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을 물어봐2: 미궁속의 커밍아웃

“난 남성의 몸을 갖고 태어났어요. 한 번도 스스로를 남성이라고 적극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이 20년 조금 넘게 살았어요. 그러다가 비수술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난 너무도 반가웠어요.
하지만 당장 그 말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어요. 여성으로 태어나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 앞에서, 당당하게,‘나도 여성이에요’ 하고 말할 수 없었거든요. 결국은 남자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홧김에야, 그 말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나는 여성이에요, 라는 말은 아직도 서툴러요. 그러니 이렇게 말할게요. 여성으로서 살고 싶어요. 다른 여성들이 나를 여성으로서 대해주면 좋겠어요.(마초님들은 사실, 나를 안 대해 주는 게 제일 좋아요.) 다른 여성들이 나를 여성으로 대할 수 있도록, 정말로 여성에 가까운 여성이 되고 싶어요.
지금 당장은, 남자라고도 여자라고도 하기 애매한 그 사이 어디쯤엔가 있지만, 언젠가는 당당하게 ‘여자’라고 선택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 종종 물어 봐줘요, 나의 성별을.”

글 검토 회의를 하면서 너무 많이 생략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내용만으로도 글 한편이 나오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디 한편만 나오랴. 속에다 썩혀 둔 이야기를 꺼내자면 끝이 없는 것을. 그런데, 어쩐지, 저 이상은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묻어 둔 지 너무 오래 됐기도 하고, 자기 검열이 너무 많은 탓이기도 하다. 그 검열을 걷을 생각은 딱히 없다. 나의 정치적 신념에 따른 검열이었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트라우마에 따른 검열이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여자같다는 말이 참 좋았다. 어느 친구가 머리띠를 한 나를 보며 여자 같이 생겼다고 말했을 때도 좋았고, 또 다른 친구나 너는 여자 같아서 왠지 화장실도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을 때도 참 좋았다. ‘남자들’이라는 집단의 하나로 묶이는 것에는 언제나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그 그룹의 누구에게도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고. 그들 중에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그리고 양성애자가 있고 또 성정체성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성정체성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은 과학의 발전 덕에 성전환 수술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나는 나도 그냥 남자인줄 알았다. 내 몸이 혐오스러웠고 남성이라는 명명이 끔찍했지만 수술을 할 마음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그냥 독특한 남자려니 했다. 남자들이랑은 말이 통하지 않고, 여자친구들만 그득하고, 가만히 둬도 끔찍한 몸을 굳이 운동으로 다지고 싶지 않은, 뭐 그런 독특한 남잔줄로만 알았다.
이성애자가 아닐 거라는 생각은 어렴풋이 했다. 여성에 대한 나의 성애는 동질감에 기반해 있었다. 몇 안 되는 여성을 사랑하면서, 그들을 ‘이성’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거기까지였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성이 아니라고 해 봐야, 그것은 동성도 아니었고 양성도 아니었다. 결국 그것은 이성애였다.
그러다가 알게 된 말이 비수술 트랜스젠더였다. 스스로의 신체가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른 성을 자신의 성별 정체성으로 삼으면서 성전환 수술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대학을 이미 반나마 다닌 후의 일이었다. 주사바늘이 싫은 사람도, 매스가 싫은 사람도, 그리고 자신의 성별을 몸으로 증명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비수술 트랜스젠더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도 꽤나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불러도 좋을까,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그리고 레즈비언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선뜻 그렇게 선언하지는 못했다. 내가 정체성을 선택하도록, 그리고 선언하도록 만든 것은 애인의 입에서 나온 남자의 조건―내가 갖추어야 할 그 조건들을 들은 때였다.
남들이야 뭐라고 하든 웃어 넘기면 된다지만, 내가 사랑하는, 평생을 함께 할 사람에게만큼은 그렇게 읽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입장과 나의 입장이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말했다. 나는 비수술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살고 싶다고, 그렇게 나를 대해 달라고.
그리고나서 몇 번이나 말했을까. 내가 여성이라고,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아마, 한 번도 당당히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인과 싸우면서 몇 번쯤 입에 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맨정신에서 나는 여전히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홧김에 내린 결정이라서, 나의 선택에 자신감이 없어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접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앞에서 나는 차마 내가 여성이라고, 나도 여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겪고 있는 공포와 고통의 앞에서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남성공화국이라 해도 좋을 이 세상에서 20년 가까이를 남성으로 살며 누릴 것을 누리고 짓밟을 것을 짓밟아 온 내가 당신과 같은 여성이라고 나는 말할 수가 없다.
그냥 자격지심이다. 20년 가까이를 남성으로―아무리 소극적이었다 해도― 살면서 누릴 것을 누리고 짓밟을 것을 짓밟아 온 나니까. 아무리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한다고 해도, 생리통에서부터 성범죄의 공포까지 수많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고 못할 나니까. 두렵다. 나의 친구들에 대한 나의 동질감의 표시가 어쭙잖은 잰체가 될까봐 나는 입을 다문다.
트라우마에 따른 검열이다. 온갖 것을 누리고 살면서 나도 소수자야 라는 되먹지 않은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던 수많은 이들을 보며 내가 느꼈던 불쾌감. 나도 서민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이명박을 보며 내가 느꼈던 불쾌감. 그런 말도 안 되는 선언 앞에서 오히려 대상화되는 나를 보며 느꼈던 어이 없음. 내 친구들 또한 느꼈을 그 감정들을, 그 트라우마를 나의 선언이 환기시킬까봐 나는 두렵다.
나도 안다. 모든 여성의 경험이 똑같을 필요는 없고 똑같을 수도 없듯이, 나 또한 나만의 특수한 경험을 가진 여성으로 살면 된다는 것을. 다른 여성들 앞에서 나 역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된다는 것을. 수많은 오해들이 생길 수 있겠지만, 오해들이야 풀면 그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습다. 다른 여성들이 나를 여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럴 수 있을만큼 여성에 가까운 여성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때가 되면 더 당당하게 나는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우습다. 가까워 질만한 여성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여성이길 밝히기 이전에 누군가 나를 여성으로 대해주길 바라는 것도 요상한 발상이다.
그런데도 두렵다. 뭐가 두려운지 잘 모르겠는데도 여전히 나는 두렵다. 물론 내가 받은 트라우마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아무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은 착한 아이 컴플렉스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내어 준 것 이외의 선택을 이미 한 마당에서 상처 없이 그것을 인정받을 수 있기는 할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두렵다.
끊임없이 분열한다. 남성의 외양을 한 누군가가 내 앞에 와서 나는 여성이에요, 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가진 남성혐오나 남성공포의 적용 대상에서 그를 한번에 제외할 수 있을까. 사실 어쩌면 그것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못하니까 괜히 스스로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같은 여자끼리,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같은 여자, 가 존재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언제쯤 할 수 있을까. 내가 여성이라고 커밍아웃하는 것과, 여성의 문제에 쉽게 공감하고 같은 입장에서 말함으로써 신뢰를 얻는 것,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일까. 알지만 답을 말할 수는 없다. 실행하지 못할 테니까.
이렇게 패배적으로 쓰면, 사람들이 싫어하려나.

