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범주의 재구성 -몸의 경험을 중심으로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나는 나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얼마 전, 친하지도 않은 누군가들이 나에게 짓궂게 ‘혹시 게이에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당황했다. 그간 적잖게 저런 식의 질문 아닌 질문들을 받아왔고, 그런 경험이 늘수록 더 이상 당황하지 않고 요령있게 피하는 법을 익혀왔지만, 그 날은 전같지 않게 당황했다. 물론 저 질문은 ‘일반남성’같지 않은 나의 몸짓이나 말투를 보고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수근거림 끝에 마지막 확인절차로서 나의 대답, 혹은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저 질문을 받기 전부터 그이들의 수근거림을 눈치챘었고, 언젠간 물어올지도 모른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고, 어떤 표정과 말투로 대답하면 좋을지도 생각해놨었다. 게이냐는 추궁에는 익숙해져 있었고, 그렇기에 크게 당황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날만큼은, 생각해놓은 대로 요령껏 피해가면서도, 내 마음 어딘가에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당혹스러움의 응어리가 떠올랐다.

  저 날로부터 반년 전쯤,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장소와 사람들과 질문의 맥락은 전혀 달랐다. 그 날에 난 성소수자운동단체 사람들과 있었고, 나를 당연히 이성애자남성이라고 전제하고 있지도 않았고, 나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도 없었고, 그 질문은 질문이었다. 나는 나의 성/별정체성을 그 사람들 앞에서 한번도 내 입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에 그 자리의 많은 사람들은 ‘남성’으로 보이는 나를 막연하게 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않을까 한다. 나도 그게 편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데 게이에요?’라는 질문은 정말로 나를 당황하게 했다. 헤테로 섹슈얼리티가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장소에서 그 정상성의 권력으로 나의 ‘비정상성’을 스스로 까발리라고 공격하는 맥락에서 게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요령껏 잘 넘기려고 노력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그런 맥락이 아니었던 질문은 섣불리 넘길 수가 없었다. 나는 대답해야 했고(대답하고 싶었고) 대답을 하기 위해 나는 내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반 년동안 그 질문을 애써 묻어두고 살았다. 그러다 얼마 전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 기억과 질문이 떠올랐고, 그 질문이 불현듯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니까, 나의 성/별 정체성을 무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나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남성’과 ‘여성’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한 세상에서 내가 돌아버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말이다.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있다고 느끼는 건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견딜만한 일이지만, 그렇게 떨어져나와서 내가 어디쯤을 가고 있는지, 내가 뭔지 나조차도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을 때는 참 힘들더라. 그러니까 적어도 스스로는, ‘어떻게든’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더 이상 미루기에는 뭔가가 응어리져 나를 짓누르고 있었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더듬거리면서 걸어갔다.

  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더듬거리면서 걸어갔다. 지금 돌이켜보건데, 그 여정의 지표는 기존의 성/별범주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스물 두 살때쯤, 나는 내가 ‘남성’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런 남성으로서 나를 혐오하거나, 혹은 죄책감을 느꼈다. 어떤 날이면 나는 음경이 있는 내 몸을 저주했고, 그 몸으로 살아온 나를 혐오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일반 남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나의 경험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지금까지 수행해 왔던 ‘남성성’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더 이상 나를 ‘일반 남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그래서 내가 게이 혹은 바이인가 생각했다. 남성의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일반 남성’과는 다르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당시에 그 정도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LGBT 중에 내가 속할 수 있는 것은 G와 B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언어는 빈약했고, 나는 어떻게든 나를 설명해야 했고, 기댈 곳이라곤 기존의 범주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밖에 없었다. ‘헤테로 남성’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나를 명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게이 범주에 나는 속하지 못했다. 나는 ‘남성’으로서 ‘남성’을 좋아하는게 아닌 듯 했다. 그 때 쯤 나에게는 ‘남성’이라는 범주는 굉장히 불명확한 것이었다. 그럼 바이라고 하면 해결되는 걸까? 내가 좋아했던 몇몇은 ‘여성’이기도 했으니? 마찬가지로 ‘여성’이라는 범주 또한 굉장히 불명확했다. 무엇보다 나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는게 싫었고, 나를 남자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많이 괴로웠는데, 내가 바이라고 나를 정체화하는 순간, 내가 남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어야 했고, 계속 더듬거렸다. 남성으로서의 나에 대한 혐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동시에 계속 남성을 연기하는 나에 대한 혐오도 커져갈 때 즈음, 그럼 나를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정체화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생각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남성으로 살아온 세월을 없앨 수 없었고, 감히 나를 ‘여성’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여러가지 억압과 폭력을 경험하고 있는 여성들 앞에서 수십년 간 남성으로 살아온 내가, 여전히 남성으로 대해지고 있는 내가 어떻게 감히 나를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여자친구들에게 혼자 여행다녀왔다고 이야기한 후 ‘넌 남자니까 가능하지…나도 가고싶다’라는 한숨섞인 그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거울 앞에 서면 ‘남성의 몸’이 보였고, 나는 그 몸을 보면서 도저히 나를 ‘여성’이라고 정체화할 수 없었다. 음경이 있지만 남성으로 정체화하고 있지 않은 나는 뭔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비수술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기뻤고, 나를 위한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아도 트랜스젠더라고 정체화할 수 있구나. 하지만 나는 남자옷을 입고 다닌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대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서 생활을 영위해나간다. 그런 이상 나는 나를 비수술 트랜스젠더라고 정체화할 수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자신을 프리커밍아웃(pre-comingout) 비수술 트랜스젠더라고 설명하는 걸 보았다. 단어를 보는 순간 나는 멍해졌고, 저 말이 갖는 뉘앙스가 나에게 흘러들어왔다. 나를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남자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남성의 몸’이 싫다. 공용샤워실은 고문이었다. 수술을 하진 않았다. 수술은 내 상상력 범주의 밖이기에, 수술을 하고 싶지도, 안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태어났을 때도 음경이 있는 몸으로 태어나는건 생각하기 싫다. 일어나면 ‘여자몸’이 되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들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많은 경우 남성으로서 살고 있다. 프리커밍아웃 비수술 트랜스젠더라는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나를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MTF라고 했을 때, M은 대체 뭐고 F는 대체 무엇인지.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범주, 그것보다 모호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난, 어떤 날이면 남성의 몸이 싫었지만, 또 어떤 날엔 감흥없이, 익숙하게 그 몸을 바라보기도 했다. 또한 내 몸에는 부정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남성’으로 살아온 20년의 역사가 쌓여있었다. 그 ‘남성의 몸’에 대한 익숙함과 ‘남성’을 수행하면서 형성해온 내 몸은 나를 MTF로 정체화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고, 그래서 더듬거리며 걸어갔다. 어느 단어로 나를 설명하려 할때마다, 계속해서 무언가 찜찜함이 남았다. 뭔가 맞으면서도 동시에 아닌 것 같다. 단어들이 저마다의 울타리를 치고는 내 앞에 있다. 어느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면 나의 일부는 설명이 되었지만 일부는 묻혔고, 일부는 안정감을 얻었지만 일부는 나를 밖으로 떠밀었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 단어들에 집착할수록 울타리는 높아져 갔고, 그 경계는 명확해졌고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되어갔다. 어딘가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수록 나는 점점 더 없어지고 더욱 높아진 울타리들만 남았다. 나는 어느 울타리로 들어가든 뭔가 어중간하게 걸친 듯했고, 그렇게 걸쳐져 있는 부위는 울타리에 찔려 피가 났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 몸은 왜 이따위로 생겨먹은걸까. 하고 생각했다.

