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너에게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처음에 내 몸에 관한 경험을 쓰고 나서 달았던 제목이 “좌절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내 몸에 관한 그 동안의 느낌을 “좌절”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도 들었고, 내 몸에게 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에겐 아픔과 슬픔의 이미지로만 기억되던 몸. 하지만 그것은 내 몸이 진정 무엇이고, 뭘 원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한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내 몸은 나와 점점 어색해지고, 내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내 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진실하게 내 몸을 불러보고 싶은 마음에 “너에게”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어렸을 때 나는 친구들과 다양한 놀이를 하는 걸 좋아했었다. 친구들과 자주 축구를 했었고, 쉬는 시간에는 오목이나 장기를 두는 걸 좋아했었다. 또한, 여자애들과 공기놀이를 하거나 아이앰그라운드 하면서 노는 것도 빠지지 않고 했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을 끄는 놀이는 바로 고무줄 놀이였다. 여자애들이 폴짝 폴짝 뛰면서 즐겁게 웃는 모습에 끌렸던 것 같다. 나도 고무줄 놀이하고 뛰어 다니면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낄 것만 같았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엔 주로 점심시간에 학교 건물 옆에서 여자애들 여러 명이서 고무줄놀이를 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여자와 남자를 구분해서 하는 놀이는 별로 없었지만, 고무줄놀이만큼은 예외였다. 여자애들이 즐겁게 놀 때 항상 고무줄을 가위로 끊는 남자애들이 있었고, 그 애들은 어떻게 하면 잽싸게 고무줄 끊고 잡히지 않을지를 고민했었다. 나는 당시 너무나 소심하고 평소엔 말도 잘 안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고, 여자애들한테도 같이 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었다.

중학교 올라가서는 내 몸을 더 마르고 호리호리하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강했었다. 당시 중2때까지만 해도 키는 170 조금 넘는데 몸무게는 40 밖에 나가지 않았었다. 거식증이나 폭식증의 증세는 없었다. 단지 난 같은 학원에 다니는 여자애들 보면서 저 애들보다도 더 말라보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딱히 이유도 없이 먹고 싶은 것도 참아가면서 내 몸을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었다. 결국 한창 클 나이에 뭐하는 짓이냐며 엄마한테 심하게 혼나고 집에서 식사를 할 때엔 반강제로 밥을 먹기에 이르렀다. 그럴 때 내 몸은 포만감을 느끼고 편해지지만 내 머리만은 불편함에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차츰 차츰 생기는 여드름에 나도 모르는 거부감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내 얼굴에 나는 이 빨간 건 무엇인가? 만지면 아픈 게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여드름이 생기면 미친 듯이 짜고, 세수할 때에도 일반 비누로 미친 듯이 닦았다. 결국엔 여드름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고, 병원에 가서 심각하다는 판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나는 이렇게 여드름을 만들고 싶지 않은데 내 몸은 자꾸 왜 이러는 건가 하는 좌절감에 빠졌고, 내 몸에 대한 미움이 커져갔다. 그 후 수시로 여드름을 짜는 건 내 머릿속에서 생각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이러한 피부에 대한 집착은 내 피부를 심하게 망가뜨렸고, 그 후로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볼 때 피부만 볼 것 같다는 심한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중학교 다닐 때엔 키도 부쩍 커지고 축구, 농구 같은 운동도 친구들과 잘 어울려서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친구들 사귀는 데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을 풀지 않으면 몸이 불편했을 정도로 끈기가 있는 성격 덕분에 공부도 잘해서 반장도 해보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었다. 하지만 이런 내 몸의 고마움의 크기보다는 피부로부터 느끼는 내 몸에 대한 미움과 혐오감이 더 커서 이런 몸을 주신 부모님을 미워하기 일쑤였다.

 결국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내 몸에 대한 혐오감이 더 커졌다. 친구나 선생님과 대화할 때도 나는 마치 죄인처럼 얼굴을 푹 숙이면서 눈도 안 마주치고 얘기를 하게 되었고, 사진을 찍는 기피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직도 내 고등학교 시절의 사진은 나름 깔끔하게 나온 졸업사진을 제외하고는 2,3장 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 후 대학교 들어오면서 피부 관리에 대해 차츰 알아가게 되었고, 돈이 많지 않았던 나는 저렴한 가격 선에서 피부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내 얼굴, 내 피부를 질책하지 말고,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달래주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6년 피부에 학대를 해왔기 때문에 피부 개선은 매우 천천히 이루어졌다. 다행이도 요샌 친구들도 많이 좋아졌다고 칭찬하지만, 과제 때문에 며칠 밤을 새면서 내 몸을 혹사시키는 내 피부는 화가 난 듯 심하게 빨개지고 벗겨진 상태로 나한테 항의를 한다.

