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궁은 나의 것”

검은시위, 에 참석했다. 최근 폴란드에서 대규모로 열린 낙태 불법화 반대 시위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최근 보건복지부에서 내어 놓은 낙태 시술을 ‘비도덕적 의료 행위’로 규정하고 12개월 면허 정지를 내리는 행정규칙 개정안 철회 및 나아가 형법 상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였다. 몇 가지 구호가 반복되었다. “덮어 놓고 낳다보면 내 인생은 개망이다”, “콘돔 없이 섹스 없다”, “낙태죄를 철폐하라”, 그리고 “내 자궁은 내 것이다”.

늘 그렇듯 구호는 따라 외치지 않았다. 지루할 때즈음 한 번씩, “낙태죄를 철폐하라”고 외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저 평소처럼 습관적으로 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 자궁은 내 것이다”라는 말은 왠지 입에 붙지 않았다. 내게 자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어서만은 아니었다. 왠지 구호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느낌, 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자궁은 자궁을 가진 이의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 저 말에 거짓이나 과장은 없으므로, 저 말이 자궁을 갖지 않은 이들 혹은 자궁을 가졌지만 여성이 아닌 이들을 직접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물론 ‘자궁 가진 이’와 ‘여성’은 이 집회에서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 같았지만, 한 명 한 명의 생각을 따져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저 나의 추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디가 걸린 것일까. 아마 나는 자궁을 정체성과 연결해 생각했던 것 같다. 정체성은 나의 것일까? 비수술MTF트랜스젠더레즈비언이라고, 여성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나는 이것이 크게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여성으로 대해 달라는 부탁일 뿐이다. 내 정체성은 나의 선언이 아니라 타인들의 인정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이름처럼, 명목상으론 내 것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받아들일 때까지 나는 야금야금 괴롭히겠지만, 정체성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궁은 어떨까. 정체성처럼, 궁극적으로 남의 것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 집회는 자궁을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한 집회였다. 조금 확장하자면 자궁과 연결된 (것으로 여겨지는) 질과, 그리고 질이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섹스를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한 집회였다. 자궁에서 섹스로 이어지는 영역에 타인이 간섭하지 않게 되면, 아무도 출산을 강요하지 않고 섹스에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자궁은 그 주인의 것이 될까.

자궁의 용도를 생각한다. 아마도 자궁은 임신출산을 위한 것이라고, 그러나 그 용도에의 사용 여부는 본인이 직접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들 여길 것이다. 그러나 자궁의 용도는 거기서 끝나지도, 거기서 시작하지도 않는다. 출산을 하라는 요구는 자궁을 가진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여성이 자궁 가진 이와 동일시 되는 것은 자궁의 제 1 용도가 다름아닌 여성의 식별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의 식별에 사용되는 것은 추정상의 자궁이다. 페니스를 갖지 않은 자에게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질을 가진 자에게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궁, 유방을 가진 자에게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자궁, 유방이 크지 않아도 여전히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자궁. (그러나 이 자궁은 상징이 아니다. 있을 것으로, 확신되는, 물질적인 자궁이다.)

자궁의 용도가 그런 것이라면,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낙태나 출산과 관련한 의미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아니, 그런 의미만을 가질 수는 없다. 낙태나 출산과 관련해 완전한 결정권을 갖게 된다 해도, 여성의 식별에 사용되는 것을 막지 않는 한, 자궁은 여전히 자궁 가진 이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의 식별에 멋대로 사용되는 것을 막았을 때에야, 자궁은 자궁 가진 이의 것이 되었다고 ― 임신출산에 관한 용도에 있어서 온전히 당사자가 그 사용을 결정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이외의 용도에 사용되지 않을 때에야 자궁은 자궁 가진 이의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낙태나 출산과 관련한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누구를 어떻게 여성으로 식별할 것인가 하는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된다. 자궁이 있으면 여성, 자궁이 없으면 남성이라는 생각, 혹은 여성은 자궁이 있고 남성은 자궁이 없다는 생각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된다. 나의 자궁을, 나아가 나의 신체 어느 부분이든을, 당신 멋대로의 의미화에 사용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된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니, 나를 여성으로 규정하는 데에 당신 멋대로 써먹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가 입에 붙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런 생각의 흐름을 거기서 읽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어진 발언들에서 자궁에 대한 결정권은 ‘자궁 가진 이’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 대신 ‘여성’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궁 가진 이’와 ‘여성’이 동의어로 쓰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그런 동일시를 부수는 기제가 되어야 했다. 이 구호는 ‘여성운동’의 구호가 아니라 ‘퀴어운동’의 구호까지가 되어야 했다.