몸의 속삭임

  내가 여정의 지표로 삼았던 것은 틀렸다. 그랬기에 내 여정은 기존의 범주와 명명들이 각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더욱 높은 울타리를 치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그 사이에서 나의 몸은 분절되서 그 사이에서의 고통을 떠안는 것으로 끝났다. 나의 질문의 서사와 전제는 놀랄만큼 이분법적인 섹스-젠더체계의 그것과 비슷했다. “섹스-젠더 범주의 경계는 확고하다. 그러니 너는 너의 위치를 명확히 하고 그 범주의 규범에 너 자신을 맞춰라.” 하지만, 그 경계라는 것이 그렇게 명확한가?/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경계 안에는 모두 동일한 경험만이 존재하는가? 하나의 몸을 언제나 하나의 범주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 경계설정을 둘러싼 역학관계는 무엇인가? 나는 오히려 이러한 것들을 물어야 했고, 그 여정 속에 되려 등한시되었던 나의 몸경험을 여정의 지표로 삼아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내 몸은 점점 더 말라갔다. 먹고 싶은 걸 참는 게 아니라, 몸이 먹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하루에 수십 번 체중계로 올라가서 무게를 달아보고, 조금이라도 숫자가 늘어있으면 내 몸은 더욱 먹기를 거부했고, 그러다보니 20kg가 넘는 수치가 줄었다. 어느 날, 그러한 나의 몸 경험이 나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몸은 음경이 있다. 동시에 나의 몸은 먹기를 거부한다. 내 몸이 먹기를 거부하는 건 여성으로서 아름다워지기 위해서였다. 음경이 있는 내 몸이 동시에 ‘아름다운 여성’이 되려고 하는 것은 모순일까. 이러한 몸경험을 단순히 생물학적 기관(음경)을 증거로 들이밀며 ‘남성의 몸’이 ‘잘못된 시도’를 하는 과정으로 독해하면 다 해결되는 것인가? 혹은, 의료기술을 통해 ‘남성의 몸’을 버리면 그 모순의 간극은 줄어들 것인가? 내 몸은 나에게, 하루빨리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선택해 거기에 내 몸을 맞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었다. 나의 몸은 오히려 이렇게 묻고 있었다. “성별정체성이 정말로 본질적이고, 그 범주의 경계는 명확한가?” 생물학적 기관(음경)을 기반으로 한 성별정체성(남성)이 본질적이며 여성/남성 범주의 경계가 명확하다면, 이러한 나의 몸경험은 존재해선 안 됐다. 분명히 존재하는 나의 몸경험은 오히려, 생물학적 몸의 차이에 따른 정체성 범주가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그 경계가 불명확함을 드러낸다. ‘남성의 증거인 음경이 있으니 나는 남성인가? 하지만/동시에 여성으로서 아름다워지고 싶으니 나는 여성인가?’ 라고 갈등하는 나를, 몸은 비웃는 듯했다. 마르는 것이 어째서 여성-되기로 의미화되니. 음경이 있는 몸이 어째서 ‘남성의 몸’으로 의미화되는거니. 음경이 있으면서도 몸이 두꺼운 여성, 음경이 없으면서도 몸이 얇은 남성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니? 남성은 뭐고 여성은 뭐니? 나는-그냥-그래.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이고, 남성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여성이 아니야.

  그래서 지금에야 생각하건데, 나는 조금 더 현명해야 했고, 조금 더 내 몸을 어루만져 주어야 했다. 스스로 설정한, 혹은 기존에 설정된 이성애-젠더 체계의 매트릭스를 둘러싼 범주들의 무게에 짓눌려, 거기에 맞춰 한 범주에만 속해야 한다고/속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나보다. 나는 유동하는 내 몸을 박제하려고 했고, 그랬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의 명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건 의미있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그 명명에는 포섭되지 않는 몸을 남긴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나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폐기했어야 했다. 그러한 시도가 내게 남긴 것은 한 범주에 속하기 위해 잘라낸 몸들과, 그럼에도 잘려나가지 않아 느끼는 고통이었다. 나는 잘려져 덜렁거리는, 무어라 명명하는 동시에 묻혀졌던 몸을 외면하지 않아야 했다.

  내 몸은 시시각각 변한다. 주로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서 변한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있을 때는 비교적 충실하게 남성의 몸을 수행한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는 낮아지고 말투나 행동은 딱딱해진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나를 비트랜스이성애자남성인냥 인식하고, 그것은 편이를 준다. 그 때의 내 몸은 비트랜스남성이기도 하고, 혹은 드랙킹이기도 하다. 그러한 인식이 짜증날 때면 살짝 다른 몸을 수행하기도 한다. 몇몇 가까운 사람들과 있을 때 내 몸은 또 다르다. 목소리는 가늘어지고 말투나 행동도 하늘하늘해진다. 만약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았다면 같은 사람이라고 편하게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내 몸은 달라진다. 그 때의 내 몸은 트랜스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성애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 어느 이성애자여성 앞에서 내 몸은, 아슬아슬했던 것 같다. 남성의 몸이면서 동시에 (다른 매력은 없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착실한 이성연애는 하고싶지 않으므로 훗날을 생각하여) 트랜스여성의 몸이기도 하다. (효과는….많이 없는듯^^) 성애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남성 앞에선 또 달랐다. 내 몸은 언제나 하나의 동일한 몸도 아니고, 관계 속에서 해석되고 인식되고 형성된다.

  한 순간의 내 몸도 한 가지 틀로 박제할 수 없다. 공중화장실을 가면 내 몸은 언제나 움츠러든다. 모두 부끄러움 없이 바치춤을 내릴 수 있다고 ‘정의’된 남성용 공중화장실은 내겐 고역이다. 내 몸은 역겨움과 부끄러움에 움츠러들어 조용히 문을 잠그고 좌변기를 이용하든가 남성이 나가길 기다린다. 미화직 여성노동자가 들어올 때면 내 몸은 또 다르게 움츠러든다. 이 때의 내 몸은 비수술레즈비언트랜스젠더의 범주와 게이(혹은 바이) 범주의 경계지대에 있는 몸이다.

  나는-그냥-그렇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 몸이 말해주고, 나는 조금 더 섬세히 내 몸의 결 사이를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할 것은 내 몸을 기존의 섹스-젠더-섹슈얼리티 범주에 기대어 내 몸을 하나의 단일한 범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할 것은 하나의 몸을 하나의 단일한 범주로 설명할 것을 요구하는 것, 그를 위해 그 범주의 규범에 맞게 내 몸을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내 몸은 기존의 범주들 사이에 끼여 있는 어중간하고 이상한 몸이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폐기되고 수정되어야 할 것은 내 몸이 아니다. 오히려 폐기되어야 할 것은 내 몸을 조각내고 있던 범주의 인력들, 그리고 명확하다고 인식되는 그 경계들이다. 바로 내 몸이, 그 경계들의 취약함과 겹침과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나는, 조금 더 편하다. 높게만 보였던 울타리들은 힘을 잃어가며 허술해졌고, 그 사이에서 은폐되어 있던 틈새들이 보인다. 내 몸은 그러한 경계의 틈새 즈음에 혹은 경계지대에 머물러 있고, 그것이 이전만큼 고통스럽지 않고, 내 몸은 그 울타리들을 넘나든다.

by_흘러가고 흘러가는, 수어ㅇ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되는대로 타자치기 : 유동하는 섹슈얼리티, 유동하는 몸과 고통과 환희와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1.