 고등학교 시절엔 두발 제한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머리를 길게 기르는 학생의 경우 밤에 학교에 나와 운동장 수십 바퀴를 오리걸음으로 걷게 하던지, 체육관 모든 지역을 청소시키는 등의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다. 그래도 깡이 있던 학생들은 선생님이 교실을 돌 때 화장실에 숨어있는 등의 전술로 아슬아슬하게 피해갔다. 당시 소심했던 나는 그 친구들이 머리를 길게 기르고 젤과 왁스를 바르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래서 대학교 들어간 후에 몇 개월씩 머리를 다듬으면서 머리를 굉장히 길게 길렀다. 그 때는 머리카락이 금방 자라는 여자애들이 부러운 적도 있었다. 몇 개월씩 신경을 쓰자 내 머리카락은 내 몸에서 가장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그 후 난 과감하게 전부 노란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머릿결이 나빠진다, 양아치로 보인다는 등의 이유로. 고등학교 다닐 때 “대학교에 입학만 하면하고 싶은 거 뭐든지 하게 해줄게”라고 약속을 했던 엄마였다. 엄마의 거짓말에 실망했지만 난 그래도 꿋꿋이 엄마한테 염색을 하겠다고 얘기를 하고 미용실에 갔다. 하지만 당시 미용실의 직원의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엄마가 전략적으로 미용실 직원에게 “이 애 노란색으로 염색하면 이상하죠? 그냥 브리지나 넣는 게 어떨까요?”라고 하자 직원은 “네 브리지가 더 어울릴 거 같아요. 그래도 결정은 본인이 하셔야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엄마는 아군을 만난 듯이 나한테 계속해서 브리지만 해라, 염색할 돈은 없다는 식으로 협박을 했고, 결국 브리지만  넣는 것에 만족해야 했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외국인 같다, 너무 안 어울린다, 네가 무슨 개그맨인 줄 아냐는 등의 혹평만 오고 갔다. 그 중에 가장 황당했던 말은 “너 혹시 게이냐?”라는 말이었다. 그 말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알려달라고 하자 “변태 같자나. 그게 뭐야?”였다. 난 너무나 화가 나서 “내 머리가 어째서 변태 같다는 거야? 게이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하는거냐?” 라고 따지자 그 친구도 나한테 질 수 없다며 화를 냈었다. 결국 주변의 여자애들도 이상하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등 좋은 얘기가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된 후 난 내가 젤 아끼던 머리를 검은색으로 바꾸고 짧게 잘랐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께서 반가워하시며 “얼마나 깔끔하고 보기 좋냐?”라고 말했을 때의 불편함. 내가 보기엔 그 전의 헤어스타일이 더 좋은데. 그렇다면 누가 보기 좋게 잘라야 하는 건가하며 느끼던 어색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변성기가 금방 지나가버렸다. 그래서 목소리가 약간 높고, 노래 부르면서도 내가 목소리가 약간 모기 목소리 같다는 느낌을 갖는다. 또한,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대화의 주도를 내가 잡으면 말을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이다. 한 번은 집에서 엄마와 대화를 열심히 하는 중이었다. 엄마께서 나한테 친구 만날 때도 그렇게 말 많이 하고, 빨리하고, 경박한 톤으로 말하느냐고 물어봤었다. 그래서 나는 친한 친구 만날 때에도 이렇게 말하는데 그게 경박한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께서는 덩치도 있는 애가 그래야겠냐면서 친구 만날 땐 말 많이 하는 건 좋지만, 친구 말할 기회도 주고 말 좀 줄이고, 목소리도 좀 굵게 하라고 말하셨다. 그러면서 여자는 네가 남자답게 의젓하고 말도 신중하게 하는 모습을 보여야 좋아한다면서 목소리를 좀 더 신경 쓰라고 말하셨다. 난 약간 하이톤 같은 목소리가 좋은데, 왠지 반가운 친구 볼 때엔 말 더 많이 하고 싶고, 더 많이 말하려면 빨리 말해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남자답게, 멋있게 보이려면 내가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고 내 목소리도 약간 거짓되게 숨겨야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의 가벼운 충고라 생각하면서 넘어갔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친구를 만날 때 아무리 편하게 느껴지고, 기분이 좋아도 어느 정도 내 목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말하고 싶은 방식대로 말하지 못하면서 내 몸에 대해 또 한 번 좌절감을 맞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몸에 관련된 기억들을 풀어보니, 몸에 대한 고마움과 뿌듯함 보다는 내 몸에 대한 혐오감, 내 몸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좌절감이 더 컸던 것 같다. 이렇게 내 몸을 싫어했었나 하는 생각에 괜히 미안한 감정마저 든다. 이러한 감정은 과연 나만 갖고 있는 특별한 감정일까? 소위 말하는 인기 많고 멋있는 친구들은 과연 자기 몸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들도 주변에서의 인정을 얻기 위해 몸을 꾸미고 가끔은 혹사시킬 때엔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그저 남들이 바라고 내가 꿈꾸던 형태를 쫓다 고꾸라진 하나의 덩어리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몸이 없어졌다는 걸 이제야 실감하게 되었는데, 과연 몸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지금 나를 감싸고 있는 것들이 언제부터 타인들의 시선과 나의 강박관념의 덩어리로 바뀐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휩쓸자 이제는 좌절감이 아닌 “나를 떠난” 내 몸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답답함만이 나를 감싼다. 그냥 남들의 시선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꾸미고, 내 마음대로 관리하면 네가 다시 돌아와 줄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표피들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인정하고 감싸주면 너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내 몸을 찾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지만 사라진 내 몸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여성됨의 서사: 나의 스토리텔링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 Scene #0: intro.

고등학교 시절에는 2층에 교실이 있는 학생이 꽃 배달을 받았다는 소식이 꼭대기 층인 4층에 있던 내 귀에까지 들려온다거나 하는 일이 가끔 있곤 했다. 나는 학년도 다르고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친구의 소곤소곤한 투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통해 듣고는 했다. 우리가 소곤소곤 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드러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왜냐면 미성년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성적 욕망이 없는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학생이면 연애를 하면 안 되고 학생이면 단정해야 하고 학생은 세수만 해도 예쁠 나이이고 학생이면 굽이 높은 구두를 신으면 안 되고 ‘학생이면, 학생이면, 학생이면…’으로 시작되는 규율들. 때문에 우리는 ‘성적인 욕망’의 단서를 드러낼 수 있는 행동들을 숨겨야 했고 그것들은 언제나 은밀하게, 선생님들이 포착할 수 없는 범위망 내에서 이루어지곤 했다. 하지만 ‘학생이면 단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무리 집요하게 주입되더라도 학생들은 ‘단정하지 못한’ 이야기들에 손쉽게 들썩이곤 했다.

대학교에 오고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대생’인 나의 성적 욕망은 여전히 꾸준히 삭제당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단지 다른 이들이 갖고 있는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는 역할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이상했다. ‘성인 여성’이 되었다기보다는 여성으로 ‘다루어진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나는 갈등했고 고민했고 나는 우울했다. ]

여성에 대한 성애화는 생각보다 이른 시기부터 시작하여 지속적이고 꾸준하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성애화는 대개 ‘2차 성징’의 특징을 보여줄 때부터 시작되는데, 이 시기의 성애화는 주로 ‘수치심’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드로 읽어낼 수 있다. 여성은 대개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부터 자신이 성애화 된다고 느낄 때에 수치심을 느끼도록, 그로 인해 폭력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끊임없이 훈육 받는다. 예를 들어 6세쯤의 아동이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을 때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않지만 중학생쯤의 여학생이 다리를 벌리고 앉으면 정숙하지 못하다고 바로 훈육되는 것이라든가, 어린 아이가 옷을 벗고 집안을 돌아다녀도 무어라 하지 않지만 중학생에 접어든 여자아이가 옷을 벗고 돌아다녔을 경우에 그러면 안 된다고 혼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차 성징’의 징후를 보이는 것은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 몸의 시작을 알리는 지표로 간주되므로 그 때부터 여성은 ‘아기를 낳을 소중한 몸이니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1)고 훈육된다. ‘2차 성징’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시행되어 온 그간의 성교육(‘나는 아기를 가질 몸이야!’라고 말하라고 교육 받는 것)들이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Scene #1: 초등학교 5학년 때 보건선생님이 여자아이들만 모아놓고 만약 누군가가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을 시도할 경우에는 ‘싫어요. 안 돼요 만지지 마세요.’라고 말하라고 가르쳤다. 교육이 끝난 후 애들이 계속 장난으로 그 말을 반복하며 놀았던 기억이 있는데, 어깨만 살짝 스치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우스꽝스럽게 그 말을 반복했고 나는 그렇게 연출되는 상황들이 매우 우스웠다고 기억하고 있다. 넓지 않은 복도에서 두 어깨를 감싸 쥐고 ‘싫어요. 안 돼요. 만지지 마세요!’라고 외치는 ‘초딩’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