페미니즘과 KIBUN에 대한 단상

페미니즘과 KIBUN에 대한 단상 by 상어

  1. KIBUN의 변화

 

미국 드라마 오렌지이즈더뉴블랙에서 “타문화권에서는 남의 품위를 진실보다 중요시해요. 한국에서는 그걸 기분이라고 부르죠.”라는 대사가 등장했다. 트위터 사용자들 사이에서 여성차별이라는 진실보다 여성차별을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을 품위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기분 나쁘지 않을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지고 있을 때였다. 적절한 시기에 나타난 적절한 대사는 여성혐오자들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페미니즘은 많은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있다. 페미니즘으로 기분이 상한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소환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같이 기분 나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누구인지 보다는, 그들이 느끼는 기분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렇게 많은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페미니즘만은 아니다. 지금은 페미니즘이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이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노동/민주화운동하는 아들과 그를 먹여살리는 아버지의 대비는 바로 그 억하심정의 재현이다. 아들은 대의를 찾느라 스스로를 부양하지 못한다/않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생활하지만, 대의를 모르거나 대의에 반하는 아버지를 무시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무지나 대의에 반하는 행위는 아들의 탓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그러한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서사에서는 대의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 왜 옳은지 묻고 따질 이유가 없다. 대의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것조차 대의를 좇는 사람들의 탓이다. 얼마나 효과적인 전략인가. 기분이 상한 사람들은 노동/민주화운동이 옳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옳은 것을 하지 않더라도 비난받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기분이 상했고, 그래서 어떤 논쟁도 없이 자신을 정당화할 서사를 제시한 것이다.

이제서야 페미니즘이 많은 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부양하는 아버지와 부양받는 아들의 서사를 써먹을 수는 없다. 세대 간이 아닌 성별 간의 관계를 통과하는 서사를 만들어내기에 지금 시대가 적합하지가 않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정당화를 해야 했다. 더이상 포장할 것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기분이 상했음을 드러내야 했다. 그래서 나의 기분과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한 너의 태도에 대한 억지가 난무했다. 이것이 트위터라는 공간에서 여성혐오자들의 기분을 조롱하는 맥락이다.

나는 이것이 페미니즘에서 기분이라는 단어의 용례가 변화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내 영페미니스트들이 “불쾌하다”라는 단어를 통해 일상에서의 문제제기를 시도하던 시기가 있었다. 여성이 가지는 “나의 기분”을 드러내는 것, “나의 기분”을 중요시하는 것은 일상적인 차별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이었다. 개인의 예민함으로 치부되었던 그 감정을 공공의 자리로 가지고 나오는 과정이었고, “여성의 기분”은 감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편견을 우회하거나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그래서 뭐?”라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기분은 포괄적인 정의를 가진다. 기분은 “대상/환경 따위에 따라 마음에 절로 생기며 한동안 지속되는 유쾌함이나 불쾌함 따위의 감정”을 말한다. 오렌지이즈더뉴블랙은 미국드라마다. 저 대사 뒤에는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봤다는 부연이 달렸다. 단어의 정의보다 용례에 의존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은 기분의 정의가 아니라 체면의 정의라고 했다. 체면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이다. “제 체면을 봐서라도 그 아이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이거 참, 체면이 말이 아니군.” “체면 차리지 말고 편히 앉아 맘껏 드세요.” 기분이나 체면 모두 타인이나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 발생되는 감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감정보다는 그 감정을 야기하는 외부적 환경이다.1 “불쾌하다”라는 문제제기 전략은 그 감정을 야기한 사람에게 그 설명의 책임을 전가한다. 그 외부적 환경, 즉 가부장제나 성차별주의, 여성혐오에 대한 언어화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채택한 전략이다. 그리고 더 이상 기분을 말하는 자가 이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여성혐오자들이라는 지점이, 바로 그 외부적 환경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의 변화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불쾌하다”라는 표현으로 일상의 차별을 처음 드러내고자 하는 시점과 비교해서, 지금은 그 불쾌감으로 시작되었던 이야기들이 더 많은 언어와 설명 방식, 지지를 얻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나의 불쾌감이 아니라 너의 여성혐오로 주제를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여성혐오를 겪은 피해자의 기분이 아니라, 여성혐오라는 단어로 지목된 가해자의 기분이 설명할 말을 찾아야 한다. 물론 그 설명은 다시 가부장제나 성차별주의, 여성혐오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며, 이 현상들을 설명하는데 더욱 유익할 것이다. 이런 판단에서 기분이라는 단어의 용례 방식의 변화가 유의미해 보인다.

 

  1. 여성혐오의 기분: 수치심

 

