 그런 여자가 된다. 모두들 거식증에 걸렸다는 모델의 앙상한 등을 보며 징그럽다고 말하지만 TV만 틀어도 볼 수 있는 얇은 다리와 신촌 거리에 즐비한 그만큼이나 마른 다리들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가? 왜 이 전쟁터에서 모두들 그렇게도 침착한가?

거식은 그러한 모순을 가장 통렬히 인지한 몸의 비명소리다. 가장 양심적으로 여자 되기를 수행하는 몸이라면 쉴 새 없이 구역질을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날씬한 몸을 원한다면 내가 그것이 어떻게 불가능한지를 보여주지. 몸은 짐작과는 달리 아무런 저항이나 부대낌 없이 규범에 구겨 넣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몸의 잉여이다.

히스테리가 있다. 히스테리에는 간질이나 발작, 경련, 호흡곤란, 두통, 메스꺼움 같은 신체반응이 큰 것부터 불감증이나 촉각 마비, 실어증, 기억 상실과 같은 신체반응이 작은 것, 그리고 불안정한 걷기, 생리불순과 같은 부분적인 증상들이 포함된다. 요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서는 갑작스러운 짜증, 분노의 발작, 과대공포, 예상불가능, 거짓말, 변덕스러움 같은 증상을 히스테리컬하다고 표현한다. 그동안 히스테리의 증상은 변화해 왔지만 히스테리의 환자 노릇을 독식해온 것은 언제나 여성들이었다.

“히스테라Hystera”는 그리스어로 자궁을, “히스테리아Hysteria”는 자궁의 이동을 뜻한다. 히포크라테스는 히스테리를 “자궁에 의해 야기되는 질식”이라고 지칭하고 특히 처녀, 과부, 불임여성 등에 발생하며 아주 일반적인 최대의 여성 질병이라고 정의했다.1) 자궁의 질식이 곧 병 걸린 여성으로 치환되는 그리스 시대의 등식은 건강한 여성은 곧 임신한 어머니로 치환되던 등식의 대우로 성립했다. 기독교에서는 악마퇴치를 골자로 마녀추방 의식을 통해 히스테리를 치료하려 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히스테리를 자궁이라는 신체기관의 병으로 진단해 의학수술로 히스테리를 치료하려 했고, 19세기 말 독일에서는 난소를 제거하거나 음핵을 불로 지져 여성의 성욕을 없애려고도 했고, 프로이트에 와서는 히스테리 치료가 남성 리비도를 여성에게서 떼어놓기 위한 정신분석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이 모든 기괴한 의술의 공통점은 히스테리 여성의 몸을 없애려는 시도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정신-몸, 문명-자연, 이성-비이성의 대립항에서 언제나 여성에게 후자의 역할을 내맡기고는, 그와 동시에 남성의 논리적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여성의 몸 언어들을 소거해버리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노처녀 히스테리나 주부 히스테리 언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분류하지만, 히스테리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허영심, 질투심, 신용없음과 같은 항목들은 그동안 여성을 싸잡아 비하하는 데 사용해온 여성의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특징이라는 것이 성실하게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이 지배적인 몸 규범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할 때, 그것이 히스테리가 된다.

그러므로 히스테리 환자들은 “정상적인” 여성을 재현함으로써 이러한 “정상적인” 상태가 사실은 가장 불합리하다는 것을 직시하도록 만든다. 육체에는 질서정연한 기능이랄 것이 없음을, 육체는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언어에 얌전히 포획당하지 않음을 사지를 뒤틀며 증명한다. 언어가 여성의 몸에 부여해온 이상적인 몸-이미지를 파기한다. 규범과 법칙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무질서를 조성한다. ‘히스테리는 논리, 질서, 이성 등이 모두 “인공작품”임을 공표하며 그럼으로써 그것들이 가장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 즉 자명성을 제거한다. 어떠한 여자도 히스테리 환자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여자역할을 연기하지 못한다.’2)