이러한 ‘2차 성징’을 막 드러내는 시기를 지나 20대에 진입하기 전까지의 기간은 ‘성애화의 유예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조심하라’는 훈육은 계속되지만 ‘학생이면 단정해야 한다.’는 말이 힘을 발휘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문계 여자 고등학교를 나왔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비평준화 시절에는 꽤나 높은 점수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었다. 사립학교인지라 꽤나 오랜 시간동안 재직해온 선생님들이 많았고 그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우리 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지’와 ‘비평준화 시절 당시의 학생들이 얼마나 단정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위에서 볼 수 있듯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한 학생’으로 간주되는 이들은 ‘학생이면 단정해야 한다.(학생이면 무성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명제만 벗어나면 그 어디에서든지(심지어 ‘학생’이라는 정체성으로 생활해야 하는 학교에서도) 성애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20대에 진입한 여성에게는 성애화의 요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명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다면 ‘너도 이제 여자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성인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금지되었던 ‘성애화’적 요소를 제거한 그 모습들을 성인기에도 유지한 사람들 – 자신의 몸의 윤곽을 감출 수 있는 의상을 입고 다니고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거나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꽉 묶고 다니는 사람들-이 주로 그런 말을 들을 것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학생’일 때는 ‘복장불량’이라며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20대에 진입한 여성에게는 ‘예의’라는 이름을 달고 ‘해야 할 것’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공식적’자리에서는 화장을 해야 한다거나 몸의 굴곡을 드러내는 옷을 입어야 아름답다거나 다리를 모으고 앉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연령대의 변화에 따라 여성은 이런 규율을 수행하지 않거나 수행하도록 요구받는다.

[ Scene #2 :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단정한 것이 최고다.’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대학교 오니까 부모님이 ‘치장’(?)을 허락했다. 중학교 입학 이후로 금지되었던 머리 염색과 파마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렌즈를 끼고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짧은 치마를 입어도 ‘망측하다’라는 말 대신 ‘예쁘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화장을 하고 있어도 욕을 먹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내가 파란색 섀도만 칠했다 하면 갖가지 소리들이 날아든다.) ‘돈을 줄 테니 머리 좀 하고 다녀라.’ 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대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인사말에는 복장에 관한 말이 많이 나오곤 했었는데, 그런 말들에는 대개 이상한 추측들이 담겨 있었다. ‘소개팅이라도 있느냐.’ 혹은 ‘요새 많이 힘드냐.’ 같은 말들로 나뉘고는 했는데 그 추측들은 거의 항상 엇나갔다. ]

하지만 그러한 ‘예의’라고 간주되는 규율들을 내면화 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손쉽지 않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갑자기 해야 하니 어리둥절하면서도 불편하고, 깔끔하게 딱딱 떨어지는 안내서가 있는 것도 아니니 더듬더듬 알아가야 해서 더더욱 어렵다. 그리고 규율들은 항상 티가 나지 않거나 날듯 말듯하게 드러나는 정도로까지 개인 안에서 내면화되어야한다. 만약 이렇게 ‘예의’라고 간주되는 규율들을 지키기 않았을 경우에는 여성은 ‘수치심’을 느끼도록 교육받는다. 또한 이런 ‘수치심’의 연장선에는 ‘폭력을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스스로 규율을 지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리를 벌리고 앉지 말 것, 섹슈얼한 의미로 뒤덮여 있는 신체 부위를 드러내지 말 것,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말 것, 속옷빨래를 공개적인 장소에 드러내지 말 것.

[ Scene #3: ‘화장을 하지 않고 어떻게 바깥을 다녀?’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말도 안 돼!’ 라고 생각했으나 정작 내가 화장을 하지 않고는 집 바깥에 나갈 수 없게 되었던 것. 얼굴 위에 미친 듯이 올라오던 여드름을 바로 가라앉힐 수 없다는 좌절감과 당장 내 얼굴에 무언가 붉고 튀어나오고 건드리면 아픈 것이 올라와 있다는 것에 대한 이물감과 불쾌감이 겹쳐져서 감당할 수 없었던 것, 자꾸 만지면 덧날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나갈 때에는 화장을 덧발라 가리던 것, 안경을 쓰고 집 바깥에 나가는 것 또한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었던 것. ]

여성의 훈육은 ‘2차 성징기’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본격화되지만 20대에 진입하여도 여성은 여전히 훈육된다. 둘 다 ‘훈육’이지만 특히 후자에는 성애화적 요소가 추가되어 있다. 20대에 접어든 여성은 ‘학생’ 시절과는 다르게 자기 몸의 섹슈얼한 요소를 드러내기를 요구받음과 동시에, 그러한 의도는 감추어야 하는 모순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한 의도를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거나 일련의 ‘성애화’를 거부하는 여성에게는 가차 없는 비난이 쏟아지거나 여러 형태의 폭력이 가해진다. 하지만 그것들은 너무도 손쉽게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가부장이 지켜줄 수 있는 테두리 바깥의 여성이고 이러한 여성은 가부장이 ‘지켜줄 수 없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은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누군가(흔히 여성과 어린이)를 지켜주면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그에 따른 기쁨을 느끼는 존재들이므로 이러한 여성은 가부장에게 위협적이다. 통제의 영역 바깥에 위치한 그녀는 가부장의 영역으로 포섭되어야 할 여성으로 여겨지며 가부장은 그녀를 포섭하기 위한 폭력을 그녀의 온몸에 가한다.

[ Scene #4: 20대 초반이라는 나의 나이는 좋은 자원이 된다. 그런데 내 물리적 나이만 자원일 뿐이다. ‘20대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수많은 몸의 가능성’은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하나의 몸의 가치’에 살해당한다. 나의 몸이 현재 가지고 있는 윤곽은 자원이 되지 않는다. 사실 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화장도 사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옷을 입는 것도 내가 만들어서 입는 게 아닌 이상 내 마음대로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내가 만약 화장을 꽤나 짙게 하고 다닌다면, 내가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밤거리를 거닌다면, 나는 성폭력의 위협을 느낄 것이다. 자원으로 여겨지는 나의 몸이 나 혼자 밤길을 내 맘대로 쏘다닐 수 없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2) ]

그리하여 그녀들은 지속적으로 규율 하에서 행동하도록 훈육된다. ‘2차 성징’을 보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훈육은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시기에는 ‘학생은 단정해야 한다.’는 명제에 따라 노골적 ‘성애화’를 금지한다. 하지만 그 명제는 가부장들이 꾸준히 행해온 ‘성애화’의 작업을 은폐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학생은 단정해야 한다.’라는 명제는 ‘학생은 무성적 존재이다.’라는 명제로 이어진다. 그것은 ‘학생은 성적 욕망을 가지지 않는 존재다.’라는 명제까지 다다른다. 그 명제 하에서 많은 ‘학생’들의 몸의 서사는 난도질당한다. 이렇게 난도질당한 서사는 20대 여성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성애화 요구를 통해, 가부장의 통제가 가능한 단조로운 몸이 아니면 살해당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살해당한 몸의 서사들을 직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비록 고통스럽고 명확하지 않아 더듬거리게 되겠지만, 이러한 시도는 사라진 몸의 서사를 찾기 위한 시작이 될 것이다.