페미니즘으로 기분이 상한 사람들의 기분을 계속 기분이라고 부를 수 만은 없다. 그 감정을 더 세세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들은 단일 집단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기분이 상한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페미니즘으로 인해 기분이 상한 것은 적극적 여성혐오자들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로 살다보면, 어떤 이슈에 대해서 내 의견을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의 의견을 궁금해한다. 그들은 스스로 그 질문을 할만큼 깨어있기 때문에, 그 질문을 통해 그들은 여성혐오와 무관한 존재라는, 이 무해한 위치를 획득하고자 한다. 질문받은 자를 가르침을 주는 자로 높이 평가하든, 자신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를 지닌 자로 하대하든, 이제 모든 상황은 질문받은 자에게 달려 있다. 단, 질문받은 자는 질문하는 자의 무해한 위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질문받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설명 뿐이다. 설명은 논쟁을 가져올 수 없다. 논쟁은 대화 상대의 위치에 따라서 가능한데, 질문하는 자의 무해한 위치는 그들이 어떤 입장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들은 문제 밖에 서있다. 문제와 연관될 수 없기 때문에, 논점을 가질 수도 논쟁을 할 수도 없다. 그들의 위치가 무엇인지 요청받았을 때, 그들은 가장 기분 나빠한다. 자신의 위치가 더 이상 무해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해한 위치란 질문 받지 않을 위치일지도 모르겠다.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의 나빠진 기분은 연극 <나무 위의 군대>를 떠올리게 한다. <나무 위의 군대>는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소식을 듣지 못한 일본군 병사 2명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여전히 전쟁 중이라고 믿으며, 2년 동안 오키나와 어느 나무 위에서 숨어 지냈다. 연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전 중에 분대장은 신병과 함께 나무로 도망친다. 살기 위해 부상자를 외면했고, 부족한 식량 탓에 굶주린다. 그는 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살기 위해 노력한 것은 자신에게는 수치다. 그렇기 때문에 신병에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다. 그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요지를 점령한 것이고, 부상자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신병이 그 거짓말을 믿는지 아닌지 분대장은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대장은 수치심으로 신병을 증오한다. 수치심을 일으킨 것은 자신도, 자신의 행위도 아닌 그것을 목격한 신병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도발되고, 극단으로 치닫는지 보여준다. 수치심은 집단주의 문화의 산물이다. 수치심은 자신이 잘못한 행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타인이 그 행위를 알아차린 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다. 수치심은 누군가 그 감정을 도발해야 한다. 연극에서 나타난 수치심은 분대장의 행위를 알아차릴 수도 있는 신병으로 인해 분대장이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분대장의 모든 행동과 감정은 수치심에서 출발한다. 그는 많은 전쟁을 겪었고, 규칙과 도덕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규칙과 도덕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규칙은 개인의 판단과 무관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다. (대일본제국에서 살아가던 본토 남성에게 군대와 군대 밖 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것은 군대와 무관하다. 그는 군에 가기 이전에도 자신만의 도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아내와 결혼하는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규칙에 따라 아내를 선택하지만, 아내의 입장은 다르다. 못생긴 여자, 자신이 결혼을 해줘야 하는 여자,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할 여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수치심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는 잘못 판단했고, 아내는 그 잘못을 인지했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질문하지 않는 자, 의심하지 않는 자는 불안한 기반을 가지게 된다. 페미니즘은 질문으로 구성되어가는 학문이고, 이론이고,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공중에 떠있는 규칙은 누군가의 질문 하나에도 흔들거린다.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납득하지 않고 넘어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납득하지 않고 넘어가 주어야 한다. 하지만 신병은 질문하는 자이다. 그는 목격하는 자로서 수치심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목격한 행위에 질문을 함으로써 분대장의 살의를 이끌어낸다.

 

  1. 기분이 상한 이유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민주화운동을 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직하고 올바르다. 다만, 복잡한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페미니즘에 기분 상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리는 이미지와 같다. 페미니즘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뿐, 그들은 언제나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왔다. 그 정직과 올바름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조롱을 포함했을지언정, 이 평가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자신을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 중 일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에 분노하게 된 이유는 바로 페미니즘이 옳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대는 사람들에게는 페미니즘은 자신과 무관한 것이다.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신과 그런 자신이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하는 명제 사이에서 그들이 그토록 분노할 이유는 없다. 자신이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에, 그대로 미지의 존재로 남겨두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제 무지하지 않고, 그 속에서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지켜야 한다.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신과 그런 자신이 불편해하는 명제 사이에서, 그들은 기어코 이 명제가 틀렸음을 주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신’이라는 전제가 흔들린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를 나눈다. 또 다시 생각해보면, 진짜와 가짜를 나누기 이전에 페미니즘이라는 질문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불편한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신’이 불편해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면, 전제는 흔들린다. ‘올바름을 판단 할 수 있는 자신이라는 전제는 올바름을 판단할 일이 없다면 흔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치심은 이렇게 살의와 같은 분노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스스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기분 나빠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들의 나쁜 감정, 수치심은 염치와 대립한다. 염치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수치심은 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감정이기 때문에, 이것을 안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수치심이 강한 자는 염치가 없다. 염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 괴상한 바닥을 보여주면서도 당당하지만, 누구보다 부끄러움과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1. 나는 감정을 하나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감정 자체가 나타내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감정만으로 무언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불쾌하다”라는 문제제기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만, 그 자체로 유의미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여성혐오자들의 “불쾌하다”는 감정은 여성혐오자들의 반성없음을 드러내는 것이지 그 감정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갈리아를 생각하며