커밍아웃할 때 나는 ‘레즈비언’ 정도로만 말했다. ‘이성애’ ‘여성’에 맞지 않음을 설명해야 했고, 짧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묻지 않고 궁금해 하지 않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해야 하는 지난함” 그 가운데 커밍아웃의 파장은 늘 생각보다 작았다.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레즈비언’에 덧대어진 식상한 편견만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내가 무릅쓰고 발화해야만 하는 상황, 최소한 상대에게 정직하다고 여겨지기 위해 내가 취해야만 하는 태도와 그 사이에서 휘발된 나의 진실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예를 들어 총여실은 침묵하는 자를 이성애자로 치환하지 않을 정도의 예의를 유지하는 공간이다. 총여실 바깥으로 가면 나의 몸은 예외 없이 ‘이성애자’ ‘여성’으로 읽힌다. 내가 뭘 의도했든 전혀 엉뚱하게 하나의 몸으로만 읽힌다. 가끔 원피스 입고 하이힐 신고 수업에 가면 “소개팅 하냐?”고 묻는다. 남성에게 욕망되어질 몸으로 읽힌다. 애인과 손잡고 있으면 새로운 남자친구인 줄 알거나 절친한 단짝인 줄 안다. 두 여자의 몸 사이에서 섹슈얼한 공기 따윌 읽어낼 리 없다. 이러한 경우 나는 유순히 ‘이성애자’ ‘여성’의 몸을 흉내 낸다. 헤테로 남성의 수작은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으며, 다소곳한 아가씨가 되는 것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나의 몸은 절대 노출하지 않는다. 고학번 남자선배에게는 공손히 웃어주거나 적절히 뿌리치고, 가랑이를 활짝 벌린다거나 겨드랑이 털을 훤히 드러내는 자세는 피한다. 총여실 바깥에서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나의 몸을 제대로 읽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호모포비아 진창에서도 퀴어들이 버섯처럼 번식할 수 있었던 조금 웃긴 조건이다. 나 역시 혐오나 낙인을 도마뱀처럼 피하면서 옷을 갈아입고, 안부 인사를 나누고, 밤늦게까지 애인과 신촌을 쏘다녔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총여실에 있을 때와 총여실을 나설 때, 나의 몸은 무심한 눈으로 마크되지 않을 정도의 몸으로 순식간에 변한다. 총여실에서 가시화되는 나의 몸과 비가시화되는 나의 몸과, 강의실에서 가시화되는 나의 몸과 비가시화되는 나의 몸과, 그때 노출되거나 혐오 받는 나의 소중한 부분은 무엇이며, 밀려오는 죄책감이나 무력감은 무엇이며, 저 사람의 몸이 대응하거나 무시할 가능성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순식간에 판단한다. 나의 몸은 그 복잡한 과정을 오래 전부터 체화해왔다. 마스게임을 구경하면서 저기 쳐든 빨간 깃발이 흉내인지, 진정인지, 진정인 척하면서 조롱하거나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인지 읽어낼 수 있을 리 없다. 사지를 심하게 뒤틀지 않는 이상 나의 ‘레즈비언’ 몸은 아주 쉽게 사라진다.

그러므로 커밍아웃은 나의 몸을 보존하려는 필사의 저항과도 같다. 소멸해가는 몸을 말로써 교정하거나 붙잡아보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커밍아웃은 틀렸다. 나에게도 틀렸고 상대에게도 틀렸다.

내가 실패한 증거는 잘리워진 나의 몸들에 있다. 상대방의 몸과 자아를 일렬로 정렬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공포스러워하거나 무시할 뿐이다. 이성애자라면 정상적인 몸을 내놓아라, 레즈비언이라면 모자란 몸을 내놓아라, 만약 네 몸이 비정상적이지 않다면 그건 네 말이 틀렸다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내가 발화하는 레즈비언이라는 비규범적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 목도하는 나의 몸을 비규범적인 몸으로 분류하고 싶어 할 것을 안다. 레즈비언이라고 말을 할 때 주저하거나 혼란스러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유동하는 나의 몸을 전면에 내세울 정도로 나는 용기있거나 똑똑하지 못하다.

그래서 커밍아웃은 항상 부분적이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여성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말하기엔 나는 자주 여자라고 여겨지는 몸을 부대껴한다는 것,  여성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나는 자주 강렬하게 그 사람이 표출하는 낮은 목소리나 곡선이 없는 팔과 같이 남성다운 몸에 이끌린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가끔 공격적인 소년과 같은 몸짓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고 아주 남성적인 표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것도 말하지 않는다.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은 것은 헤테로 남성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 아니다”고 말한다. 누군가 나를 욕망하길 바랄 때 팜므파탈이나 청순미인같은 이원화된 여성 몸 이미지 외의 것을 상상하거나 조형해내기 힘들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남성성으로 다른 여성의 남성성을 욕망하는 여성을 ftm 게이가 아니라 레즈비언 부치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레즈비언 여성이 가진 욕망의 형태가 헤테로 남성의 시각과 상당부분 겹쳐있을 때 그 여성의 욕망을 레즈비언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나? 이러한 질문은 커밍아웃할 때엔  숨기고 본다. 분명히 존재했던 이성연애의 경험이나 그 시절의 관계를 통해 몸에 각인된 기쁨과 습관들에 대해서는 더욱 말할 수가 없다. ‘이성애자’ ‘여성’으로 읽히는 나의 표피를 반증하기 위해 유용한 몸들 이외의 잉여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말-대화의 가능성을 위해 몸을 왜곡하거나 과장한다. 내가 왜 교정해야 하는가? 내가 왜 아무도 관심 없는 이 주장을 지켜내기 위해 발가벗고 달려들어야 하는가?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데? 내가 발가벗기 위해 뭘 더 착용하거나 벗겨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나조차도 각색 없이 나의 몸을 서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몸은 항상 나중이었고 이성애자 혹은 LGBTAIQ라는 섹슈얼리티가 먼저였다. 그러한 순차에 일치하지 않는 시절에 대해서는 커밍아웃을 할 때도, 혼잣말로라도 발설하지 않았다. 지난여름 현장 활동에 갔을 때 나는 공중목욕탕에 가지 않고 혼자 숙소에서 샤워를 했다. 단체로 여탕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고, 내 몸을 다른 여성에게 내보이기 싫었다. 지난겨울에는 친구와 목동에 있는 찜질방에 갔다. 여자와 연애하면서 느끼는 행복감에 대해 얘기하면서 부끄러움이나 초조함 없이 오래 탕에 앉아있었다. 여름에 몸이 겪었던 부대낌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들의 공간에 출입할 때 레즈비언이 느끼는 이질감이라거나 벗은 여성의 몸이 즐비한 공간에서 레즈비언이 느끼는 수치심이나 성적자극 같은 것으로? 그렇다면 겨울에 겪었던 편안함에 대해서는? 갑자기 레즈비언이 아니게 되었다거나 사실은 여름부터 레즈비언이 아니었다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건 섹슈얼리티를 먼저 고정시키고 거기에 몸을 편입시키는 설명이다. 오히려 내가 확실하게 커밍아웃한 쪽은 목동의 친구였다. 게다가 나의 몸은 두 계절을 겪었고 부대낌과 편안함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내가 레즈비언이고 상대가 여자이면 무조건 벗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와 있는가, 누구에게 어떤 몸으로 보이고 싶은가에 따라 나의 벗은 몸은 굉장히 야한 장면이 되기도 했고 나란히 앉은 친숙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이전까지 그 사람이나 그 공간과 쌓아왔던 시간들, 그를 통해 만들어왔던 자아상이나 상대에 대한 믿음 같은 것들이 내 몸에 각인되어 있었고 나는 그 몸의 감각을 따라서 옷을 벗거나 챙겨 입었다. 그러나 내가 레즈비언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채택해 왔던 것은 언제나 여름이었지 겨울은 아니었다.

