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갔다 해

나의 첫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는 내가 섹스 경험이 없다 하자 나보고 “버진virgin”이랬다. 그리고선 빨리 누굴 사귀어서(섹스를 하건), 아니면 원나잇이라도 할 것을 권유했다. 내가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누굴 사귀지도 원나잇을 하지도 않자, “젊을 때 팔아야지,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자기일처럼 나를 걱정해줬다. 내가 경험한 (주로 게이들이 많은)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섹스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기서야말로 성욕은 “인간의 본능”이었고, 우리야말로 “본능”을 괜히 점잖은 체 하면서 터부시하지 않는 솔직한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떠오른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연애를 꽤 오랫동안 했는데, 애인과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애인은 섹스를 할 생각이 없는 것 같고, 본인도 굳이 애인에게 섹스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은 성욕이 있지만 자위로 푼다고 했다. 주변이들은 그 커플을 매우 신기하게 봤다. 당시 우리는 성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사람들이(어야 했)기 때문에 그 커플이 성을 너무 보수적으로 바라본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서로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지 않을까 조언했었다.

나에게 빨리 연애를 하라고, 그렇게 아꼈다 어디에 쓸 거냐고, 왜 집이 비었는데 원나잇을 안 하냐고, 한심하다는 표정과 말투로 조언을 해줄 때면, 웃어넘기며 참 지겨웠다. 반면에 성을 죄악시 여기는, 특히 동성애혐오가 있는 이들과 있을 때에는 각자의 사적인 성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섹스를 하지도 말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살기! 지금 사회는 점점 더 성, 섹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성욕은 인간의 본능이 되고, 성욕이 없는 것은 신체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섹스를 원하는 것이 정상인 사회. 이성애 중심적인 시선을 벗어난 게이들도 연애를 하건, 가족을 구성하던 섹스는 매우 중심에 놓여있는 것 같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되기도 한다. 동성간의 섹스를 금지하려는 것들에 맞서다 보니.

섹스에 대한(혹은 성욕에 대한 공감의) 끊임없는 강요를 막기 위해, 자신은 성에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무성애자야.” 라고 말하는 것보다, “난 성에 대해 보수적이야. 결혼하기 전까지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라고 말하는 것이 편리할 수 있다. 성이 매우 사적인, 그래서 아무도 묻지 않는 것이 되어야 편안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성에 대해 언제나 쉬쉬하는 세력에 반대했다. 그들은 성을 죄악시 여기고, 순결을 강조하고, 그러면서 적당한 이성애는 찬양하고, 내 성애는 억압했으니까. 그러면 무성애라는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성 보수주의와 싸워야만 하는 나의 게이 정체성과 부딪힘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나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연애나 섹스 둘 다 그리 급하지 않다. 보통은 연애나 섹스에 안달이 나야만 정상으로 봐주는 것 같다. 어떤 이는 그런 나를 “무성애자”라고 농담처럼 칭하기도 한다. 물론 이건 게이 커뮤니티 이야기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가득한 일반들 사이에서, (커밍아웃한) 나의 “연애와 섹스에 대해 안달하지 않는 성질”은 안심을 불러온다. 나에게만 성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

둘이 섞어서 지금 하는 거에 반씩만 덜/더하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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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민

1.

연애를 한동안 하지 않은 적이 있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욕망도 없었다. 가끔 습관처럼 “연애하고 싶어”라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단지 습관이었던 것 같다. 그땐 섹스도 하지 않았다. 욕망이 없었다. 너무 피곤하고 불편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시기동안 가끔 나에게 묻곤 했다. “나는 무성애자인 걸까?”