한 달쯤 전, 트위터 부계정에다 “#나는페미니스트다 #나는메갈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메갈리아4에서 후원용으로 판매한 티셔츠를 입었다가 게임 작업에서 배제된 한 성우의 일이 알려지고 있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나는메갈이다” 혹은 “내가메갈이다”라는 트윗이 여기저기서 올라오고 있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자기 사상의 표현이 일자리를 잃을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그런 불의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연대하는 의미에서 한 트윗이었다. 그러나 곧,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지난 해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했을 때에도, “#JesuisCharlie”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했을 때에도 나는 그런 트윗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의 물결에 함께 하지 않은 것은 ― 심지어 그것이 의미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함께 하지 않은 것은, 그 트윗을 한 이들 중 많은 수의 페미니즘이 양성평등 정도에 머물러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의 것과 다른 페미니즘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고, 같은 선언으로 내 것이 그것에 섞여 드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JesuisCharlie”에 함께 하지 않은 것은 조금 더 복잡한 심경 때문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았다. 테러의 문제에 있어서 누구를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하는 고민, 그리고 《샤를리 에브도》의 논조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그런 것들을 드러내지 못한 채 언론의 자유, 생명의 소중함 같은 것으로 읽히기 쉬운 트윗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나는 대체 왜 “#나는메갈이다”라고, 결의에 찬 것도 아니고 사실도 아닌 말을 한 것일까. 메갈리아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 여러 가지 (이렇게 써도 좋다면) 자정 노력이 있기는 했지만, 워마드는 말할 것도 없이 메갈리아에도 비수술트랜스젠더여성인 내가 있을 자리는 많지 않아 보였다 ― 말이다. 나는 그것이 연대라기보다는 일종의 동정심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어떤 운동이, 비록 그것이 내가 지금 있는 곳과는 다른 곳에 있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운동인 한에서, 억압 받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타까워서라고 결론 내렸다.
예전에도 이런 동력으로 무언가를 한 적이 있었다. 바로 2008년 촛불집회다. 꽤 긴 시간을, 잠도 제대로 못 자다시피 하면서 매일 광화문을 향했었다. 그 즈음 채식을 시작했으므로 광우병 쇠고기는 나의 이슈가 아니었고, 정부의 막무가내식 집행은 늘 있는 일이었으므로 유독 열심히 나갈 만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집회라고는 와 본적도 없던 이들이 매일 같이 거리로 나와 경찰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 갈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나는 내가 동정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동정이니 연민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논의들이 많지만, 사람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동정심으로라도 (또 한 번, 이렇게 써도 좋다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내 일이라는 점이다. 나는 마저 고민하게 된다. 나는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을, 메갈리아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혹은 소위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동지라 불러본 적 없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정치적으로, 좋게 말하면 뾰족해져 갈수록, 나쁘게 말하면 편협해져 갈수록, 뜻을 나눌 동지를 찾을 수 없다는 푸념이었다. 동시에 나는 언제나, 내가 연대한 노동자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여기저기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대학에서의 운동을 마친 이후, 이따금 글이나 쓰며 몇 년을 살다가 마주한 메갈리아라는 운동은 내게 그 감정을 다시금 떠오르게 한다. 당시의 고민은 지금과는 결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때 생각했던 것은 대학의 다른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 혹은 ‘연대’를 나갔던 현장의 노동자들, 철거민들, 농민들, 장애인들이었다. 나와 같은 지위를 가지고서도 다른 시점에 있는 다른 단체 활동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쨌거나) 엘리트로서, 당사자가 아니라 연대자로서, 현장에 있는 데에서 오는 고민들이 있었다. 지금은, 이 두 가지 고민이 하나로 얽혀 있다.
내가 스스로를 활동가로 여기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메갈리언들이 스스로의 제 1 정체성을 메갈리언으로 삼지는 아마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든 그들이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들의 시점이 나와 다름에 불만을 느낀다. 트랜스젠더퀴어 배제적인 발화들에 아픔이나 분노 이전에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싫어했던 다른 학생 단체 활동가들처럼, 나와 같은 지위에 있지는 않다. 내가 대학에서 쉽게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을 메갈리아를 통해서 처음으로 배우게 된 이들, 내가 대학에서 안전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들을 메갈리아를 통해서 처음으로 말하게 된 이들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그저 싫어할 수는 없다. 답답함과 함께, 순전히 엘리트로서 갖는 동정심이, 조금씩 스며나온다.
아마도 나는, “#내가메갈이다”가 필요한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확장을 위해서도, 사상 검증에의 반대를 위해서도, 직간접적인 피해자들을 지지하기 위해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선언을 하기 저어되는 것은 내가 메갈리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갈리아에서 워마드까지의 흐름과 그 가지들에서 발견되는 이성애중심주의의 흔적들에, 장애인 비하의 흔적들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는 이 없는 곳에나마, 그렇게 선언한 것은 약간의 동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정심으로 좋은 일을 해도 좋지만, 이것이 내 일이기에 문제가 된다고 썼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중의 고민을 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 ―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여성을, 이차적으로 메갈리언 여성을 가리키는 듯하다 ― 를 동정하는 것이 옳은 일일 수 있는가? (역사가 단선적이지는 않아도 대강의 방향은 있다고 한다면) 서로 다른 시점에 있어 온전한 연대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운동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내 고민은 이 두 가지 질문으로 수렴된다. 표면상 남성으로 살고 있기에, 여성혐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겪지 않는 듯 보이는 삶을 살고 있기에, 이러한 질문들이 페미니즘 운동과 결합되면 내 운동의 자격을 의심하는 데에까지 고민은 나아간다.
내가 충분히 훌륭한 운동가라면, 이 글의 마지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답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는 좋은 운동가는 못 되는 모양이다. 지금 내가 아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내 삶과 내 운동을 접어두고 당장의 급한, 그리고 큰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것. 혹은 성에 차지 않는 모든 운동을 비판하며 좋게 말하면 선구자, 나쁘게 말하면 엘리트 전위로서의 위치를 자임하는 것. 이 둘 사이의 간극을 해소할 만한 길을 아는, 훌륭한 운동가는 되지 못했다.