성별을 물어봐1

원래 제목은, 성별을 묻지마, 였다. 서울메트로의 시사회 이벤트에 응모하려면 몇 가지 정보를 입력해야 하는데, 그 중에 성별항목이 끼어 있다. 이름, 나이, 주소, 전화번호까지 스크롤바를 내려가며 주관식 항목들에 답한 후 나는 스크롤바를 다시 끌어올린다. 이름을 쓰는 칸 옆에 있는 성별 항목은 남자와 여자, 두 가지 중에서 고르도록 되어 있다. 어차피 뻔한 답을 고를 거면서도 나는 늘 고민한다. 반복되는 고민을 끝내면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 본 후 ‘여자’를 클릭하고 전송 버튼을 누른다.

괜히 주위를 둘러 보는 것은, 내게 페니스가 있기 때문이다. 또래 남자애들처럼 사춘기에 갑자기 키가 크거나 하진 않았지만 목소리도 그럭저럭 굵어졌고 수염도 나기 시작했으니 2차 성징도 웬만큼은 있었다. 소위 ‘여자같이’ 생긴 얼굴도 아니고, ‘여자같이’ 옷을 입지도 않는다. 앞으로도 그 속성들을 바꿀 생각은 크게 없다. 그런 꼴을 하고 앉아서 스스로를 여자라고 입력하는 모습을 남에게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곤란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입력 전에 고민을 하는 것은 누군가 볼까봐 두려워서는 아니다. 남자도 여자도, 내게 딱 들어맞는 성별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일단 스스로의 성별을 비수술 트랜스젠더로 생각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를 보통의 남자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성전환 수술에 마음이 동한 적이 없어서 그냥 ‘독특한 남자’ 정도로 생각해 오다가 지난 해에 내린 결론이 바로 비수술 트랜스젠더다.

비수술 트랜스젠더, 라는 말을 알게 된 것은 3년 쯤 전 학내 퀴어 동아리 소책자를 통해서였다.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해에 애인에게서 남자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의 일. 애인이 나를 남자로 대하는 것을 왠지 참을 수가 없어서, 약간은 홧김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끔씩 고민한다. 스스로가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지만, 과연 나를 여자라고 말해도 좋을까, 하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나는 늘고민한다.