이 질문을 그 시기동안 꽤 많이 이야기했고, 꽤 많이 다른 이에게 물어보곤 했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언제나 조금은 이것이 옳지 않다고 느꼈다. 이런 식의 질문이 정말로 맞는 질문이 아니라고 느꼈다.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은 이게 아니며, 내가 정말 해야 하는 질문도 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이 질문이 회피하기 위한, 무언가를 덮어버리기 위한, 그리고 그 무언가가 덮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그 무언가는 아마 나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위 ‘정상적인’, 혹은 ‘평범한’ 그런 연애, 알콩달콩, 지지고 볶고, 감정이 얽히고설키고, 그러다가 정이 들고, 그러는 연애 속에 스며들 수 없는 혹은 스며들기 힘들어하는 인간이다. 누군가가 편지로 ‘진심’1을 전하고자 하면 그것은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하며 ‘전형적인’ 연애 관계에 흡수될 수 없는, 그렇지 않은 관계가 나에게 맞고 필요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언제나 불안했다. 왜냐하면 내가 전형성을 간직한 연애를 전혀 욕망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이 세상의 일부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원하는 측면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런 욕망을 세상이 심어준 부정적인, 내 것이 아닌 무언가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정말.

하지만 욕망하는 것과 자신에게 맞는 것은 다르듯이 전형적 연애를 일부분이나마 욕망하지만 그곳에 스며들 수 없는 자신을 매번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괴롭다. 패배감이 피어오르게 된다. 불안해진다. 자신이 망가진 인간은 아닌 건지 의심하게 된다. 이런 의심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왔고 연애도 섹스도 하지 않았던 몇 년 동안의 그 시기는 그 의심을 거의 확신처럼 가지게 되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망한 것 같다고 느꼈다. 우울한 웃음소리마저 터져 나올 수 없는 그런 망함 말이다.

3.

그런 와중에 “나는 무성애자인 걸까?”라는 질문이 나왔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 질문은 몇몇 가정들을 전제로 하고서 나왔던 것 같다. 그 가정들은 1) 무성애자는 전형적 연애관계나 섹스에 있어서 거리를 두는 사람이다. 2) 만약 내가 무성애자라면 3) 타인과의 어떤 전형적 관계를 욕망하지 않아도 ‘괜찮다’ 4) 고로 나는 망가진 인간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을 긍정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부였지만 그것을 위해 ‘무성애 정체성’을 빌려와 썼던 것 같다.

특히나 내가 동성애자 정체성을 지니게 된 과정을 다시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고, 그러다 언어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언어들을 자신에게 대입해보고, 자신에게 꼭 맞는지 아닌지 이리저리 끼워보고, 그러다 어느 정도 맞는 언어-동성애자-를 발견하고선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 맞지 않는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언어를 버릴지 말지, 아니면 고칠지 새롭게 재의미화할지 고민하게 되는, 그러한 일련의 과정의 일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도 든다. 어쨌든 지금 나는 나를 무성애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 당시에 그렇게 질문이 터져 나왔던 것은 기존의 연애 관계(섹스를 포함한)에서 벗어난 어떤 존재를 상상할 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무성애자뿐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런 식으로 질문하게 된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라는 이름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런 관계, 그 관계를 부를 이름이 없었던 나에게 무성애자는 그 관계에서 벗어난 이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가왔던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다.

4.

어쨌든 나처럼 전형적 연애 관계에 흡수될 수 없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이들을 부를 이름을 찾는 고민을 나누고 싶다. 꼭 불러야 하는가? 라는 의문도 있긴 하지만, 한 번은 불러보고 싶다. 몇몇 대안적 연애관계 혹은 정체성을 부르는 이름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 중에서 내 것이라고 느끼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망가진 인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 망가짐이 현재의 나의 일부이고, 나는 그것을 긍정하고 싶다. 어쩌면 말이다.