총여실 안이건 밖이건 나의 다른 몸에 대해 어필할 때는 규범에 속하지 못하는 고통을 중심으로, 상대의 상상가능 영역에 편입될 수 있도록, 인지되고 신뢰감을 주고 이후 조금의 대화라도 이어갈 수 있으므로.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나조차 스스로를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지 않도록, 내가 설명할 수 있는 형태로 몸을 기억하기 위해서. 얼어붙은 항구에라도 정박하기 위해 손가락 한 두 개 쯤 떨어져나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성애가 아니다’ ‘여성이 아니다’ 늘 무엇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나는 한 발씩 번갈아 들어 올리면서 저 늪에 너무 깊게 빠져들지 않기만을 시도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 규범이 실패한 증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발화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나라고 만날천날 거짓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여성이 ‘아닌’ 이성애자가 ‘아닌’ 몸으로 읽히고 싶어 안달을 낼 때도 있다. 게다가 나는 몸을 완벽히 통제 할 만큼 철저한 사람이 아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는 몸을 줄줄 흘리고 다닌다. 소녀시대 포스터 앞에서 한껏 풀어진 표정으로 유리가 섹시하다고 말해본다. 술자리에서 애인의 얼굴이 예뻐 보이면 손을 꽉 쥐어보기도 한다. 당장 안아버리고 싶다는 제스춰같은 것은 도저히 숨길 수 없다. 그래도 모른다. 모두는 모르는 것 같다. 말하고 나면 그제야 그럴 줄 알았다고 한다.  그들이 내 몸에 차고 넘치는 레즈비언을 읽어낼 줄 모르는 것은 그들이 아는 몸이란 이성애자 여성/이성애자 남성/나머지의 세 종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길고 치마를 입은 나는 이성애자 여성으로 패싱되기 때문이다.

발화하지 않으면 몸은 마크되지 않는다니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는 무엇보다 몸적인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럴법하다. 이성애자 여성/이성애자 남성에게 부여된 현란한 몸-이미지가 있고 아직도 80년대에 사는 듯 천편일률적인 퀴어의 몸-이미지가 있다. 그 둘 사이의 간극만큼 맹점은 확장된다. 목소리가 얇은 남자에게 비규범적 남성성을 부여하고 그건 곧 게이정체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머리가 짧은 여자에게 비규범적 여성성을 부여하고 그것 역시 레즈비언정체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가시거리는 고작해야 그 정도에 불과하다. 퀴어퍼레이드만 나가도 거기에 모인 게이나 레즈비언의 목소리와 머리스타일이 수 만 가지 넘게 샘플링 될 것이다. 몸의 굴곡을 최대한 삭제할 수 있는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뿔테안경을 꼈을 때 연희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곳에선 여성으로 나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성애 규범은 자신이 보고 싶은 몸만을 분절화하여 인지하고 나머지는 알아보지도 못한다.1)

남성/여성/나머지라는 세 가지 종류의 몸을 상정하고, 그 비좁은 참조체계를 정체성의 지표로 삼을 때 발생하는 수많은 오독의 가능성만 나열해도 종이가 모자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치마를 입지 않는다거나 남자들과 어울려 축구를 한다면 그녀는 손쉽게 레즈비언 부치로 해석되기 쉽다. 그러나 이성애자 부치와 레즈비언 부치가 치마에 대해서, 축구에 대해서 의미화하는 방식은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다. 혹은 비수술 ftm과 레즈비언 부치가 남성성을 대하는 감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각각이 여성의 몸이나 남성의 몸과 연관지어지는 방식 역시 너무나 다를 것이다. 표피는 저게 치마인지 바지인지, 저 동작이 요가인지 축구인지만 겨우 구별할 줄 알지 다른 적확한 지표는 설정하지 못한다. 초라한 몇 개의 관용구만 주워들고 한 사람의 몸을 비규범적이라고 말하고 그러므로 저 사람의 정체성은 비규범적이라고 말한다. 헤테로 남성의 거들먹거리는 동작을 충실히 수행하는 마초 게이,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가면 자주 mtf로 통하는 얼굴의 ftm, 그 복잡다단한 몸과 섹슈얼리티의 사슬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만 구획하려 하는가? 수천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표피를 어떻게 수만가지로 의미화하는지, 오래되고도 내밀한 욕망들을 다시 그 표피로 어떻게 분출하고 있는지를 규범으로는 도저히 알아보지 못한다. 몸의 오독은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두 개로 분류할 수 없음에 대한 가장 확고한 증거다.

한편 나는 이러한 오독의 체계에 나의 몸을 한발씩 담궜다 뺐다 하며 놀기도 한다. 지배규범의 허술함은 상대가 나에게 어떤 섹슈얼리티를 부여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내 몸의 (표피상으로는) 동일한 포인트가 순식간에 아름다운 것이 되거나 완전히 추악한 것으로 전락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눈이 작다. 이성애 여성으로 패싱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의 작은 눈은 운 좋으면 사나워보이고 그냥 보면 못생겼다. 쌍꺼풀 수술은 안하냐는 물음도 이때 자주 듣는다. 단발머리를 하고 치마를 입은 내가 스포츠머리에 바지를 입은 애인과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가면 ‘예쁜 부치’와 어울리는 ‘단아한 펨’이 될 수도 있다. 겨울에는 목뒤가 훤하게 머리를 자르고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LGBTAIQ 모임엘 갔다.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진행된 이 모임에서 나는 ‘정일우 닮았다’ ‘잘생겼다’는 말을 2연타로 들었다. 해석의 반전, 역전의 통쾌감! 작은 눈은 나를 못생긴 (이성애) 여성, 단아한 펨, 잘생긴 부치(혹은 전천, 게이, mtf나 ftm???)으로 만들었다. 나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나의 섹슈얼리티에 따라 각자는 나의 아름다움을 다르게 발굴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해석, 목소리나 표정과 말투, 섹슈얼리티는 시각이나 청각, 촉각과 같은 감각으로 인지되는 성적인 존재에 대한 미학, 인간의 몸에 대한 미학이 아닐까? 경합한다는 정체성의 목록들은 늘 나에 대해서 일부 감추거나 과장했다. 딸/누나/여자친구/여학생/레즈비언/양성애자/낮의 언어/라는 것이 한 사람의 낯선 미모에 대해서 절실하게 감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 /구조화된 서랍/들/가운데 하나/에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재빨리 정리하려 든다는 것에 대해 항상 막연하게나마 불만이었다. 이분법에 바탕을 둔 섹스-젠더 규범은 폐기될 필요가 있다. 한계가 너무나 명확하고 전혀 아름답지 않다.

2.

다음은 한 사람과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성애 경험을 할 때와 동성애 경험을 할 때 나의 몸은 스스로에게 완전히 다른 얼굴로 변했다.2) 그것은 달의 앞면-뒷면처럼 엇비슷한 재질이나 균질한 구의 형태로 수렴될만한 다름이 아니었다. 굳이 이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어드는 까닭은 나의 몸이 변화해온 여정, 상대의 몸과 파열해온 장면에 대해 보다 세세하게 묘사해두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관계 앞에서 나는 어느 쪽으로도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보다 직접적인 탐구자가 되어야만 했다. 한 사람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해야 했고, 그것은 과연 친구의 말대로 이제까지 읽었던 어떤 소설이나 영화보다 방대한 양의 텍스트와 같았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 왜 나는 이런 치마와 샌달을 꺼내어 입었는가, 내가 왜 저 사람을 이토록 바라는가 그리고 이렇게 바라는가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납득할만한 답을 하고 싶었다. 어느 하나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고 특히나 그러한 변화가 왜 이성애 경험과 동성애 경험이라는 변화와 겹쳐서 밀려온 것인가라는 질문은 나에게 너무나 중요했다.