by 성애화 너마저!!!!!!!! 삵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성별이분법적 지형에서의 몸 : ‘쿨’한 당신에게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남자는 이러저러해야해” “여자니까 이래야지” 이러한 성역할 규범에 대해 “요즘 세상에 그런게 어딨어”라며 많은 사람들이 쿨하게 넘긴다. 이것이 세련된 제스쳐라고 많이들 여기는 듯하다. 이러한 젠더규범은 고정관념이고 편견이니, 이러한 것들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말이다.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이 고정관념일 뿐이고 사람마다 다 다르다면,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인지 또는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이러한 궁금증을 다른 사람들에게 풀어내면, 대부분 “몸! 몸이 자연적으로 다르지”라고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엄연히’ 신체조건이 다르므로 그러한 구분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현재 과학에서 정의하는 그 ‘다르다’는 일차적 신체조건은 염색체와 성기모양이다. 이 염색체와 성기모양이 도대체 뭐길래, 이분법적 성별은 모든 생활에 있어 관계를 구축하는 데 필수 기반이 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마주한 상대방의 성별을 알지 못할 때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당황하게 된다. 마치 발바닥이 간지러운데 신발을 신고있어 긁지 못하는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 같다. ‘여성다움’ ‘남성다움’이 규범일 뿐이고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모습을 할 수 있다는 그 ‘쿨-‘한 전제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면, 왜 외향으로 어떤 사람의 성별을 알 수 없을 때 많이들 그렇게 당황해하고 궁금해 하는 것일까? 정말 성별을 알지 못해 당황해 하는 사람들은 현대과학이 성별구분을 하는 일차적 신체조건인 염색체와 성기모양이 궁금한 것일까?

        단순히 몸에서 염색체나 성기모양 그 자체로서만 본다면 일상에서 큰 영향이나 의미가 있는 경우를 상상하긴 힘들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어느 신체부위, 위장이나 털, 손가락의 둘레, 너비, 무게 같은 수치로 일상생활이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혈소판의 수치로 사람들을 분류하여 각각의 다른 특성을 연구하고, 혈소판 수치를 기준으로 ‘어떤 의복을 입어야 하는지’나 ‘화장실을 따로 사용하게 하는지’같은 모든 행동양식들을 분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사회는 몸의 여러 부분 중에서 염색체나 성기모양을 근거로 사람을 모두 두 가지 절대적 분류체계 ‘여성의 몸/남성의 몸’으로 의미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한 몸을 사람들이 일상에서 계속 인식하게 하고, 매순간마다 포착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이 가능한 것은 그 신체적 특성에 사회가 엄청난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색체나 성기가 남/여라는 구분에 있어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근거로 이야기되어진다. 이미 그러한 구분이 절대적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남/여의 구분틀에서 벗어나는 염색체나 성기는 ‘예외’나 치료되어야 할 ‘병리’로 이야기된다. 성염색체가 XX이기에 여성이고 XY이기에 남성이라는 명제가 자연스럽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성염색체가 X0, XXY, XXX인 경우는 두 가지 틀로만 사람의 몸을 설명하는 논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들의 염색체는 바뀌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적 성별 틀에서 벗어난 몸을 인식하고 설명할 언어가 사회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도 남/여의 몸 중 어느 하나로 ‘치료’ 되라고 종용된다.(이러한 상황은 결국 남/여라는 성별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현실 조건을 반영하기도 한다) 결국 ‘남성의 몸/여성의 몸’ 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염색체로 성별이 구성되는)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 틀을 유지하기 위해 몸 자체가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여성이라는 틀로 구분되지 않는 성기를 가진 사람들은 어릴 때 의사의 판단 하에 남/여 둘 중 한 성을 선택하여 그와 비슷하도록 수술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정소와 난소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클리토리스와 페니스 어느 쪽으로 구분짓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러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의사들은 보통 남/여의 한 성별을 정해 한 성의 규범적인 몸의 모양에 맞게 수술을 한다. 이러한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성의 몸/여성의 몸’이라는 것이 염색체나 성기모양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분 틀이 먼저 구성되고 거기에 맞게 몸을 해석하거나 맞추고 있음을 반증한다. 구성된 성별이분법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로 몸의 형태나 특징들이 취사선택되거나 해석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단순히 호르몬, 염색체, 성기모양이라는 육체의 조건으로 성별이 나뉘는 것이라면, 유방이 발달한 남성의 몸, 자궁 적출 수술을 받은 여성의 몸 등을 접했을 때 우리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궁이 있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매우 과학적이라는 구분에 따르면 이 여성은 여성이 아니게 되는가. 혹은 유방의 발달은 여성의 특성이므로 이 남성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성별이 과학적 사실에 관한 이름붙이기라면 이 경우 남성의 몸 여성의 몸 이라는 이름자체가 아이러니가 되어버린다. 아니 애초에 왜 남성의 몸인지 여성의 몸인지가 왜 화두가 되어야 하는가. 여성/남성이라는 구분이 단순히 염색체나 성기의 모양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러한 구분기준에 맞지 않는 몸까지 그 두 가지 성구분에 끼워 넣어 ‘병리’나 ‘장애’로 나마 설명하려하는 것은 왜일까. 결국 수많은 차이들 중에서 그 일부분에 주목하여 그러한 구분체계를 만들어내며, 그 구분에 맞춰 몸의 차이를 취사선택하는 그 의도와 정치를 고민해야하는 지점인 것이다.