메갈은 종북이다

메갈은 종북이다 by 수진

메갈리아(이하 메갈)는 진보 개저씨들의 종북이다. 모든 것을 후려칠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 득템 하신 거 축하하지만, 그 아이템은 잡템이다.

메갈과 워마드의 분화 과정이나 지금의 메갈이 어떠한지 알지도 못한다. 알 필요가 없다. 티셔츠 수익금의 용처나 현재 집행 상황도 알 필요가 없다. 페북에도 메갈(4)이 있고 다음에는 워마드라 불리는 메갈이 있기 때문이다. 메갈 비슷한 논리를 펴는 개인도 메갈이다. 메갈의 단어를 하나만 써도 메갈이다. 워마드를 캡처 떠도 호칭은 메갈이다. 저기 북쪽 어딘가에 메갈이라는 거대한 괴뢰집단의 지령을 받았기 때문이다그러니 모두 묶어 메갈이다. 이것에 반론하는 자 역시 메갈이다. 나 역시 메갈일 터이다.

폭력의 평가

많은 이들이 메갈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 중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비폭력을 추구하다니 놀랍고도 놀랍도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폭력의 역사이다. 배제해야 할, 그리고 기념해야 할 역사적 사건 대부분은 폭력적이다. 어떤 폭력은 나쁘다고 배우고 어떤 폭력은 추앙해야 한다고 배운다. 우리는 폭력을 평가한다. 현재 메갈이 슈퍼빌런이 되기까지 메갈의 폭력은 제대로 평가당했는가?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폭력을 평가해 왔으며 그 기준은 메갈의 폭력을 평가할 때에도 적용되었는가?

메갈은 흔히 일간베스트(이하 일베)와 동급의 위치에 놓인다. 일베 역시 슈퍼빌런이다. 일베는 2010년 무렵에 생겨났다. 2011년에 누군가 유머사이트라며 보여준 일베를 접한 내 개인적인 평가는 그때의 일베나 지금의 일베는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초창기 일베의 행동은 젊은 극우들의 ‘일탈’일 뿐이었다. 2012년에는 일베 안팎에서 비판을 받는 사건들도 꽤 있었다. 발가벗은 여동생 몰카를 인증하고 발언의 수위도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래도 아직 그들은 악마가 아니었다. 진중권은 이 시기 일베 회원과 토론도 벌였다.

Chin-debate

2013년 무렵부터 분석이 시작된다. 현재 반 메갈 전도사인 박가분은 이 시기 <일베의 사상>을 썼다. 269페이지나 되는 이 책에는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부터 논객, 촛불시위, 나꼼수 등 일베의 탄생 배경에서 그들의 비뚤어진 사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우리 세대의 한계는 무엇이며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말 꼼꼼하게도 많은 것들이 쓰여있다. 논문도 나오기 시작했으며, 중앙대 신문은 일베를 쉽게 정의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기도 했다. 그들의 폭력은 조심스럽게 분석되었고, 심지어는 ‘우리 안의 일베’를 찾아 자신의 슈퍼 에고 깊숙한 곳을 탐문하기까지 했다. 무엇이 그들을 만들었고 내 잘못은 무엇이었는지 진지 빨고 고민했다.

그들이 절대 악이 된 것은 2014년 세월호가 결정적이었다. 폭식투쟁과 어묵 드립 때문이다. 그 즈음에 만물 일베설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일베의 행동을 일반화하는 현상에 이름까지 붙인 것이다. 찌질이 집단이 아닌 절대 악으로의 평가는 일베 탄생 이후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일베의 폭력은 평가를 받았고 그 평가들이 쌓여 현재 일베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일베의 폭력마저 공정한 평가의 과정을 거치게 해주었고, 그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우리는 늘 폭력을 평가한다. 폭력적이라 나쁜 폭력은 죄 없는 민간인을 대량으로 살해할 경우에나 그러하다. 똑같이 불을 질러도 누군 방화범이고 누군 민주투사가 된다. 경찰 버스를 넘어뜨리고 고추 낙서를 하더라도 촛불집회를 싸잡아 폭력적이라 폄훼하는 것은 생각하기 싫다는 뜻일 뿐이다. 실제로 집회에서 일어난 폭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국가폭력을 향한 저항폭력이라는 점에서 쉴드를 치기도 한다. ‘집회가 좀 폭력적이면 어때! 쫄지 마! ㅅㅂ!’라는 주장도 힘을 가진다. 말콤엑스의 운동은 폭력적이었다. 욕을 입에 달고 사셨다. 폭동을 선동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도 수없이 했다. 백인은 악마라 했고 미국 흑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히틀러와 스탈린이 최고의 백인이라 했다. 하지만 말콤엑스나 일베나 그놈이 그놈이라 하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적이기에 나쁜 것이 아니다. 그 폭력의 이유가 가당치 않을 때 그 폭력은 나쁜 폭력이 된다.