재미있는 풍경을 크로키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데이트할 때 예전보다 치마를 더 자주 입는다. 긴 치마는 초록색과 빨간색 꽃이 그려져 있고 짧은 치마는 발레리나같이 퍼져간다. 치마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거나 하이힐을 코디하거나 하여간 더 아가씨같이 입는다. 속옷을 레이스 버전으로 골라 보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남색이나 살색의 단색 속옷이 아니면 입지를 않았다. 여자 같은 치마나 여자 같은 속옷을 기피했던 중학교 무렵부터의 습관은 그것들이 연상시키는 여성성에 대한 기피에 가까웠다. 스포츠 브라를 입고가면 어김없이 당기고 놀리던 남자애들, 치마교복을 입고가던 하교길에서 가끔 마주치고 언제나 두려웠던 자위하는 아저씨들, 속옷입고 치마 입은 몸으로 부닥쳤던 다른 사람의 몸은 주로 남자 같았다. 너무 직접적으로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복식은 너무 직접적으로 남자애들이나 아저씨에게 노출되는 방식이라고 몸은 기억하고 있다. 성적인 느낌으로 여성의 몸을 보거나, 내가 그런 여성의 몸을 해보거나 그 양쪽 모두 부대끼긴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애인은 내가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하얀 블라우스를 입으면 참을 수 없이 예뻐진다고 말했다. 틀림없이 여성적인 면모로 해석되는 나의 몸을 애인이 다시 틀림없이 아름다운 포인트로 해석해왔을 때 나는 자주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우리의 관계는 명백한 이성연애였고 나도, 애인도 그 밖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무지했다. 관계를 정의하기 쉬울수록 상대에 대해선 궁금할 것이 없어졌다. 여성의 여성성으로 남성의 남성성에게 어필한다, 혹은 남성의 남성적 시선에 의해 여성의 여성적 몸으로 욕망되길 바란다는 이성애주의의 서사는 우리에게 예측불허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만남이 더 이상 불가사의한 사건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편입될 때, 사랑은 손쉽게 무력해진다. 그때 나는 다수에게 적중되거나 수능점수처럼 위계화될 수 있는 영역 중 한 칸에 온몸으로 소속되어진 느낌이었고, 그 중에서도 낮은 등급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못난 외모에 대한 열등감, 그럼에도 내가 여자의 몸이 되기를 자인한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다.

사실 변화한 것은 치마나 레이스 속옷의 착용 빈도가 아니라 그걸 착용하고 내가 거울 앞에 섰을 때, 애인 앞에 섰을 때, 밤이 되고 애인이 그것들을 부비고 만져줄 때의 감정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상대가 TV에 비치는 여배우의 표정이나 현대백화점 지하 화장품 광고판을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약간 질투하며 기억해둔다. 이후 어떤 날에는 그 사람이 반응을 보였던 여러 사람의 여성을 나도 흉내내어본다. 다음 날에 일부를 벗어버리고 다른 일부를 착용해보기도 한다. 이것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느낌은 둘이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것 같이 은밀하고 유쾌하고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장난을 하는 느낌이다. 다가왔다 멀어지고 이어지는 놀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붙잡았다 싶으면 곧 둘의 위치가 뒤바뀌어 버리는 느낌, 결국은 누구도 완전히 술래나 도망자 중 하나로 역할할 수 없고 누구도 완전히 상대방을 멈추거나 붙잡을 수 없고 한 문장을 말하고 뒤돌아섰을 때 내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상대의 일면일 뿐 다시 등 뒤에서 뛰고 구르고 기어오고 있으며, 다음에 고개를 돌렸을 때 상대는 틀림없이 예측할 수 없는 포즈로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같은 것들. 내가 예전보다 활발하게 여성의 몸을 재현하게 된 것은 오히려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수반해온 이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피할 수 없었던 혼돈과 변화를 애인의 해부학적 성별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성별은 언제든 유동하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이고 그 사실을 동성애 경험을 하는 와중에 알게 되었다는 변화였다. 펨로 보이는 내가 야한 속옷을 입었고, 부치로 보이는 애인이 레이스를 욕망했다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기존의 가부장적인 이성연애 모델과 같다고 쉽게 말할지도 모른다. 야한 속옷을 입는 여성의 몸은 곧 남성적 시선에 복종한 몸으로 읽힐 수 있고 그녀의 몸을 욕망하는 여성은 남성적 시선을 내면화한 몸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옷을 들추어내며 이렇게 물어본다. 여성의 속옷은 남성만이 욕망할 수 있는가? 혹은 여성의 속옷을 욕망하는 특징은 언제나 남성성에 포함되는가? 여자 애인이 아주 공격적인 몸짓이나 표정으로 나를 대할 때의 남성성과 길거리의 술 취한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다가올 때의 남성성과 귀여운 후배를 지키려는 오빠의 자세를 견지했던 반 선배의 남성성은 모두가 나의 여성성을 욕망했지만 모두는 나의 몸에 다른 반응을 야기했다. 어떤 남성성은 믿을 수 없는 환희였고, 어떤 남성성은 성폭력의 위협이었고, 어떤 남성성은 식상한 대상화의 반복이었다. 남성성이란 언제나 남성의 몸에서만 표출되는가? 혹은 남성성에 의해 욕망되면서도 여성의 몸이 위축되거나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몸의 표피나 일회적인 행동만으로는 몸과 몸의 충돌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몸의 움직임을 규범적인 몸/비규범적인 몸 중에 하나로 딱 떨어지게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은 오로지 그러한 몸을 정상적인 몸/비정상적인 몸, 혹은 흥분되는 몸/무성적인 몸으로 명명하고 이를 반복적으로 호명해온 근거 없는 참조체계에서 기인한 것일 뿐, 몸 자체의 어떤 속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니다. 몸은 충분히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고, 우리는 몸을 규범과 참조체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유토피아에 위치시키지 않고도 충분히 몸에 전복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몸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성애자×비이성애자]*[남성×여성]이라는 매트릭스로부터 초월한 정체성을 가졌거나 가지길 원하지 않는다. 이곳의 상징체계나 인지체계를 갑자기 소거할 수도 없고 그 사이에서 형성되어온 나의 몸-역사는 분명히 존재한다. 오히려 나는 누구보다 예의를 갖추어 그러한 매트릭스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 생각이다. 몸에 대한 여러 가지 상징체계를 소환해서 착용하고 이리 저리 늘어뜨리고 가장자리를 짓무르게 만들어 본다. 조금씩 인지되지 않았거나 상상되지 않았던 조합을 만들어보고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가를 유심히 지켜본다.

[여성으로/펨으로/전천으로] × [키스를 한다/끌어 안는다/삽입 한다/받는다/옷을 입는다/달려 간다/운다/웃는다] …… 앞과 뒤의 항목을 정확히 열거할 수는 없다. 한 사람과 만날 때에도, 단 하루에도 괄호 안의 내용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질 않는다. [나의 정체]×[나의 행위] * [상대의 정체]×[상대의 행위]라는 매트릭스는 나를 죽은 듯이 누워있는 몸으로도 만들었고 뱀같이 요망스럽거나 으르렁대는 몸으로도 만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이쁜 가슴도 만들었고 도려내고 싶은 유방을 만들었다. 몸은 탄탄해졌고 필요 이상으로 추악하거나 유약해졌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나의 몸은 우연과 위험에 완벽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 몸들은 모두 나였고, 나는 그 때의 느낌에 관해서라면 한 치도 까먹지 않았다.

양극화된 봄-보여짐의 지점에 서서 서로 외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봄-보여짐보다 한 차원 높거나 낮은 뒤섞임의 상태, 여러 개의 눈과 여러 개의 귀와 극도로 예민한 십 수 개의 손가락이 덜덜 떨면서 서로의 몸을 탐구하고 침범하고 조형하는 상태…… 욕망의 위계화 없이, 표피에 식상한 섹슈얼리티를 덧바르는 구도가 없이 몸과 몸이 뒤섞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떠한 몸의 경험과 느낌도 잦아들지 않고 외려 왕왕대며 진폭을 넓혀나가는 만남은 어떤 것일까?