나에겐 거식증이 있다. 히스테리가 육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저항이었다면 거식증은 육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항에 가깝다. 여성의 몸에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섹슈얼리티나 이미지 같은 것에 포획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침착하고도 냉정하게 스스로의 몸을 유기해버린다. 나는 몸이 없다. 그 몸은 나의 몸이 아니다. 너희가 먹는 몸과 날씬한 몸 모두를 원한다면 나는 그 모두를 버려주지. 이것은 규범에 연속적으로 패배하면서도 끝내 그를 따라잡으려는 감정만이 아니다. 불가능한 두 개의 몸을 강요해놓고도 시치미를 떼는 그의 뺨을 후려갈기는 일격 같은 것이다. 놀이동산이 존재하는 이유는 놀이동산 바깥의 세상이 놀이동산임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온 세상이 몸에 대한 광기와 집착으로 가득 차 있음을, 모든 몸이 아주 낮은 소리로 구토하고 있음을, 나의 거식하는 몸은 직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몸은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정신과 분리된 몸, 프로젝트화 된 몸으로 구획되기를 맹렬히 뿌리치고 무언가를 끈질기게 발화하고 있다.

몸이 말하게 한다. 몸의 말을 듣는다. 이것은 병리적이거나 추악한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몸은 아프면 성실하게 생채기를 내고 열꽃을 피운다. 국가는 전쟁통에 죽은 시체들을 감추려든다. 나의 몸뚱이는 내 마지막 보루이다. 나는 끝까지 둔감해지지 않을 것이다.

– 매운 카레 먹으러 혜화동에 갈 것, 파니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몸이 몸에 대해 말하다 : 뜯어맞춰지는 고통, 우울에 관하여.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1. 이제 그만, 소년을 위로해줘.

  하지만 내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편하지 않아

그들이 내게 강요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남자스러움말야

난 자꾸 그럴수록 마냥 불쾌한 듯 찡그리다가 나중엔 그냥 웃지

  … …

딱 봐서 약해 보이는 녀석들은 단숨에 물리치되

나보다 강한 녀석과는 나중에 적이 되지 않기 위해 한 수레 위에 올라타야만 해

단순해 보이는 여자들에겐 매너 좋은 오빠로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진짜 남자로서 똑바로 살아가는 방법이래

이를 따라가는 광경이 내 눈에 어지럽게 맺히고만 있는데

여자가 돈 쓰는 모습은 몹쓸 짓이라고 녹슨 지갑을 꺼내며 내 친구는 얘기해하지만

내 귀엔 짊어질 필요 없는 짐은 그만 내려놓으라고 말할 기회로 들릴 뿐인데…

  … …

무엇다워야 한다는 가르침에 난 또 놀라, 우린 아마 이렇게 멍들어 가는지도 몰라.

큰 혼란… 물론 나를 이토록 많은 함정 속에 빠트려가는 건 바로 나 자신인걸

습관적으로 모든 일들에 익숙한 척 가슴을 펴지만

그 속에서 곪은 상처는 아주 천천히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어

세상이 선물한 거울을 완전히 닮기 전에 내 그림자를 밟은 오늘을 이제는 기억해

손을 위로 드는 것 아니면 감았던 눈을 뜨는 것

가슴에 심장소리를 여전히 간직하는 당신에게 말해. 이제 당신안의 소년을 위로해줘1)

      사실 의외는 아니었다. 나에게 그는 늘 무리를 하는 것 같아 보였으므로. 소년은 남자가 되기 위해 분투했고, 지쳤고, 지긋지긋해졌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는 공허한 우울을 나에게 호소했다. 나는 얄팍한 위로의 손을 뻗었다. 얄팍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건, 내가 어리고 약하다는 핑계로 그의 무리를 외면해온 까닭이다. 어떤 언니들은 말했다. “이런 건 원래 남자가 하는 거야.” 어떤 오빠들은 말했다. “남자들 다 어디 가고 너희들이 이런 일을 해?” 그렇다. ‘이런 일’은 남자들의 것이었다. 나는 그와 그들의 희생-책임지고 힘든 일을 자처하는 것-을 원래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얼척없는 희생은 군 입대 문제에 와서 극에 달했다. 같이 떠들고 웃던 친구들, 운이 좋으면 빠져나갈 수도 있을 테지만, 대개 2년간 모든 인생계획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꾹, 꾹, 꾹 참고 견뎌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인정받는 남자다운 남성이 되기 위해서.