        이분법적 성별구도가 몸 자체로 자연스럽게 정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가 성별구도를 더 뒷받침하기 위해 내놓는 것이 성별 간에 신체적으로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성차라는 지식이다. “남자는 ‘체질적으로’ 여자보다 근력이 더 강하게 되어있고, 더 몸집이 크다”고 말해진다. ‘강한근력’과 ‘큰 몸집’이 ‘남성’과 동의어가 아닌데도 이러한 성차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인 지표로서 사회에서 통용된다. 일례로 개인의 의지, 조건 등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자연히 무거운 짐은 남자가 들게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성차에 대한 지식이 기반이 되어 성별이 지표로 사용되는 상황을 찾아볼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에(혹은 기준을 두지 않을 수도) 성별이라는 지표가 왜 등장하는 것인지 한번쯤 의문스러워질 만하지 않은가. ‘남자니까’ ‘여자니까’ 라는 말만으로도 여러가지 다양한 상황에서 성별구분이 판단의 기준이 될 정도로 이미 ‘여성의 몸/남성의 몸’은 근력, 지각능력 등등 몸이 다르다는 세세한 규격 틀로 조형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은 (여성과 다르게) 이러저러하다” 라든가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이러저러하다”라는 명제는 역의 형태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여성과 구분되는 남성의 특징이라는 것에 해당되는 몸을 모아보면 그것이 남성 집단과 일치하지 않음에도 이러한 성차라는 지식은 성별이분법을 유지하게 하는 지식체계이다. 본질적으로 사람의 몸을 나누는 기준이 정말 존재하는 가를 떠나, 이렇게 기존의 구분체계를 흔드는 몸들을 내쳐가면서 성별이분법체계를 유지시키려는 것은 소위 ‘객관적 과학지식’도 ‘본질적인 것’도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성역할 규범은 ‘쿨-’하게 고리타분하다고 말하더라도, 성별구분자체를 의심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별구분 자체가 ‘본질적’이거나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느꼈을 때, ‘쿨’하던 많은 사람들은 갖가지 젠더규범과 성역할들을 동원하여 그러한 성별이분법을 지키려한다. 예를들어 남성으로 스스로 정체화한 IS(Inter Sexual)인 사람의 몸을 알게 되었을 때, 사회는 그에게 그가 남성으로 ‘인정’될 만한 남성성의 증거를 가져오라고 요구하게 된다. 만약 그가 뜨개질을 좋아하고, 수줍으며 ‘여성적인’ 걸음걸이로 걷는다면 사회는 그의 남성성을 의심하고 심사(?)하려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으로 정체화한 트랜스젠더가 소위 말하는 ‘남성적’ 젠더규범을 수행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젠더규범을 판단 잣대로 삼아 그가 잘못 ‘선택’했다고 쉽게 말한다. 트랜스젠더들이 국가에 성별변경을 신청할 때, 국가는 그들에게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성별 정체성의 근거를 가져오라고 한다. 그 가져오라는 근거들은 그 고리타분하고 편견일 뿐이라던 성역할 규범 그 자체이다.

        사람들이 ‘쿨-’하게 성역할 규범이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쿨-’하게 성역할 규범을 존재하게 하는 성별이분법에서 눈을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성별이분법이 도전받지 않는 거대한 성벽으로 남아있는 한, 그 쿨 한 말들은 공허한 메아리일 수밖에 없다. 성별이분법도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의 성 역할 규범일 수 있다고까지는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성별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주민번호, 호칭, 의복 등 온 사회를 망라하며,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성별을 구분하게 하는 기준이 그만큼 강력한 것이 아니라, 성별을 나눔으로써 만들어가는 사회적 기제가 공고한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여성의 몸/남성의 몸’구분이 강력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고민해보고 그것에 물음표를 던져야 하는 시점이다.

 by 난 Cool한 거 싫어  율무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몸 말하겠어: 접경지대로서의 몸/행위매개로서의 몸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야, 나 여기까지 머리가 있으면 어떨 거 같아?”

 필자의 가까운 지인 중 한 사람은 최근 모발 이식 수술을 받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그녀는 종종 자신의 M자형 이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모발이식수술을 고려해본 건 최근에 와서야의 일이다. 요즘 텔레비전에 건강/미용 프로그램에 탈모에 대한 주제가 자주 다뤄지면서 어떻게 하면 이 몸의 일부분을 조작하고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났다. 예전에 비해 “수술”이라는 말이 가진 무게도 평균적으로 가벼워진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생각을 듣자마자 그녀에게 제발 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설득 멘트는: “아, 왜~ 지금도 충분히 ‘예쁜’데! 언니 이마 모양 바뀌면… 막… 언니 아닌 거 같을 거 같아. 이상해~ 하지 마. 응?”

  그녀는 그녀 허벅지에 있다는 “셀룰라이트1)”도 싫어한다. 그녀로부터 “셀룰라이트”가 뭔지 배운 날, 나는 괜히 내 허벅지의 살을 집어보았다. 꼴에 여성주의자를 지향하는 인간인지라, 너무 노골적으로는 말고 적당히 은밀하고 재빠른 눈길로 내 허벅지에도 그 셀룰라이트라는 게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며 말이다. 키가 큰 그녀는 가끔 자기 덩치가 너무 커 보이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고도 한다. 난 높은 곳에 있는 물건도 바로 꺼낼 수 있고 기성복을 살 때 바지 길이를 안 줄여도 되는 키 큰 그녀가 부러운데 말이다.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이니까, 내가 그녀의 몸에 대해 혹은 그녀 몸에 대한 그녀의 결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해도 되는 건가?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이니까…… 잠깐.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인가? 내 몸은? 잠깐, 잠깐. 우리 모두의 몸은? 우리 모두… 각자의 몸은 오롯이 우리 각자의 것인가?

규범, 범주, 그리고 접경지대로서의 몸

 여성주의는 지금까지 성별이분법에 따라 특정한 역할과 위치를 부여하는 젠더 규범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의 신화를 해체하려고 노력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젠더 규범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해왔다.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에 대한 정의나 해석도 다양하다.2)  Holly Devor는 그것을 개인이 젠더 규범과 갈등하거나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해석한 반면, 한국의 퀴어 문화 활동가인 루인은 개인이 젠더 규범과 갈등하건 편하게 받아들이건 혹은 부정하건 긍정하건 상관없이, 젠더 규범과 관계 맺는 방식과 젠더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 모두를 포함한 것으로 해석한다.3) 만약 그 ‘젠더 경합’(한국어 표현)을 더 확장해서 해석하면 어떨까? 젠더 경합은 개인과 규범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규범과 규범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젠더 규범은 반드시 모든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여야만 하는가?

 규범 역시 그 순간 맺고 있는 관계와 몸이 위치한 공간에 따라서 유동적이다. 이성애 젠더규범이라고 불리는 것도 여러 얼굴을 지닌 존재이다. 예컨대, TV의 (이성연애) 소개팅 프로그램에서 여성 출연자가 무대에서 소위 ‘섹시 댄스’를 출 때와 그 여성이 사귀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남자의 부모님을 찾아뵈려고 할 때, 이성애 젠더 규범은 그 여성에게 각각 다른 모습의 몸을 수행(perform)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곧 성별이분법을 기반으로 한 젠더 규범(들)이 으레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내적으로 완결되어 있는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젠더 규범 그 자체가 철옹성 같다기보다는, 그 규범을 지키려는 사회의 노력이 철옹성 같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의 몸은 사회적으로 그 몸에게 맞는 것으로 간주되는 젠더를 거부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 열심히 수행하려고 하지만, 그 젠더(여성성, 남성성, 부치 등등) 역시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므로 항상 줄타기하는 몸이 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성성’의 정의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몸은 이런 경합의 장소이다. 이런 경합은 젠더 규범과 개인 혹은 여러 젠더 규범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그 외 수많은 범주(민족,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나이 등)에서도 일어난다. 이 많은 범주와 그 범주에 따른 규범들이 우리의 몸 위에서 서로 경합하고 타협하고 소통하며, 또 때로는 자아분열을 일으킨다. 그래서 최근의 연구자들은 몸을 ‘접경지대’에 비유하기도 한다. 내 몸 안에는 한국인도 있고, 한 부부의 딸도 있고, 20대도 있고, 대학생도 있고, 양성애자도 있다. 그러나 내가 월요일엔 한국인으로, 화요일에는 딸로, 수요일에는 20대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범주는 항상 내 몸 위에서 만난다. 어머니에게 예쁨 받고 싶은 딸로서의 정체성과 내 성적 지향에 대해 어머니에게 솔직히 말하며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싶은 딸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내 몸은 때때로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경직되고 움찔댄다. 지금 내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다가도 “여자 헤어스타일로는 너무 안 예뻐”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좀 그런가..?’ 하며 다시 거울을 보기도 한다. 그 순간 그 말을 듣는 것이 싫었는데도 이상하게 거울을 다시 보게 된다.