폭력적인 광주 시민군

국가폭력을 향한 저항폭력

메갈의 폭력

작년 이맘때 등장한 메갈은 등장과 동시에 악마가 되었다.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란다. 폭력적인 어휘를 만들어 사용하면 그 텍스트는 폭력적일까? 박가분의 <정말로 메갈리아의 혐오발언은 ‘일부’의 문제일까>를 비판한 쉭릯님의 <박가분 선생님의 초월자적 면모와 정보검색론의 혁신을 찬탄하며>에 따르면 일베를 그렇게 애정 하며 분석한 박가분은 메갈리아에 대해서는 손쉬운 방법론을 택한다. 가방끈이 짧아 양적 분석은 꿈도 못 꾸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혁신적이다. 그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검색어 한남충 site:megalian.com으로 검색한 결과의 첫 번째 페이지에 실린 게시물들을 클릭하여 살펴보겠다. 박가분의 말대로라면 이 게시물들은 모두 근거 없는 남성혐오가 표현되어야 한다.

캐나다에 있는 내 검색 결과는 이러하다. (1) 한남충과 만나 어이없는 일을 겪은 이야기, (2) 아빠라는 인간에게 폭행당한 이야기, (3) 워마드의 한남충 만화, (4) 예능 프로 스크랩, (5) 한남충 조롱, (6) 아빠라는 인간이 여자 끼고 술 마시다 걸렸다는 이야기, (7) 뉴스 댓글 스크랩, (8) 뉴스 댓글 스크랩, (9) 한남충 조롱(자작 만화), (10) 위안부가 자발적이었다며 피케팅 하는 아저씨 사진

댓글 스크랩이란 이런 것을 올리고 한남충이라 욕하는 것을 뜻한다.

댓글 스크랩이란 이런 것을 올리고 한남충이라 욕하는 것을 뜻한다.

세 개의 경험담과 네 개의 스크랩과 세 개의 현상 비판 및 조롱으로 나뉜다. 실체적 대상이 불분명한 것(만화 등)을 모두 ‘나쁜 폭력’으로 분류해도 70%가 이유 있는 폭력이다. 내가 접한 메갈 발 게시물의 많은 비율 역시 스크랩과 자신이 겪은 여성혐오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떤 분께서 최근에 올린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았다. 그분이 메갈리아에 매료되었던 건 한 게시물 때문이었단다. 성폭행 피해자가 쓴 그 글은 ‘메갈에는 내 이야기를 해도 도리어 날 욕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항상 2차 가해를 받았지만 메갈에서는 그를 위로하고 가해자를 욕해줬단다. 물론 여기에도 가해자를 까면서 그 한남충 재기시켜라 등의 ‘폭력적인 어휘’를 사용했을 것이다.

또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소위 미러링 게시물. 원본이 존재하는 패러디 소설이다. 이것들은 열심히 캡처 당해 돌아다니며 메갈을 비난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좆린이’ 게시물을 올린 사람은 신상이 털리고 문자로 메신저로 온갖 쌍욕을 다 먹었는데, 그 자신이 아동 성폭력 피해자였다. 자신을 괴롭혀온, 현실에서 유통되고 힘을 가진 로린이라는 단어는 건재하지만, 자신이 좆린이라는 가상의 단어를 만들자 다들 정의봉을 깎아 들고 마녀사냥을 나섰다고 한다. 방파제에서 한남을 밀어 죽였는데 안 걸렸다는 게시물은 일베에 올라온 여성을 죽이고 방파제에 던졌는데 안 걸렸다는 게시물을 미러링 한 것이었는데, 경찰은 해당 유저에 대해 즉각적으로 수사를 시작했고 일베는 아무 일 없었다.

메갈이 비판 당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소수자 혐오이다. 팟캐스트 <이이제이>에서는 이 점을 들며메갈의 실체를 알라한다. 여성혐오가 철철 넘치던 <시사대담>의 헌정방송을 자임하는 그들의 낮은 수준을 잠시 참고 알아보자. 메갈 초기, 소수자 혐오가 논란이 되자 메갈은 공지를 올려소수자 혐오 금지. 싫으면 중이 떠나셈.이라 말했고, 그래서 떠난 중들이 워마드이다. 그러니 소수자 혐오를 이야기하며 메갈을 언급하는 것은 정의당도 NL이란 이야기나 다름없다. 6.25 및 베트남 참전군인 비하를 박가분 메소드로 살펴본 결과는 한국군 위안부 등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6.25 메갈’ 검색어로 이미지 검색을 했을 때 나오는 캡처 이미지는 전부 워마드이다. 그래도 이것은 마법의 키워드, 메갈이다. 익숙한 낙인 찍기다.

물론 메갈에는 밑도 끝도 없는 욕설들도 많다. 특정인을 향한 명예훼손도 발생했다. 난 메갈의 모든 폭력이 옳은가 그른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메갈의 폭력성이 다른 수많은 폭력과 동등한 수준의 공정한 평가의 과정을 거쳤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 폭력을 평가하는 시선이 너무나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모든 특질이 그러하듯, 메갈이라는 폭력도 품평의 대상일 뿐이었다.

남혐은 없다

메갈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또 다른 입장은 ‘난 여혐도 싫고 남혐도 싫다’이다. 팟캐스트 <신넘버쓰리>의 남태우 씨나 여러 진보적 매체의 기고들이 그러하다. 모든 혐오는 나쁘니 싫다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사고를 멈추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남혐이란 무엇인가? 그 이전에 혐오란 무엇인가?