      정말 이 모든게 당연한 건가?

군대문화에 대한 개인적 혐오는 차치하고, 대체 왜 이 나라에서는 국방의 의무가 남자들에게만 부과되는지 나는 당췌 알 수가 없다. 자유롭게 누비고 살고자 할 때는 사사건건 제약을 주는 사회의 규범이 내게 국방의 의무만큼은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면제된 책임에 대해서는 금기인양 입다물고, 이등병 생활의 고통을 호소하는 친구의 이야기에서 ‘다움’의 도마를 본다. 도마 위 퍼질러진 밀가루 반죽을 본다. 예쁘게 정렬된 쿠키처럼 규격화된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서, 쿠키반죽위에 틀을 찍어 모양을 만들듯 사람 위에 차가운 철제 틀을 찍어 누른다. 그러나 잉여로서 깔끔히 떨어져나가는 틀 바깥의 밀가루반죽과는 달리, 이렇게 잘라내는 것은 살아있는 살이다. 살아있는 마음이다. 팔이 조금씩 잘리고, 발가락이 조금씩 잘리고, 쓸데없는 감수성이 잘려나가고, 사상이, 신념이 잘려나가고, 고통에 머릿속이 뒤틀어져 아파아파 피흘리는 친구들. 수많은 규범의 틀이 있으나, 군인을 양성해내는 공정에서 군대는 가장 적나라하게 ‘다움’의 틀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좀 더 냉철해지기로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참상의 안전지대에 있는 것일까? 남성 바깥의 성별들은 이러한 규격화의 폭력에서 벗어나 있는 걸까? 나에게 정말 쿠키 모양을 찍어내는 틀은 강요되지 앉는가? 규범은 면제되는가? 아니다, 아니다. 나는 확언할 수 있다. 소년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그에게서 자기연민을 느낄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성애 여성으로 여겨지는 나 또한 무엇이 되어야 했다. 나는 ‘그’와 동질적인 압력을 느꼈고 동질적인 우울에 시달렸다. 나는 어디까지는 확장될 수 있지만, 어디로는 침투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야 했다. 나 또한 도마 위의 반죽이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틀로써 나를 사람다운 사람, 여자다운 여자로 다듬고자 안달하고 있었다. 액면상 나는 이를 별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내 몸은 이질감을 상당히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팠다.

2. 얼굴 길들이기 ;