나의 몸이 표피상으로는 완벽하게 동일한 체위나 작년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하더라도 나와 상대의 유동하는 섹슈얼리티는 그것을 동일한 몸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 한 사람과 똑같은 비좁은 방에 누워서 천 번의 밤을 보낸다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주는 잊을 수 없는 감정이나 강렬한 사랑함-사랑받음의 기억들에 대해서는 몸이 매번 완전히 낯설은 형태로 기억하고 반응한다는 것. 나와 너의 섹슈얼리티가 유동하는 장소, 두 개의 몸이 그 장소에서 잘 때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예측불가의 영역임을 자인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해명의 최전선이다.

이제 나는 섹슈얼리티, 성별정체성, 몸을 입고 태어나 살아가는 나날들에 두려움없이 직면하기 위해 나의 가장 사소하고 귀중한 부분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을 때 한 명의 구체적이고 예외적인 개인과 무관하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졌다. 남자, 여자, 레즈비언, 그동안 정답처럼 제출해왔던 문항들로는 그 사람을 알아볼 수가 없다. 나는 그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을 사무치게 안다. 곱아지던 등, 고여 베어 나온 물, 그림자가 번지고 줄줄 흐르는 먼지, 머리카락 같은 것들. 어두움에 익숙해지자 눈이 발견해낸 하얗던 이와 그때 넘치도록 기뻤던 것을 기억한다. 오래도록 경이로운 눈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고 미끈덩거리는 손목을 번번이 놓쳐보고 그래서……            나조차 못 알아볼 정도로 완전히 낯선 몸이 될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단 한 사람에게 익숙해지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명을 지르고 목이 쉴 때까지 울 것이다.

– 위치는 밝은 미래, 기러기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몸은 괜찮지가 않았다.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얼마전 나는 병무청에 다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폐결핵을 앓는 바람에 기도가 좁아졌고 그래서 병원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의사는 나에게 병사용 진단서를 써줬고, “당신의 기관지에 있는 병은 일종의 장애이기 때문에 군면제 혹은 공익근무 판정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살을 뺀다면 훨씬 편하게 ‘정상’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진단서 하나를 들고 컨테이너 벨트에 오른 나사가 채 조여지지 않은 공산품 마냥 나는 오전 내내 여기저기로 끌려가 내 몸에 대한 판정을 들어야 했다.

  모든 것이 너무 명확해지던 순간이었다. 병원과 병무청, 그리고 그곳의 의사들은 내 몸을 헤집어 정상인 이유와 비정상인 이유를 하나씩 댔다. 그러는 동안 단 한순간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설명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의사는 내 몸의 질병을 판단했고, 군대는 그것을 확인하고 판정 내렸다. ‘그들은 나를 억압했다.’는 사실은 너무 명확했다. 너무 명확해서 오히려 나는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도 했다.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나에 대한 규범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나는 그 규범들에 대해 더 많이 설명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원과 병무청을 오가며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규범들이 나를 어떻게 ‘배제’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백한 현장 증거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억압받았다는 사실을 내 언어로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치유하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내 뱃살을 칼로 도려내는 망상에 사로잡혀야만 했다. 뭔가 불안했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친구에게 내가 병원과 병무청에 경험한 것들이 얼마나 나에게 ‘폭력적’이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그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와 ‘피해’들을 이야기했다. 내 뱃살을 칼로 도려내는 망상은 설명할 수 없었기에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충분히 지금의 나를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아직 설명되지 못한 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 명확한 언어로 설명하려고 노력할수록 어쩐지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결국 내 목젖을 짓눌러 억지로 토를 하고 체중계에 올라 몸무게를 체크하는 순간 내 몸이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설명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몸이 다시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시작은 의사의 말이었다. 내 몸이 여느 ‘정상’인의 몸과는 다르다는 말은 내 몸에 엄청난 불일치를 야기했다. 장애에 대한 두려움과 내 몸을 판정하는 의사에 대한 저항과 군대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안도,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몸에 일어났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내가 폭력적인 상황에 처했고, 그래서 내가 상처받았다는 단순한 인과관계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공간이 ‘장애’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으며, ‘정상적’으로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이 어떻게 나를 ‘비정상’의 범주로 밀어 넣을 것인지에 대한 공포였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상상했던 것처럼 명확하게 가해와 피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내 몸에서 겹쳐지고 있는 복잡한 관계들과 상황들, 기억들이 치열하게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나는 내 몸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언제나 당연히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 몸과 함께 살기는커녕, 내가 정의한 피해를 입증하는데 몸을 동원했다. 몸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다 중요했던 것은 몸의 반응이 내가 정의한 지금의 나와 얼마나 부합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몸이 구토하는 순간에도 이것이 피해의 흔적임을 주장하려 했다.

   나는 몸이 타자로써 살아온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내 몸과 함께 살 고민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고매한’ 주체정신을 지키기 위해 의사의 말과, 병무청의 컨베이어벨트를 ‘피해’로 치환하여 몸에 전가 시켰다. 정신은 언제나 나의 판단을 하지만, 몸은 언제나 상처가 생기고, 흔적이 묻기 때문에 혐오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했다. 모든 것이 ‘내 뜻과 같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순간들 마다 내 몸을 부정하고, 내몰았다. 그렇게 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몸의 언어들을 동원했다. 의사의 말을 폭력적인 말로 설명하기 위해 내 몸의 구토를 동원했고, 병무청의 무자비한 신체검열을 설명하기 위해 내 몸에 찾아온 불면증을 동원했다. 그래서 내 몸의 언어와 기억들은 언제나 설명되지 않는 잉여로만 남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과 함께 살 고민을 하기 위해서는 몸에게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쉽게 내 몸을 긍정한답시고, 의사가 뭐라고 말했어도, 병무청에서 온갖 기계들이 나의 신체등급을 매기기 위해 어떻게 달려들었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몸은 ‘괜찮지가’ 않았다. 몸은 더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내가 내 몸을 좀 더 긍정해야 한다는 맥락과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나는 몸의 이야기를 좀 더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이제껏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과 다시 마주했다. 장애에 대한 차별이, 군대의 가부장적 언어가 단지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 몸에 간섭되고 경계지워지는 구체적인 삶의 공간이라는 것과 다시 마주했다. 나는 몸이 괜찮지 않을뿐더러, 몸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몸을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몸과 함께 살기 위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은 내가 살아온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군대가 얼마나 폭력적인 공간인지에 대해서만 설명하던 순간들에도 몸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무수한 경계들이 다시 얽혀드는 그 모든 불일치와 비틀림들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었다. 몸은 단지 피해의 흔적을 기록한 일기장이 아니라, 그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나의 ‘관계’들이었다.