 논의를 더 적극적으로 확장시키자면, 여러 가지 범주와 그것들의 경합은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된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 8월의 어느 날, 우리 여성제 기획단은 여성제 준비 세미나를 하던 중, 각자의 가족에서 가장 얕은 잠을 자고 가장 조금 자는 이가 대부분 50대 여성인 자신의 어머니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는 “너희 집도? 너희 집도?” 하며 조금 놀라워했다. 한국의 가부장제에서 “어머니”의 몸을 잠을 잘 설치는 몸으로 만드는 어떤 경향/힘이 있음에 조금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 “한국 어머니의 몸”은 결코 당연한 것도 원래 그런 것도 아니며,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다른 사람의 몸을 먼저 챙겨주기 위해 가장 늦게 밥을 먹고 가장 일찍 일어나는 몸으로 훈련되어버린 우리 엄마의 몸을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팔로 안을 때, 나는 때때로 알 수 없는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가족 내 다른 구성원들을 돌보고 그들이 집 밖의 “사회”에서 하루하루를 잘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소위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을 가정 내에서 담당하는) 노동을 가정 내에서 거의 전담하는 사람으로서 30년 넘는 시간을 살아온 엄마의 몸 옆에 붙어있다 보면, 가부장제 구조 하에서 내 몸 역시 엄마의 몸을 뜯어먹으며 성장한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 때문에 내 표정은 어느새 울상이 되고 만다.

 몸을 경합의 장소로 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순간 몸의 단면을 보는 것과도 같다. 그 수많은 ‘현재’의 단면들을 통시적으로 엮으면 그것은 곧 역사가 된다. 이런 점에서 몸은 역사적 기억을 담는 장소이기도 하며, 그 역사적 기억에는 식민지 역사, 가부장제의 역사, 특정한 경제 체제의 역사 등등 모든 역사가 포함된다. 지금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도 시간이 흐르면 (과거로서의) 역사가 될 것이다. ‘사회적인 것/공공적인 것’이 부재한 신자유주의 사회의 핵심은 우리 삶을 꾸려가기 위한 거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운다는 것이다. 의료도, 노동도, 교육도,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것도, 주거도 모두모두 개인 즉 사적 영역(시장)이 알아서 해야 한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 받)는 신자유주의적 개인에게 남을 돌볼 만한 여유가 있을 리 없으므로, 점점 우리에게 남는 것은 내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다는 위기의식도 커져가고 있다.4) 

 사회에 권력을 행사 해본 기억이 별로 없는 우리는 사회에 하지 못한 권력행사 욕구를 우리의 몸에게 풀며 우리 자신의 몸을 식민지화하고 있다. 동안, 식스팩, S라인을 비롯한 수많은 몸의 라인들, 겨드랑이에 남은 마법 같은 레이저 제모 시술의 흔적들, 매년 반복하는 다이어트 등등…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대로 기획‘당하느라’ 지친 몸은 그 자체로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기록된 텍스트이기도 하다. 후세의 역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자기 몸에 “투자”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도 풀고 자신의 경제적 안정도 꾀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모든 시도들은 결국 그들의 몸을 갉아먹었노라고 기록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우리 몸에 새겨지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후폭풍이 우리 몸에 가장 직접적인 효과를 끼치는 이 모든 과정은 거의 대부분의 사회 현상이 그렇듯이 젠더화되어있다.5) 똑같이 ‘다이어트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래서 자기관리에 게으른 몸’으로 간주된다 하더라도, 외모 관리가 ‘자기 관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체로 여성의 삶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행위 매개(agent)로서의 몸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몸이 단순히 여러 규범이 만나는 장소 혹은 그 경합의 결과물로서의 측면만 갖는 것은 아니다. 몸은 여러 규범 사이의 역학을 담아내는 그릇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규범을 재생산하거나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매개(agent)가 된다. 임옥희는 부르디외가 사회적 아비투스6) 개념을 차용하여 몸의 계급화를 설명한 것에 대해 논하며 “도시에 살면서 헬스, 웰빙, 요가 등을 통해 관리된 몸과 그렇지 않고 방치된 몸은 육체자본에서 현저한 차이를 드러낸다고 지적한다.7) 경제적 계급은 몸을 통해 특정한 취향/아비투스(예컨대, 잘 관리된 늘씬한 ‘여성성 대표’ 몸 혹은 식스팩이 새겨진 ‘남성성 대표’ 몸/ 똑바르고 도도한 걸음걸이 등)로 이어지고 그 육체자본은 곧 사회적 관계를 기반으로 얻어지는 사회자본을 축적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다시 경제자본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소위 잘생기고 예쁘고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의 경우 취업을 할 때 더 유리한 건 물론이고, “결혼 시장”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사회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속해 있는 배우자를 만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경제자본→취향/아비투스를 담은 몸(육체자본)→사회자본&경제자본[어떤 경우에는, 경제자본→몸→사회자본→경제자본]”으로 이어지는 고리에서 몸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고리를 너무나도 잘 꿰뚫어 알고 있다. 그리고 이 고리가 결코 무성적이지 않고 성별화되어 있어, 개인의 성별에 따라 그 고리에 대해 느끼는 무게가 다르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학벌이나 사회자본 등 또 다른 종류의 자본이 부족할수록, (얼마만큼의 돈이 있다면) 비교적 단기간에 획득 가능한 육체자본에 매달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 후 바로 취업하려고 생각 중인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성형수술은 더 이상 순수하게 “아름다워 지고 싶은 욕망”-이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 역시 얼마나 사회에 의해 큰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는지를 차치하고서라도-에서만 원인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육체자본으로서 몸이 어떻게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는지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평일 아침 10시경 TV를 틀면 종종 출산 후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금세 날씬한 몸으로 되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냉장고 정리도 깔끔하게 하고(!) 아이들에게도 최고의 것만을 선사하며 잘 키우고 있다는 여성 연예인들의 “사생활”8) 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대중매체는 임신과 출산과정에도 불구하고 ‘젊음’을 되찾고, 또 모성 이데올로기에도 부합해야 하는 여성성을 요구9)하는 사회시스템을 재생산하는 데 큰 힘을 보태고 있다. 그리고 그 재생산 메커니즘의 중요한 요소가 바로 몸(몸 이미지)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젊은) 여자답게’ 날씬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싶고, 그러면서도 아이를 편하게 안을 수 있는 아름다운 모성을 지닌 몸이 되고 싶은 그 마음은… 아니, 그 몸은… 다이어트 산업을 번창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암묵적으로 기존 사회의 규범적 메시지를 더 강화한다.