 

주석1_ 진심은 성급하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전해진다. 보통은 그 진심들이 너무 성급하기에 화가 나고, 또 어떤 면에선 나 자신이 사랑이라는 것을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들의 진심이 너무 하찮게 여겨지기 때문인 것 같다. 어딜 함부로 그 얄팍한 감정을 사랑으로 부르는가? 와 같은 것일까. 그건 그렇고 편지라는 방식도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편지로 진지한 이야기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건 정말 ‘투척’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받을 수밖에 없는 이는 혼자 전전긍긍하며 그걸 갈무리하고 수습해 새롭게 던져야만 하는 부담감을 짊어지게 되는데,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참 시답잖은 걸 설명하느라 주석을 길게도 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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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경험이라 말하지 마라

자, 완전 변태 무성애 세미나 시작. 우리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해볼까? 왜? 왜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해야 하지? 왜? 나의 섹슈얼리티 역사에서 유성애적이지 않은 것을 찾아 늘어놓을 수는 있겠지만, 대체 왜? 무성애자가 아닌 나의 무성애적 역사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정체화하지 않았으면, 입 다물어! 라는 말로 들릴 수 있는 거친 질문이지만 해야겠다. 나는 스스로 유성애자라고 정체화하지 않았다. 나의 성애는 무성애라는 명명을 통해 설명을 요구당하지 않는다. 무성애자라고 정체화하지 않기 때문에, 내 삶의 한 경험으로 무성애를 말하고 싶지 않다. 무성애자로 정체화하는 삶은 단순한 경험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은폐된 경험을 드러내면서 ‘정상’의 허구성을 폭로할 수 있는 가치를 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함부로 경험이라 말하는 것은 오히려 잘못된 권력관계만 공고히 한다.

너의 경험과 나의 정체성

대학에 와서 처음 기웃거렸던 운동단체에서 동성애 세미나를 한다고 했다. 차마 내가 커리를 준비한다고는 하지 못하고, 조심스레 세미나를 기다린다. 두근두근.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정작 말을 한 것은 이미 공인된 이성애 커플의 경험담: 나는 중학교/고등학교 때 친구와 우정으로 명명될 수 없는 관계를 가졌었다, 이는 모두에게 있는 경험이다, 동성애는 보편적이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한다. 그리고 나는 한 마디도 안/못했다. 이성애자의 정체성을 공고히 해주는 안전장치(여자친구/남자친구라고 명명되는 존재)를 끼고서, 그들은 동성애적 ‘경험’을 말했다. 그들의 경험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동성애적 경험의 발화로 그들의 위치나 권력이 변화하지 않는다. 당시의 상황과 주변인들의 관계는 그러했다. 그들은 여전히 이성애적 안전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동성애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공고한 이성애자로서의 위치/존재에 대한 부정을 겪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경험’이기 때문에, 동성애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에 경험적 근거를 내놓을 수 있다. 자신의 권력적 위치에 대한 성찰 없이, 경험적 근거로 그들은 토론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나는 내 첫 연애를 동성애 경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내 정체성에 대한 자각의 시기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 사건에서 시작해 나의 역사를 설명해야 한다. 나는 나도, 중학교 때 그런 경험이 있었어요, 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건 레즈비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읽히기 십상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여성은 밤샘 수다에서 자신의 레즈비언 경험을 고해성사했다. 그리고 거듭하여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지금의 남성 파트너와 얼마나 행복한지 거듭 강조했다. 듣고 있던 다른 여성은 처음에는 혐오, 그리고 거듭된 반성이 이어지자 눈 앞에 있는 ‘이성애자’을 토닥여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경험은 이렇게 자신의 현재 상태와 분리되는 해프닝으로 정의된다. 지금의 상태가 되기까지의 과정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정체성을 확정하기 위한 반대급부로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경험 말하기의 중요성은 유효하다. 각자의 경험은 말해지는 것만으로도, 어설픈 정상에 균열을 만든다. 그리고 최소한 동성애적 경험을 우정으로 다시 포장하는 쓸모없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노력한 것이라고 칭찬하고 싶기까지 하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보편적이라 함부로 입놀리는 것은 참지 않겠다.