  때문에 일상의 공간에서 매순간 타자화되고 있는 몸의 역겨움과 애매모호함, 혼란스러움, 정의되지 않음 같은 것들에도 불구하고 왜 몸의 이야기를 다시 드러내어 이야기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상적으로 타자화 했던 몸, 그래서 역겹기도, 혐오스럽기도, 괴물같기도 했던 몸에게 괜찮다며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끊임없이 타자화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왜 몸의 이야기들을 드러내는 것이 내 삶에서 의미있는 일이며, 또 몸의 이야기들이 어떤 다른 방식의 이야기들을 가능하게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몸과 함께 산다는 것은 몸이 드러내는 이야기들을 포착하고 마주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몸의 경험을 설명되지 않는 비이성적이고 병리적인 것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또 그것을 ‘나’라는 주체의 언어와 일치시키기 위해 규제하고 조절하지 않아야 한다. 몸의 이야기를 그대로 드러내어 몸의 삶과 일상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역사가 존중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몸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몸과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by 몸 말하는, 나누기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외모지상주의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외모지상주의의 경계와 잉여에 대해서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Intro

 우리 집 뒤 쪽에는 상가가 하나있다. 아파트 단지에 딸린 6층짜리 상가인데, 인접한 주택가와 소규모 아파트들과의 접근성이 좋아서, 꽤나 많은 점포들이 입주해있다. 그리고 그 상가의 5층에는 헬스장이 하나있다. 24시간 헬스장이. 그 헬스장은 정말 24시간 열려있다. 이른 아침 1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서 등교할 때도, 친구들과 밤늦게 놀고 난 후 새벽에 집으로 오는 길에도 그 헬스장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내가 헬스장을 볼 때마다 창가에 늘어선 러닝머신 위에는 그림자가 아른 거린다. 문득 욕실에 거울에 비친 내 뱃살이, 지하철에 붙어있는 성형외과 광고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방학동안 살을 빼기 위해 닭 가슴살과 고구마만을 먹겠다던 친구의 모습과 함께. 나는 이런 것들을 지칭할 수 있는 말을 하나 알고 있었다. ‘외모지상주의’ 라는 말을.

#1 외모지상주의의 경계

 루키즘 [lookism] (외모지상주의):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외모지상주의를 일컫는 용어.

 ‘외모지상주의’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담론이다. 한 밤 중에 헬스클럽이 열려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고, 누군가가 특정한 음식을 먹는 이유이기도 하고 지하철 벽에 왜 그리 많은 성형외과들이 등장하는지를 알 수도 있고 사람들의 대화와 태도에 대해서도, 누군가의 취업실패도 설명할 수 있다. 심지어는 누군가의 자살을 설명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현상들에 사람들은 ‘외모지상주의’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게다 사람들의 외모지상주의 때문이다. 사람들이 얼굴로 몸매로 사람들을,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들은 사람들 볼 때 겉모습, 몸 밖에 볼 줄 모른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이다. 그러니까 외모지상주의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타파해 나가야 할 속물근성이다.’ 여기서 외모지상주의는 물질적인 것 – 육체 – 외면 – (속물적인) 욕망 – 부정적인 것과 연계되는 의미망을 만들어내고, 정신적인 것 – 정신 – 내면 – 고귀한 기준 – 긍정적인 것이라는 의미망에 대립한다.

 이 두 가지 의미망을 대립하는 설명은 사람들의 공감을 쉽게 얻는다. ‘예쁜 사람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외모지상주의라는 딱지가 붙자마자, 그것은 쉽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 비판은 정당성을 얻는다. 모두가 외모지상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습득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공개적으로 자신을 외모지상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전자의 의미망 대신에 후자의 의미망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살펴야한다. 아니, 살피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외모지상주의자’라는 딱지가 싫다면 말이다. 그러니 외모지상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편리한 담론이다. 그 말은 많은 것들을 쉽게 설명할 수 있고, 모두에게 쉽게 동의를 구할 수 있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도 불편함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미처 보여주지 못하는 것들도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보다는 적극적으로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이 ‘은폐’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외모지상주의의 두 가지의 의미망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기에 그것을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으로 덮어야하는 그런 잉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이 자신의 아래로 포획하려하지만 그것의 틀 안으로 구겨 넣을 수 없는 잉여들과 마주칠 때,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은 자신의 경계선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이 잉여들과 부딪쳐 무너져가는 지점이다.

#2 외모지상주의 담론, 그 이분법의 역설 – 여성과 다이어트

 이제 다이어트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다이어트는 주로 ‘하다’라는 동사와 결합해서, 다이어트를 한 만한 이유와 여유를 가지고 있는 일부가 하는 살을 빼는 행위를 칭하는 용어였다. 반면 현재의 다이어트는 주로 ‘해라’와 함께 등장하며 우리에게 체중감량을 강권한다. 사회적 인식이, 생산되는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건강한(=섹시한=젊은) 몸’을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지표로, 그와 동시에 사회적 인정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가는 상황에서 개인은 다이어트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개인이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도덕적 비판까지도 가해진다.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다이어트는,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관리하지 못하는 게으른 사람’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건강한(=섹시한=젊은) 육체를 가지지 못한 개인1)에게는 다이어트라는 의무가 일상적으로 지워진다. 다이어트가 일상적인 의무가 되면서 사회적 지위의 문제를 넘어서서 만인에게 부과되는 도덕적인 당위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이어트의 일상화는 외모로 개인을 평가하는 외모지상주의가 사회에 만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그와 동시에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이 붕괴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외모지상주의 담론은 개인이 외면에 연계되는 의미망보다 내면에 연계되는 의미망을 통해서 타인을 판단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다이어트가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이런 외면/내면의 이분법적 잣대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다. 다이어트가 일상화되며 도덕적 의무로까지 발전한 사회에서는 이미 외면과 내면의 평가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도덕성이라는 내면은 몸무게라는 외면에 의해서 재단되고, 그에 의해서 부지런함/게으름, 탐욕스러움/탐욕스럽지 않음의 구분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구분에 기초해서 개인들의행동과 그의 동기(도덕성)가 구분된다. 예를 들어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여성의 소식은 남의 눈치를 봐서 그러는 것처럼 비춰지고, 많이 먹는다면 탐욕스러운 본색을 드러냈다는 것처럼 비춰진다. 그 사람의 상황,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이 지점에서 외모지상주의 담론은 더 이상 다이어트를 자신의 이분법적 구도 아래로 포섭하지 못한 채 무너진다. 

 외모지상주의가 무너지는 지점은 여성의 경우 더욱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모두에게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다이어트가 강요되는 상황이지만, 그 다이어트의 의미는 남성과 여성에게 각기 다르다. 우선 여성에게 있어서 외모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사회적 지위, 성격, 학력, 전문화된 능력 등의 사회적 자원을 활용하여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한다. 지금과 같이 우리의 몸이 ‘보임을 당하는’ 것으로서, 외모가 하나의 경쟁력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외모도 그러한 사회적 자원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 외모가 갖는 중요성과 의미가 여성과 남성에게 확연히 다르다. 남성에게 외모는 대체가능한 사회적 자원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반면 여성에게 외모란 다른 사회적 자본을 모두 압도할 만큼 중요한 사회적 자원으로 여겨진다.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지만 이상적인 외모와 거리가 먼 여성은 ‘독한 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뿐이며, 누군가가 알지 못하는 어떤 여성에 대한 정보를 물을 때면, 항상 ‘예뻐?’라는 소리가 가장 먼저 나온다. 즉, 이 사회에서 여성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바로 외모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에게 외모는 여성의 사회적 자아실현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강요된다.

 또한 여성에게 있어서 외모는 개인의 자존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자존감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개인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가 어렵다. 개인의 자존감은 곧 타인이 인정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기준은 바로 외모에 있다. 따라서 여성의 외모가 사회적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여부는 여성의 자존감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다이어트를 성공한 여성들이 그들의 다이어트를 통해서 자신감을 얻었다는 하는 것은 이를 입증해준다.  따라서 이상적인 몸을 만들기 위한 다이어트는 여성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의 실현이 걸린 문제이자, 자신이 자존감과 관련된 문제이다.

 외모지상주의 담론은 이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다. ‘외모를 갈고 닦는 일은 무의미한 노력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랍니다. 다이어트와 같은 일은 자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한 무지한 일이예요. 그러니 우리 모두 내면을 갈고 닦읍시다.’ 하지만 여성 앞에서 이런 외모지상주의의 미소는 가식적이다. 그것의 충고가 공허하기 때문이다.2) 여성은 내면을 갈고 닦는 일, 즉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외면을 갈고 닦는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역설을 마주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 담론으로는 결코 포획할 수 없는 그 역설을 말이다.