남혐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의견을 접할 때 내 생각은 이렇다. ‘아… 증말… 혐오 당해본 적도 없는 유리 심장들이 혐오 걱정하고 앉아 있네’. 혐오는 단순히 듣기 싫은 이야기나 욕설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혐오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상대적 강자로부터 소수자를 지키기 위함이다. 소수자들은 구조적 착취나 부당한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며 이는 지금도 실재하기 때문이다.

인종혐오, 동성애혐오, 트랜스혐오, 장애인혐오 등 혐오를 붙여 만든 합성명사들의 앞부분은 모두 소수자 집단이다. 아무 단어에 혐오를 붙인다고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정치인과 재벌을 싫어하는 감정이 넘치더라도 정치인혐오, 재벌혐오란 말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상대를 비판 혹은 비난하는 것이 혐오라 정의한다면 <나꼼수>는 혐오를 조장하는 방송이었고 민주화운동도 혐오에 기반을 둔 활동이었다. 어떤 정치적 의견에 반대한다면 다 혐오가 될 것이다. 혐오는 그런 게 아니다. 다수 집단의 언어와 사고가 소수 집단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할 때 그 사고와 언어는 혐오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무조건 비판받아야 마땅한 폭력이 되는 것이다.

남혐이란 수십 년이 지나도 그런 힘 한 터럭도 얻을 수 없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사이버 언어폭력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남혐을 우려하는 것은 언젠가는 소멸할 태양의 수명을 걱정하는 것과 같다. 합성명사로서 남성혐오는 존재할 수 없다. 내가 남자도 해보고 여자도 해보고 혐오도 당해봐서 아는데, 한국 남성 집단 일반은 혐오의 대상이 될 일 절대 없으니 걱정 붙들어 매시기 바란다.

한국 트랜스젠더의 직업군은 성 산업, 막노동 등에 편중되어 있다. 케이블 TV에서 1회만 방영된 트랜스젠더판 미녀들의 수다는 엄청난 항의 전화로 편성이 취소되었다. 평등한 교육의 기회와 직업선택의 기회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거부당해 박탈당한다. 그런 유리천장쯤은 있어줘야 혐오다. 혐오를 당해본 적도 없으면서 혐오를 언어폭력과 동일한 개념으로 정의하고 벌벌 떠는 사람들, 한심하다.

남성혐오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허상에 불과한 남성혐오를 여성혐오와 등치 시켜 모두까기를 시전하는 것은 저울이 없거나 저울을 볼 수 없거나 볼 생각이 없거나 볼 줄을 모르거나 핑크색 코끼리 탈을 쓰고 있단 소리에 불과하다. 겨우 1년 전에 생긴 메갈의 언어가 폭력적이라고 그것을 혐오라 규정하며 유구한 역사를 가진 실존하는 여성혐오와 대칭 시키는 일은 심각한 지적 태만이다. 혐오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다. 혐오가 뭔지도 모르면서 욕 좀 먹은 것을 혐오라 정의하는 자들이여, 제발 그 입 닥치라. 왜 항상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그 티셔츠는 나쁜 티셔츠인가?

쉽게 품평 당한 메갈은 쉽게 휘두를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었다. 메갈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메갈의 주장과 비슷하기라도 한 의견을 내는 것은 메갈리안이라는 것이고 그 의견이 무엇이든 무시해도 좋은 것이 된다. 메갈에 대한 평가는 ‘저 빨갱이에서 파생된 새로운 빨갱이가 파는 하얀 굿즈를 사는 것을 보니 당연히 빨갱이인 넌 계약을 해지 당해도 되고, 그 빨갱이를 지지하는 만화가도 빨갱이구나. 거 글 쓰는 분도 빨갱이요?’ 수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다.

저 티셔츠는 해로운 티셔츠다

저 티셔츠는 해로운 티셔츠다

메갈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메갈리아4가 페이스북 코리아를 상대로 한 법정 비용 마련을 위해 판매한 티셔츠는 메갈에 대한 평가가 그러했듯 손쉽게 ‘나쁜 티셔츠’가 되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메갈리아4가 올린 모금 비용의 사용처에 ‘메갈리아 활동 중 법적 분쟁에 휘말리신 분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메갈리아4는 150만 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웬걸? 1억 3천만 원이 모금된 것이다. 애당초 이 추가 모금액에 대한 용처가 있던 게 아니다. 예상도 못 한 큰돈이 생겼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슈킹하거나 우왕좌왕하거나. 메갈리아4의 운영진들도 분명히 당황했을 것이다. 그리고 회의를 거듭해 용처를 정했을 것이다. 그 모금액은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 집행된다 했다. 신청서를 보내면 심사를 통해 지원을 결정한다 했다. 애당초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마녀사냥을 시작했다. 기나긴 공지에서 단 한 단어, ‘메갈리아’ 때문이다.

메갈리아4 운영진들은 다시 공지를 올려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은 제외한다고 뜻을 명확히 했지만, 마녀사냥은 멈추지 않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모금액의 사용처는 페이스북 코리아를 상대로 한 고소 비용과 어려서부터 아빠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여성의 소송비용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 티셔츠는 나쁜 티셔츠이다. ‘메갈리아 활동’이란 앞서 살펴본 바대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수익금의 용처를 자세히 밝혔지만 이미 군중은 빨갱이를 지원하는 혁명자금으로 결론지었다. 메갈과 워마드의 모든 악행과 악행으로 보이는 것 모두가 이 티셔츠에 투영되었다. 이 ‘나쁜 티셔츠’를 인증한 김자연 성우는 그의 경력에 큰 타격을 입었고 게임회사에 다닌다던 한 여성도 직장을 잃은 것으로 알고 있다.