경험을 보편으로 만드는 거만

경험이 스펙이 되는 사회. 기아 24시에 참여하고, ‘오지’ ‘원주민’의 하룻밤을 보내고, 임산부, 장애인 체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놓고 새로운 경험을 위해 들개떼처럼 달려든다. 경험하지 못하면 공감할 수 없다는 핑계로 그들은 타인의 삶을 조각낸다. 그리고 그들은 정확히 자신들이 경험하고 싶어하는, 나중에 체험담으로 늘어놓을 수 있는 부분을 집어낸다. 그들의 일상에서 무시하고 넘어갈 것을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몸소 경험해준’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자신의 도덕적 수준을 높일 수 있다. 그리고 당사자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나도 알아, 나도 해봤는데. 그들은 자신의 시야를 넓혔다고 말하지만, 판단내릴 수 있는 범위를 확장했을 뿐이다. 이로써 판단의 주체로서 그들의 권력 또한 확장한다.

24시간 기아체험은 참가자들이 (그들이) 소외(시키는) 계층에게 더 많은 동정심을 가지고, 자신의 풍족함에 감사하기를 바란다. 장애인/임산부 체험은 (장애인/임산부의 불편함을 개선시킬 생각이 없는) ‘정상인의’ 일상적인 생활이 그들 앞에 놓여있는 것에 감사하기를 바란다.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불편함을 일부러 제공함으로서 자신의 삶에 만족시키는 것은 구분짓기를 공고히하고 배타성을 높여 그들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유지시키도록 하는 것이다.일정한 수위의 경험은 백신과도 같다. 소수자 감수성을 바이러스로 여기는 사회는 신체에 타격을 가하지 않을만큼의 백신을 주사해넣고 차별에 대한 면역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이제 사회적 차별에 대해 동정심을 쏟아내는 것으로,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나 변화없이 일상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권력적 위치에 대한 성찰을 전제하지 못한 타인에 대한 이해는 이렇듯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 관망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자신의 경험을 보편이라고 말하는 권력, 그것을 통해 타인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한 권력. 나의 경험으로 반드시 너의 경험을 아우르겠다는 혹은 이겨먹겠다는 그들의 태도는 그들의 경험으로 차별을 공고히 한다. 당신의 경험을 보편적 기준/근거로 내세우지 않는다면, 그걸 위해 성찰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런 당신과는 경험에 대해서 나누고 싶다. 그래서 말을 돌고 돌아, 완전변태의 경험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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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성애

에이섹슈얼인지,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을지 고민할 때, 성욕이 없다는 상태, 성욕의 없음은 항상 논란이 된다. 무엇으로 없음과, 없음에 가까운(없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태를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이른바 확실한 기준과 판단을 통해 자기가 무성애자임을 안다고 해도, 그것은 정체화와는 다르지 않을까. 왜 나 자신에게서 없지 않음을 찾아내려 애쓰는지 생각해봤다. 기준에 집착하고 매번 되돌아가는 것. 도망가려는 이유.

막연히, 보통사람처럼 살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섹스라는 것이 있고 모두 그것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내가 섹스를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츰 나는 보통의 삶을 살 수 없는 이유를 알아갔다. 나는 퀴어다. 그러나 바이섹슈얼이나 오픈섹슈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것들은 내가 아니었다. 나를 무엇으로도 설명해낼 수 없었을 때, 에이섹슈얼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그 단어를 자기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몇 번이고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고 싶어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이 있었고 연애는 시도하지 않는 편이었다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한두 번 이후에, 그들과도 에이섹슈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꺼려졌다.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길었다.

질문 몇 개를 던져 에이섹슈얼 전부를 알려는 자들에게 짜증이 났다. 커밍아웃이 나를 생소한 집단의 대표자로 만드는 듯이 느껴졌다. 퀴어 안에서 에이섹슈얼을 어떻게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혼자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랐고, 그렇다고 누군가 그것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연애도 했다. 그리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면 훨씬 좋겠지만, 현재의 관계에 만족을 표하고, 위로하고,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성적 표현을 하고, 내 감정에 정면으로 반할 때가 있어도 노력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나. 나답고 싶은 마음. 그렇지만 어떤 게 나다운 행동인데? 보통에 대한 욕망. 보통을 요구받는 나의 행동.