 반면, 소위 ‘전복적인 몸’이라고 하는 몸도 존재한다. 보통 성별이분법에서 벗어난 몸으로 간주되는 퀴어의 몸(레즈비언의 몸, 트랜스젠더의 몸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 여겨진다. 좀 더 구체적인 ‘전복적인 몸’ 이미지를 찾아보자면, 한 때 마돈나는 기존 젠더 규범을 뒤집는 전복적/혁명적인 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기존의 규범을 비웃으며 자유롭게 이성애적 판타지와 동성애적 판타지를 모두 무대 위에서 재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그녀가 아이를 낳고 육아에 좀 더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자 어떤 이들은 결국 마돈나도 규범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규범에 ‘포섭된 몸’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양성애적 판타지를 자유롭게 보여주며 팝의 디바로 활동하던 그녀가 육아에 전념한다고 해서 그녀의 몸이 이제 규범에 포섭되어 버렸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양성애 성향의 엄마, 성적 터부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몸을 보여주던 엄마 등등… 해석 나름이다. 사실 ‘규범을 전복하는 몸/규범에 순응하는 몸’의 이분법 역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지배적인 사회구조를 100% 완전히 재생산하는 몸도, 규범을 손바닥 뒤집듯이 완전히 전복하는 몸도 없다. 개별 몸들이 젠더·섹슈얼리티 규범과 경합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며, 그 다양성은 우리의 몸이 다른 사회적 범주(민족, 계급, 나이 등)와도 엮여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퀴어의 몸을 단순히 전복적인 몸으로만 보는 것도 문제적일 수 있다. 규범의 재생산과 변화를 무 자르듯이 나누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방향의 움직임이든 간에, 우리의 몸은 사회구조 안의 행위자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회구조에 영향을 끼치고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을 본다.

 예전에 난 내 몸이 온전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 몸을 지배하려 드는 규범이 1개이고 또 눈에 잘 보이는 것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몸 말하겠어(=못 말하겠어)”를 외치며 답답한 가슴을 칠 필요 없이, 좀 더 단순하게 풀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현실적으로 각각의 규범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며 유동적이다. 그래서 규범/비규범의 경계는 대체로 안개 낀 수평선 같다. 게다가 이런 규범이 한두 개도 아니고… 많다. 말 그대로 많~다. 몸은 마치 국경마을처럼 다양한 관계가 얽혀있는 공간이다. (요즘은 굳이 지리적으로 국경이 아니더라도 모든 곳에 다양한 관계가 얽혀있고 어딜 가나 소위 ‘초국적(transnational)’ 관계가 없는 곳이 없다.) 언젠가 철학 교과서에서 읽었던 ‘우리의 몸이 곧 소우주’라는 말을 이렇게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사회적 맥락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경합의 장소인 접경지대로서의 몸과 사회 구조 재생산/변동에서 중요한 매개로 작용하는 몸. 몸의 이 두 가지 측면을 다시 고민해보며 내 몸을 본다. 당신의 몸도 본다. 당신의 몸은 당신의 것인가?

by 타라(Tara)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몸이 없어졌다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몸을 직시한다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몸이 구석구석 제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온데간데 없어진 몸의 자취와 맞닥뜨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들으려 하지 않았는지 의아할 지경이었습니다. 언제부터 몸이 없어진 채로 나는 살아왔을까? 아니 어떻게 이걸 몰랐지? 몰랐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일상에서 느닷없이 몸서리치게 하는 낯섬, 역겨움, 혐오, 우울, 고통과 같은 몸의 느낌들을 외면해버렸을 따름입니다. 너무나도 확고하게 몸이 있다고만 굳건히 믿어오고 들어오는 동안 나의 몸 너의 몸이 없어지는 줄도 몰랐지만, 기실 나의 몸 너의 몸은 곱게 없어지지만은 않았습니다. 낮게 구토하고 비명 지르는 몸의 언어가 내 몸 속 어디에선가 울려오고 있었으니까요. 몸이 없어졌음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때였습니다.

몸은 태어나자마자 생물학적/의학적으로 외부성기의 모양에 따라 두 개의 성별로 구획 되어야 한다, 여기에 한 치의 의심은 없다, 예외인 몸은 수술로 교정하라! 구획된 몸은 죽기 전까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이성애자 ‘여성’/‘남성’ 임을 연기하라! 이러한 명령에서 항시 이탈 중인 몸들을 몸의 지배 서사에 부합하게 되돌리려는 끊임없는 교정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이제 와서 “몸은 본질적으로 그렇다”는 둥 몸에 질문을 못 던지게 합니다. 우리가 지금껏 익숙해져야 했고 있다고 여겨야 했던 몸은, 몸의 지배 서사에 맞춰져 볼 수 있고 읽어낼 수 있었던 몸에 불과합니다. 그 외의 몸들은 불가능하다고 주장되었기에, 우리는 서로의 몸을 독해해 낼 수 없었고 오독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날 것의 생명력을 가진 몸의 총체로부터 ‘여성’/‘남성’ 두 개의 몸만을 뽑아내고 나머지 몸을 박탈하는 것. 이렇게 몸은 살해당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몸에 문제제기 하지 않은 채로 “각자의 몸은 모두 다르고 다양한 거 아니야? (근데 성별은 빼고)” 라고 쿨하게 말하는 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자의 다름과 다양성 역시 정해져 있는 규범과 정상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성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근사하고 흠잡을 곳 없어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제모한 털들, 일상적으로 느끼는 음식에 대한 죄책감, 마르고 근육 없는 몸으로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다는 공포, 성애화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등등 다 언급할 수도 없는 부대낌을 삭제해 버린 채로 아름답고 섹시함만을 보는 게 뭐가 그리 다르고 다양한 몸이 될 수 있습니까? 게다가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이성애 여성으로 여겨지지 않는 몸은 즉각적으로 배제해버리는 마당인데요. 지배규범이 세밀하게 구획해 놓은 몸에 문제제기 하지 않은 채로 다르고 다양한 몸이 가능하기는 한건가요? 이러한 은폐 속에서 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몸은 원래 그렇다” 라는 말과 “몸은 다르고 다양하다” 라는 말은 얼핏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지배 담론 내에서 하나의 맥락으로 겹쳐지게 됩니다. 일단 ‘몸과 성의 정상성’이라는 기저에 깔린 관념은 도전받지 않은 채로 그대로 유지됩니다. 이와 동시에 몸의 ‘생물학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다르고 다양할 수 있다고 쿨하게 인정됩니다. 지배담론은 이러한 아이러니로서 몸을 포획했습니다. 서로 충돌하는 듯이 보이는 두 개의 관점은 기실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몸을 직시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근대의 몸에 관한 인식론과 의료 기획, 신자유주의 시대의 기획 가능한 몸, 가부장제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의 성/별이분법 매트릭스의 교묘한 합작이라 하겠습니다.