손쉬운 정의구현은 이름부터 정의인 정의당에서도 벌어졌다. 진보적인 신문, 팟캐스트, 트위터 인사들 등등, 모두가 아무 생각 없음을 인증하지 못해 안달이다. 모두가 빤쓰를 내리고 빨갱이 사냥을 하지 못해 안달이다. 그 종북몰이, 어디서 배워왔는가?

왜 여성에겐 저항의 한 방법으로 선택 가능한 폭력이란 것이 허락되지 않는가? 그게 고작 언어폭력인데 말이다. 인터넷이 보급되던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인터넷에는 여성을 향한 언어폭력이 항상 넘쳐났는데, 남성을 향한 언어폭력을 시작하자마자 철저하게 배제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 폭력을 촉발한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가? 왜 자세히 알아볼 생각은 안 하고 모든 것을 한데 버무려 낙인을 찍고 사냥을 하는가? 왜 메갈은 일베를 평가하던 수준 이하의 잣대로 품평 당하는가? 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나가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왜?

페미니즘은 성평등이나 비폭력 따위의 좁은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왜?’라는 질문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살고 있는 남성 중심적인 세계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1900년을 당연한 듯 살아왔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이다. 왜 메갈 빨갱이 타령하는 팟캐스트 진행자들은 다 남성일까? 왜 여성이 진행하는 인기 팟캐스트를 찾기 어려운가? 그건 여성이 팟캐스트를 진행하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왜 재미가 없을까? 그렇게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자들도 그것이 익숙하지 않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흔히 남성은 죽기 직전에 철 든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은 일찍 철 든다 한다. 그건 생물학적 남녀의 차이일까? 내가 호르몬 맞아봐서 아는데 차이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게 인간의 성격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크지는 않다. 우리 사회가 남성과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언어에도 스며들어있다. 왜 ‘여자답다’와 ‘남성스럽다’는 없을까?

‘~답다’는 항상 긍정적인 자격 획득의 언어인 반면 ‘~스럽다’는 대상을 평가하는 언어이다. 오로지 남성만이 긍정적 남성성을 가질 수 있으며(남자답다) 심지어는 여성적인 속성도 가질 수 있다(여성스럽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긍정적인 여성적 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A는 정말 여성답구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어의 세계에선 여성성은 평가의 대상이며 남성성은 불가침의 영역이다. 심지어 ‘여성스럽다’는 문법적 예외이다. ‘OO스럽다’는 OO에게는 쓰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스러울 수 없으며 촌은 촌스러울 수 없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스테레오 타잎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여성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여성스러움을, 남성은 자격습득의 의미인 남자다움을 교육받는다. 사회가 용인하는 남성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다양한데 여성은 그렇지 못하다.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에 의해 좁은 틀에 맞도록 길들여진다. 철도 일찍 들고 개드립도 잘 못 치고 비판도 잘 못 하고 어둠의 다크도 찾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는 재미가 없다. (L살롱 사랑합니다.) 설치고 떠들고 말할 기회를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박탈된 기회 위에서 더 많은 기회를 허락받고 자유롭게 떠드는 팟캐스트 진행자들이 메갈이란 이름의 빨갱이 사냥에 나서는 것은 비극적 코미디다. 우리 세계는 여성혐오 위에 세워져 있다. 아무도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두 개의 사진 중 하나는 웃음을 주었고 하나는 당사자가 사과해야 했다.

이 두 개의 사진 중 하나는 보는 이들이게 웃음을 주었고 하나는 당사자가 사과해야 했다.

질문을 통해 답을 찾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행동을 할 것이다. 누군가는 사회 운동을 할 것이며 누군가는 글을 써서 설득을 시도하겠고, 누군가는 푸코를 인용하며 논문을 쓸 것이고 누군가는 체계적인 정리를 시작하고 누군가는 소리칠 것이다.

“씨발 좆같네?”

이것도 페미니즘이다.

마치며

메갈은 빨갱이다. 여성혐오는 공격하기 편리한 것들을 모두 한데 뭉뚱그려 메갈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으로 발현되고 있다. 페이스북을 하다 보면 페미니즘적 시각을 가진 게시물에 ‘난 메갈리아가 싫어요’라는 댓글들이 달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정작 본문에는 메갈은 언급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내가 신경 써줄 이유는 없지만, 자칭 진보라는 인간들의 뇌가 우동사리화 되는 것은 보아 넘기기 어렵다.

그들은 말한다. 여성혐오 문제는 문재인이 당선되면 나아질 것이라고. 좆 까라. 강남역 사건을 혐오범죄라 정의하기를 거부한 표창원이 있는 당이 집권한다고 뭐가 나아질 리 없다. 청년 비례대표 남녀 순번을 억지로 뒤바꾼 당이 집권한다고 뭐가 나아질 리 없다. 저출산 대책이 여성정책의 절반인 정당이 집권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바꿔야 할 것은 정권이 아니라 종북몰이를 하는 당신의 머릿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