내 마음이 다른 사람과 같은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우정과 다른 애정이 있다고 느끼며, 그것을 동시에 여럿에게 가질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섹스욕구가 있고 그것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라 해도, 나는 그렇지 않다. 작은 것들에서 아주 많이 마음이 맞다 해도 나는 섹스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그들과 차차 소홀해지게 되어 있다고도 생각했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사랑의 환상들. 의존하는 것, 보상받으려고 드는 것, 어리광, 틀에 점차 익숙해져가는 것, 보통의 유성애자로 나를 속이기 더 쉬워지는 것은 해로울 수도 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결국 누군가를 연속적으로 실망케하고 거짓말하는 것. 그렇지만 에이섹슈얼간의 관계맺음이 더 만족스러울지 나는 알지 못하고, 궁금하다.

나는 질문에 항복해버린다. 힘들지 않았던 적이 훨씬 많이 있다. 그것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든 (혹은 섹드립을 하든) 그러려니 잘 넘겨주는 편이거니와 침묵하는 쪽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플라토닉이라는, 플라톤이 연상되는 이상한 단어를 내게 내밀지만 그럴 경우 그들은 나를 혐오하고 있지 않다. 위협적이지 않으며, 흉악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괴상한 벌레에게 생길 법한 호감과 호기심 같은 것을 내게 품는다. 그들을 나는, 나 혼자서는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버렸다. 나를 알지만 내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이들이 고맙다. 아무것도 함부로 묻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마음이 고맙게도 느껴진다. 고마움으로 그치는 건 너무 이른데도.

어떤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 중 누군가는 성욕이 없다고 내게 이야기했던 적이 있고, 연애를 목적으로 다가오는 타인들에게 거리를 두는, 그리고 연애 실패를 자주 스치듯 언급하는 사람이다. 공공장소에서 섹스를 크고 또박또박하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면서 경박한 손동작 (아마도 헤테로섹스, 거의 비하하는) 을 하는 것은 그가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연애욕망이 없을까. 연애욕망과 성애는 어떻게 다를까. 연애욕망을 새로이 정의내려야 하고 구체적 인간에게 향하지 않는 모든 성애를 다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에이섹슈얼이란 정말로 무엇일까.

에이섹슈얼 개개인이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를 수 있다. 개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 무엇을 찾아냈건, 무엇을 정리했건, 에이섹슈얼의 원인을 찾는 것은 부질없 (으며 만약 누가 설명을 요구했다면 거부하는 게 맞) 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에이섹슈얼을, 타인을 통해야 할 성적 욕구가 없으며 연애를 부추기는 사회 그리고 연애관계에 대해 언제나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섹스를 원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이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 글에서 내가 에이섹슈얼을 정의내릴 수 없다 할지라도, 에이섹슈얼로 정체화한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내게 정체화란, 자기자신을 살펴보고 스스로 내린 생각, 치료 당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 이대로도 좋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어쩌면 정체화하는 그 순간 이미 세상과 자기자신의 긴장을 충분히 느끼는 것. 그러한 정체화와, 어떤 구체적 기준을 통해 질병을 진단받듯 에이섹슈얼임을 알게 되는 건 매우 다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에이섹슈얼보다 안티섹슈얼로 쓰기도 한다. 판단 가능한 상태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누군가의 의지와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다. 무성애보다 비성애라고 표현하는 편이 적절하다고도 생각한다. 성애를 영(0)이라고 쓰는 건 이상하기도 하고 역시 오해를 부를 때가 있다.

혼자서는 자긍심을 찾을 수 없다. 나는 자긍심 가득한 비성애자의 기록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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