     우울과 고통.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 아픔들은 일방적으로 특정 규범을 강요당하고 그를 거부함으로써 벌어지는 순결한 투쟁과정 속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냥 희생하는 것 같아 보이던 ‘그 남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우울과 고통의 과정 속에서 규범에 대한 타협과 결탁, 그리고 규범을 따른 후 주어지는 보상이 있었다. 규범, 성별이분법은 남성과 여성 두 성으로 사람들을 구획했다. 이 틀에서 남자는 ‘위험하고 중대한 책임’을 지면서 보호하는 존재로 확장되었다. 반면에 여자는 비교적 안전하면서 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의무를 지는 ‘배려’를 받으면서 보호되는 존재로 축소되었다. 여기에는 가부장제가 다분히 스며있었다. 기실 가부장제는 적통의 승계를 전제하고 있는 제도이고, 정통성을 잇는 계보에서 군복무와 같이 특정 책임을 면제받는 존재인 ‘열등한 여성’은 조용히 제외되어왔다는 데 슬픈 진실이 있다. 역설적으로 남성 또한 가부장제의 온전한 승자는 못된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이분법의 구도에 의해 배정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딘가 결핍된 사람으로 치부되어 불이익을 받았다. 우리는 온몸으로 우리에게 책정된 ‘다움’을 표현해야 했고, ‘다움’에 걸맞지 않은 부분은 가차없이 제거하거나 최소한 외부로 보여지지 않게 해야 했다. 이런 ‘다움’의 검증 후에야, 규범이 지배하는 공간의 권력 체제 안에서 유리한 위치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락 우리의 기존 체제 질서에 대한 종속에는 자발적 측면도 분명히 존재했다. ‘순리대로’라면 우리도 머지않아 특정 권력 구조 안에서 ‘기성화’되어 기존 체제를 공고화하게 될 것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나 역시 약게 처신했다. 나는 이 사회에 막 귀속되었다는 점에서 이방인이었고, 잘 모른다는 점에서 약한 개체였다. 몸과 마음 양자를 매개로 하여 나는 규범을 ‘적당히’ 받아들였다. 내 자신의 ‘정상성’을 복장, 말투, 표정 등 온갖 표현수단을 통해 호소하면서 내가 ‘그들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했다. 나는 가면을 썼다. 나는 사람의 마음은 안개와 같다고 생각한다. 색색의 입자로 가득 찬 거대한 안개인 마음. 어떤 사람을 응대하느냐, 어떤 상황에 마주하느냐 따라 그 입자들은 마음의 표면으로 몰려와 내 표정을 형성한다.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얼굴도 있고, 친구의 흉을 보며 즐거워하는 얼굴도, 화가 나서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도 있다. 연출된 인위성도, 속에서 우러나온 진정성도 그 때 그 때의 얼굴을 형성하는데 모두 일정 정도 가미되어 있다. 나는 내가 속한 새로운 ‘사회’속에서 무난히 수용될 수 있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 표정을 온화하게 다듬었고 길들였다. 천편일률적인 일상 속에서 요구되는 얼굴은 뻔했고, 이는 하나의 가면이 되었다. 이에 대한 연장은 화장이고 옷차림이었다. 나는 내 겉모습을 길들였다. 난 내 몸을 길들였다. 나는 나를 조형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오랜 기간 나는 피학자인 동시에 학대자였으며, 자기분열의 지점에 서 있었다. 그럴 필요성은 충분히 있었다. 내가 있는 공간은 거대한 연애시장이기도 한 까닭이었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팔리는 상품이 되기 위해 열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은 만족스러운 교환에 성공하면 자랑스럽게 ‘솔드아웃Sold out’을 말했다. 자기 자신조차도 서슴없이 관리와 경영의 대상이 되었다. 가치를 매기는 서열화의 틀인 성별 이분법의 당위성을 거부하는 사람은 매력없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보복을 받았다. 나의 비겁함은 여기에 있다. 말로 채 형체화되지 못한 반론을 꾸역꾸역 누르고, 그 틀에 타협하고, 그로 인해 얻어지는 이득을(혹은 불이익 받지 않음을) 즐거워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들의 틀에 맞춰 적당히 발췌해 나를 보았고, 나는 그들의 잘못된 독해를 방조했다. 나는 규범을 체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매력이 없는, 이성애적 연애대상으로서는 매력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때 의 울컥함이 싫었다. 나만 낙오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3. 그러나, 가면 속의 우울.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견딜 수 없어졌고,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파야 할 구석이 없는데 왜 아픈지, 왜 우울로 시들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괴로웠다. 마치 구토 직전의 몸 같았다. 막상 뭔가 가득 쏟아내고 나면 시원해질 것이지만, 그러지 못해 괴로웠다. 

ㅡ정신의 구토감과 몸의 구토감은 뒤섞여있었다. 긴장이 팽팽히 신경을 잡아당기고, 압력이 정수리로 쏟아질수록 나는 내 몸을 안고 아파 낑낑댔다. 정신이 몸의 연장인지, 몸이 정신의 연장인지, 애초에 둘의 인위적 구분이 무의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거대한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가 저급한 것이 거북했다. 당최 진원지를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친구들이 그 목소리에 순응하면서 스스로에게 칼질을 하는 모습은 소름이 끼쳤다. 어지러웠다. 외면해도 우울해지고, 끌어안기에도 우울해지는 규범이었다.