몸을 분석하고 관찰하고 진찰하는 사이, 몸을 자원화하고 기획하는 사이, 몸은 철저하게 타자화 되고 대상화 되어 갔습니다. 그러한 오랜 맹목 속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나의 몸과 너의 몸을 유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어제까지는 있었던 몸이 오늘 아침에는 갑자기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리고 언제나 각자가 살아가는 의미망 속에서 몸은 폭력적으로 없어지기도 하고, 몸의 경험의 재구성과 의미화를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는 말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몸은 여러 가지 좌표 속에서 실시간으로 위치지어지고 경합합니다. ‘여성’/‘남성’ 이라는 이분법적 범주에 기반하고 있는 성/별정체성과, 나이, 계급, 민족, 인종, 역사 등 가능한 좌표들의 경우의 수는 무수합니다. 이 좌표들을 경계 짓는 지배적인 담론에 의하여 내 몸은 어떤 방식으로건 배치되거나 배치되지 않거나 해왔습니다. ‘여성’/‘남성’, 이성애자/비이성애자, 장애인/비장애인 등으로 경계 지어지는 순간, 몸의 어떤 부분만을 볼 수 있게 되고 어떤 부분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몸은 가차 없이 쪼개어지고 사정없이 찢겨져 나갑니다. 지배규범에 부합하는 몸은 살아남지만 거기에서 밀려난 역겹고 낯선 몸은 살해당합니다. 정상적인 아름답고 건강한 이성애자 ‘여성’/‘남성’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꿈틀거리고 분열증식 하는 몸을 흔적 없이 빠르게 잊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사회적 소수자’, ‘비정상적인 변태’로 살아가게 되겠죠.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그 누구의 몸일지라도 이러한 과정을 수월하게 통과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몸은 그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몸을 어느 한 가지의 이야기로 설명해내려고 해도 몸의 일시적인 단면만을 담아내게 될 것입니다. 몸은 딱 떨어지게 경계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계들이 충돌하고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접경지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내 몸은 지금 어떤가요? 몸을 붙박아 놓는 단조로운 지배규범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비로소 몸들의 가변적이고 임시적인 측면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각자가 맺고 있는 관계와 맥락 속에서 몸들이 유동하고 파열하는 모습이 눈을 채우고도 남아 흘러넘쳤습니다. 이렇게 생동하는 몸을 살해해온 역사가 참으로 길었더랬으나, 한 번 그 장면들을 목도하고 나니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일들이 처음에는 얼마나 끔찍했던가를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내 몸을 가지고 어떻게 이리저리 노는지를 하나하나 짚어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몸은 하나가 아니라 정체화 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다른 몸과 만나는지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몸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의미화 하는 과정에서 급변하는 몸의 장면들을 쫓아서 절실하게 더듬더듬 받아 적어 내려갔습니다.

각자가 몸을 직시하는데 있어 단초가 되었던 몸의 반응, 몸의 발화는 달랐으되 우리는 이것을 몸의 “잉여”라고 불러보았습니다. 쿠키반죽을 쿠키틀로 찍어내면 어김없이 가장자리가 남는 것과도 같이, 각자의 몸을 어떤 범주로 명명하고 포섭하고자 해도 결국 남게 되고, 보이지 않게 되는 몸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내가 이성애 젠더규범에 끼워 맞춰지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반증으로서 폭식/거식과 같은 몸의 고통이라든지, 섹슈얼리티에 관련하여 서로 다른 해석이 통용되는 공간(예를 들어 이성애 여성으로 간주되는 공간과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차이)에서 내 몸의 같은 부분일지라도 다르게 해석되고 다른 정체성의 표징으로 간주되는 것이라든지. 혹은 이성애 ‘여성’/‘남성’의 서사로는 매끈하게 꿰맞춰지지 않는, 어쩐지 여자애 같지 않았고 유별나고 일탈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경험이라든지. 어떤 정체성이나 범주로 명명하고 이에 따라붙는 서사들로 설명해보려 해도 설명되지 않는 목욕탕, 공중화장실과 같이 성별화 된 공간에서 몸의 불편함과 같은 것들…… 하얗고 가느다란 팔에 달린 겨드랑이 털, 가녀린 몸매에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 굴곡 있는 가슴과 턱수염과 음경이 동시에 있는 몸, 장애가 있는 몸 등 지배적인 몸의 서사에 부합하는 배치에서 벗어난 몸과 맞닥뜨렸을 때의 치미는 감정들까지. 나의 몸의 잉여는 얼마든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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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이제 좀 감이 오시는지? 빈말이 아니라 몸이 정말로 없어졌습니다. 몸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신화이니까요. 사회에서 몸이 존재 가능하다고 규정해놓은 방식은 철저하게 성별화 되어 있으며 ‘여성’/‘남성’의 몸을 발명하고 조형해냅니다. ‘이상적인 이성애자 여성’의 몸을 규정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재생산이 가능한 몸으로 환원하려는 갖가지 시도들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지배규범은 어떻게 몸을 통해서 재현될까요? 여기에다가 ‘여성’ 으로 불리우거나 ‘여성’ 으로서 정체화 하고 있는 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로 인하여 몸이 없어진 이들의 없어진 몸이 왕왕 제 얘기를 꺼낼 때, 몸을 없애려는 시도는 어떻게 붕괴할까요? 그/녀들의 없어진 몸은 그/녀들의 정체성, 섹슈얼리티, 욕망과 아름다움과 갈등하고 충돌하면서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없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개개인의 생애사 속에서 매 순간 몸이 재구성되고, 이러한 몸들이 만나서 관계 맺을 때, 어떤 몸이 드러나게 될까요?

몸은 항상 내가 아닌 그 무엇으로 타자화 되었고, 스스로는 말할 수 없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내가 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몸에 대해 말한다” 는 건 그래서 그만큼 어려운 거겠죠. 몸에 대해 말할 때 부딪치게 되는 한계들과 그 속에서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몸의 경험을 그대로 드러내기. 여기에서부터 다시 다르게 접근함으로서 지금껏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을 이야기해 나가기. 내가 생각하는 대로 몸의 경험을 따로따로 떼어놓고 ‘예시’ 로 들어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기존의 상징체계, 관념, 재현, 서사 등지에 종속되거나 파편화되어 버렸고 없어진 몸을 파악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실패의 과정을 지나, 몸을 통째로 들이 밀어보고 서로에게 단초가 될 수 있는 몸의 반응들, 발화들을 불러내고자 합니다. 몸의 “잉여”의 연쇄작용이 없어진 몸의 없어짐을 인식하게 하고, 없어진 몸의 생애사를 들을 수 있게 합니다.

자, 그럼 본격 제12회 미스테리호러스릴러 여성제 ☆ <몸이 없어졌다> 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