Outro

 여성제 회의를 마치고 온 오늘도 그 헬스클럽에서는 형광등의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가를 따라서 가지런히 놓인 러닝머신은 마치 몸을 찍어내는 컨베이어벨트처럼 보였고, 그 위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러닝머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사실 그 헬스클럽은 내가 올해 초에 살도 빼고 식스펙을 만들기 위해 다니다가 몇 번 가지 않고 포기한 곳이었다. 다이어트를 하겠다던 내 친구는 방학동안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오늘도 성형외과 광고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찾아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나에게 이것들은 외모지상주의로 설명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외모지상주의 경계를 감지한 나는,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이상적인 형태의 외모로 몸을 찍어내라고 강요하는 목소리가 있음을 감지한 나는, 여성 앞에 놓인 다이어트의 역설을 느낀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인가 단박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일이라도 벌여야만 하는 걸까? 나의 삶은 어떻게 변해야하는 것일까?

 단지, 난 헬스클럽을 다니지 않고 그냥 운동이나 하나 배우기로 했다. 난 친구의 다이어트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난 성형외과 광고를 보고 사고(思考)를 하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내 뱃살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줬다. 몸을 조금 더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 보기로 했다. 어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조금씩 바꿔나가기로 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

by ‘행복한’ 삶을 꿈꾸는 스츠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뭉툭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어느 시골 마을에서였다. 마을에 사는 친한 선배언니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지나가던 마을 할머니가 선배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나를 보고 뭔가 칭찬의 말을 했다. 나는 그때 짧은 커트 머리에, 헐렁한 바지에 박스티를 입고 보정기능이 전혀 없는 속옷을 입고 피부는 까맣게 타 있었다. 누구라도 여자로는 쉽게 보지 않을만한 차림새였다. 그래서 할머니도 나를 남자아이로 보고, 듬직하다고 했던가 하여튼 뭐라고 칭찬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선배는 “할머니, 얘 여자에요.” 하고 정정을 해 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조금 놀라면서 “여자라?” 하더니 확인하듯 내 가슴을 쓸어만져 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웃는 낯으로 “허허, 뭉툭하니 좋으네” 하시고는, 선배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걸어가셨다.

 이 짧은 에피소드는 나에게는 굉장히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가슴을 만져보는 것까지는 별로 놀라울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뭉툭하니 좋으네’라는 할머니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순간 벙 찌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때 내가 예상했던 할머니의 반응은 ‘여자 맞네’라든가, ‘가슴이 작으니 몰랐지’라든가, 뭔가 내 가슴크기와 거기에서 확인한 여성성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 가슴크기와 성별을 연결짓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슴이 ‘뭉툭하고’ 그래서 ‘좋다’는 그 한 문장에 나는 무척 위안을 받았다. 내 가슴은 여성스러운 가슴이거나 여성스럽지 않은 가슴이 아니라, 그냥 ‘뭉툭한’ 가슴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로 동성애자 커뮤니티에서 가끔 ‘뭉툭’이라는 단어를 이름으로 쓴다. 그 단어가 나를 ‘여성’에서 분리시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으로 불리기보다는 남녀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퀴어한 성별로 불리기를 원하고, 내가 가진 몸의 성질들이 하나하나 여성의 것이 맞는지를 확인받기보다는 그 자체로 인정되기를 원한다. 세상은 경계의 몸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 우리의 몸은 세상이 정해 놓은 경계를 지키지 않는다. 나는 저절로 난 손발과 코밑, 배와 겨드랑이의 털들을 없애고 싶지 않고, 눈이 거북해하는 렌즈를 억지로 끼고 싶지 않고, 와이어가 들어간 브래지어를 입고 싶지 않다. 여성의 몸이 아니라 나의 몸을 갖고 싶다.

 가끔 내 몸이 남성으로 변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남성으로 변한다는 건 가슴이 보다 납작해지고 페니스와 고환이 생기고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늘어난다는 것 정도로 상상한다. 그러면 과연 뭐가 달라질까. 성별이 달라짐으로써 나는 일부분에서는 규범에 맞게 될 것이고, 일부분에서는 규범에서 벗어날 것이다. 우선 아마도 동성애자에서 이성애자가 될 테니 지금까지 숨기고 감추어야 했던 나의 성애적인 욕망들은 갑자기 정상으로 평가될 거고, 그걸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삶은 참 편할 것 같다. 하지만 주변에 온통 여자친구들뿐인 나의 인간관계나 나의 성격들 중 일부는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분류되고 이상하게 취급되겠지. 규범 때문에 입지 못하게 될 짧은 반바지나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도 가끔 다시 입어보고 싶어질 것 같은데. 그런 상상 속에서 성별에 대한 규범들은 부자연스럽고 허구적이 된다. 여성으로서 비규범적인 내 몸이 남성으로 변화한다고 해서 규범적이 되지는 않는다. 몸이 규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이 몸을 맞고 틀림으로 분절시키고 억압한다. 나는 그렇게밖에 상상할 수가 없다. 이미 세상의 규범에 맞지 않는 몸들은 너무나 많이 있고, 현재의 내 몸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성별이 바뀌는 것을 모든 ‘여성적’인 것들을 버리고 ‘남성적’인 것들을 갖게 되는 것으로 상상할 수가 없다.

 성별에 대한 규범들은 20대가 되면서 나를 갑작스레 덮쳐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성별이 된다는 것도 포함하는 것 같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 금지되었던 짧은 치마나 긴 머리, 화장은 이제 은연중에 권장되었다. 그러한 여성성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선배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더 쉽게 집단에 동화된다는 걸 느꼈고, 나도 그런 여성스러운 차림을 했을 때 더 많은 칭찬과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건 처음에는 신선한 즐거움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대한 억압이 되었다. 바싹 마른 몸이 아니면 타이트하거나 노출이 있는 여성스러운 옷은 입을 수가 없었고, 치마를 입었을 때는 발이 아프더라도 힐을 신지 않으면 모양이 예쁘지 않았다. 겨드랑이 털은 매일 면도해야 했고 팔다리의 털들도 신경이 쓰였다. 나는 늘 다이어트를 했고 발바닥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구두를 신었으며, 어느새 그날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업이 남아 있어도 집에 오게 되었고, 엠티에 가서도 새벽에 일어나 화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내가 원하는 것만큼 여성스럽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그래서 환대받지 못하는 내 몸에 대한 혐오감은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져 갔다.

 어느 날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된 나는 그 모든 걸 버리기로 했다. 가부장적인 학교 속에서 환대받지 못하더라도 나 스스로는 나 자신을 당당하게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머리를 자르고 중학교 때나 입던 굴곡 없는 옷을 다시 꺼내 입고 화장을 하지 않고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누군가의 눈에 내 모습이 담기는 것을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나와는 다른 것 같고,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 속에서도 버티는 힘이 생기자 곧 사람들은 내 생각만큼 나에게 관심 갖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꾸준한 노력과 탐색을 통해 다행히도 이제 그 규범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길을 찾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 성별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공간과 친구들을 만났으며, 최대한 사회의 요구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고 있다. 끊임없고 끝없는 사회의 요구 속에서 나는 틈새의 삶을 산다. 그리고 내 삶에 만족한다. 이런 틈새가 좀 더 넓어지고 아늑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몸에 대한 온갖 규범들을 억압으로 느끼는 나 같은 사람들이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뭉툭하니 좋으네’ 하시던 할머니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규범에 오염되지 않은 눈을 갖고 그런 눈들 속에서 살고 싶다.

-by 따뜻하게 안아줘요, 뭉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