    친구가 말해주었다. “다이어트 해야돼! 뭐 좀 그랬을 때 아 내가 너무 못생겨서 그런걸까? 라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살빼고 싶다. 어제 충격적인 것도 봤어… 내가 보기에 100kg 확실히 넘는 여자가 지하철을 타고 있었어. 그여자 / 어떤여자 / 남자 / 나 이런 순서로 타고 있었어. 여자-남자는 커플인 듯 싶었고. 여자가 (100kg 넘어보이는) 여자 때문에 자리가 좁아서 자꾸 짜증을 내는 거야. 아우씨 이러면서. 나중에 그 커플 여자가 100kg 넘는 여자분을 노려보면서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남친이랑 노려보고 자리를 떠났어. 난 너무 슬펐어. 그 언니는 얼마나 슬펐을까. 나는 그래서 지하철에서 울뻔했어. 그 언니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그 여잔 뚱뚱한 사람은 1인석을 넘어가니깐 지하철 같은건 타면 안된다는 식으로 언니한테 욕했어. 그냥 화가 나도 그런 거 겉으로 굳이 내비쳐야 했나…나는 어제 하루종일 슬펐어요. 나 고3때는 지금보다 훨씬 살이 쪄 있었어. 그래서 지하철에서 앉기가 싫었어. 거울에 비치는데 몸이 너무 커서, 그게 너무 싫어서 자리에 앉지 않고 갔었는데, 그게 막 떠올랐고 너무 슬펐어요. 내가 살이 안 빠지고 고3때 모습이라면 옆에 있는 여자가 그 언니한테처럼 나한테도 욕했을 것 같아.” 나도 울고 싶어졌다. 4년째 친구는 정상성의 기준에 억눌려 몸을 줄이고자 노력해왔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게 삶의 목표였고, 언제나 무난하고 평범한 선택을 해왔다. 사회의 규범에 비추어 자신이 비정상적 존재로 여겨지자 견딜 수 없이 매일매일 괴로워했고, 한 때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싫어했다. 

     또 다른 친구가 말해주었다. “내 남자친구는 때로 내 아빠같아.” 왜 하필 아빠일까. 스물 남짓한 청년에게 아빠같다니, 넌센스가 따로 없었다. 그녀는 여리여리하게 예쁘고 말랐다. 서울대에 너끈히 합격할 정도로 공부도 무척 잘해서 주변의 많은 아이들이 그 애를 부러워했다. 나는 내심 내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몇 년 뒤, 그 잘난 친구를 그녀의 애인이 휘어잡고 조목조목 일상에 간섭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스러웠다. 같이 다니면서 나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 높은 하이힐과 스키니진 사이로 보이는 그 애의 가는 발목을 걱정하곤 했다. 저러다 실수로 넘어지면 저 하얗고 가는 발목은 힘없이 툭 부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저 연약해 보이는 몸을 저 애의 남자친구는 자신이 보호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한걸까. 일상에 속속들이 스며들면서 내 친구를 그의 방식으로 빈틈없이 사랑해주고 있는 걸까. 간섭, 참견, 통제… …. 내 친구 또한 그를 사랑하기에 애인이 아버지의 행세를 하는 이질감 정도야 로맨틱한 연애구도로 치환시켜 끌어안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친구가 다시 한번 말했다. “가끔은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어. 그렇지만 사,랑,하는 데… 우리 관계에 문제가 있는걸까?” 나는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어. 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만큼은 확실하지만… ….”

   내가 사랑하는 두 몸이 있었다. 통통하고 곰돌이 인형같은 몸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바싹 마른 몸. 생에서 여러 번 상처가 두 몸을 관통했고, 둘 다 일정 정도의 우울을 품고 살고 있었고, 각자의 얼굴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 또한 약한 개체였다. 규범의 목소리가 그들의 행동, 복장, 말투, 표정을 통제했고 그들은 반쯤은 자의로 그 틀을 받아들였다. 바꾸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고, 그래서 적응은 필연적으로 순응적이었다.

식상한 어투로 말을 건다. 대상은 분명치 않다. “이런 거 너답지 않아! 그만둬!”

아마도 이렇게 받아치겠지. “나다운 게 뭔데?”

나는 뭐라 대답해야하는 걸까.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의 양식은, 그러니까, 적어도, 나는 사실, 내가 져야 할 짐을 떠넘기고 싶지 않다. 소년을 위로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외풍을 직접 맞는 게 두려워 남을 내 앞에 세우고 싶진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라는 니체의 거창한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나지만, 서투르지만 날것의 목소리를 내어 나의 언어로 말하고 싶었고, 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더 이상 내 안의 균열을 외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