사설이 길어졌다.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유독 객관식으로, 심지어 별 필요도 없으면서 매번 해대는 서울메트로 때문에 짜증이 나서 그런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심지어 여성주의 사이트들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니까. ‘남성’을 선택하면 여성 전용 페이지에들어갈 수 없고 ‘여성’을 선택하자니 괜히 사기치고 훔쳐보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니 어쩌면 서울메트로보다 심각한 건 그런 사이트들이다. 다만 서울메트로가 자주 물어보니까 서울메트로에 짜증이 날 뿐.

하지만 그렇게 글을 시작하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진짜 곤란한 건 묻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몇 번이나,도입부를 쓰고 지우다가 결국 포기하고 끄집어낸 것이 지금 하려는 이야기다. 진짜 곤란한 건, 묻지 않고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 나는 남성의 몸을 갖고 있다. 게다가 나는 여성과 꽤나 오래 연애하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남성이 아닌 다른 무엇일 거라는 생각을 하기 어려울 거란 걸 인정은 하지만(아마 나 역시 같은 상황에서라면 그러하겠지만), 그렇다곤 해도 놀라울만큼 아무도 물어 보지 않는다. 이성애자 친구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동성애자 친구들 역시 나를 당연한 이성애자 남성으로 전제한다.

여자 친구들이 나를 남성으로 생각하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행히 키도 작고 힘도 약해서, 그들과 있으면서 내가 남성적 역할을 맡을 일이 없는 탓이다. 그들은 나를 자신과 다른 성별로 생각하니까 대할 때 조심하기도 하고 말이다. 너는 남자니까, 라는 생각에 선을 긋는 경우가 있어 서운하긴 하지만 그건 불편하거나 불쾌한 성격의 일은 아니다.

문제는 남자들. 내가 자기들이랑 똑같은 줄 안다. 물어보지는 못 해도 눈치라도 채야 할 텐데, 도무지 그런 게 없다. 여자친구들은 너는 다른 남자들이랑 다른 거 같다든가 여성스럽다든가, 조금 가까이라도 가는데, 남자들은 도무지 그런 게 없다. 물론 그들 역시 나를 독특한 사람으로 보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당연하다는 듯 트인 곳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제치고 아무 때나 덤벼들어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역겹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다. 숙소는 당연히 남녀로만 나누면 되는 줄 아는, 그거면 충분한 줄 아는 관행도 나는 무섭고 사람 많으니까 한 번에 두 세명씩 같이 씻자거나 찜질방에 같이 가자는 말도 나는 무섭다. 물론, 쟤는 절대 누구랑 같이 샤워 안 하더라며 한 번 놀래켜 주기나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갑자기 샤워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공용 샤워실 문은 잠기지도 않는단말이다.

‘실천단’이라는 이름으로 단체 활동을 갔을 때였다. 어찌어찌 구한 숙소는 아직 세입자가 없는 어느 빌딩. 가게나 사무실이 들어올 넓은 홀이 한 층을 다 채우고 있고 층계참에 화장실이 있는 곳이었다. 그 화장실이 바로 샤워실. 설상가상으로 문고리가 고장나서 잠기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두 세명씩 들어가서 차례차례 다 씻은 후 새벽이 되어서야 나 혼자가 남았다. 잠가지 않는 문을 닫아만 두고 복도에 널부러져 있던 화이트보드를 옮겨다 바리케이트를 친 후에야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한참 씻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여는 거다. 화이트보드를 보고 이게 뭐지, 라길래 씻고 있어요- 라고 답했다. 물론 들어오지 말라는뜻이었는데… 그 사람은 그걸 쓱 밀고 들어오면서 이런 건 왜 세워 놨냐, 라고 내뱉고는 내 뒤에 있던 소변기에서 볼 일을 보고나갔다. 그가 그 일련의 행동들을 하는 동안 나는, 벗은 몸으로, 세면대 거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절대 그에게 물이 튈까봐 씻는 걸 멈춘 것은 아니다. 어이 없어서, 그리고 두려워서, 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뭐, 늘 그런 식이다. 남자끼린데 뭐 어때, 라며 어깨에 매달리더니 이자식 돼지네 라며 가슴을 주무르고, 남자끼린데 뭐 어때, 라며 되먹지 않은 음담패설을 찍찍 내뱉고. 나는 눈꼽만큼도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거기에 더해 불쾌감과 혐오감만을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서 근거도 없는 동질감을 느끼며 자기 편한 대로 해대는 거다.

사는 꼴이 그렇다보니, 성별을 묻지마, 라는 글은 도무지 써 지지가 않더라. 필요치 않은 영역에서 성별을 구분하는 것, 성별정보를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매우 강하게 반대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 물어봐 줬으면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드니까 말이다. 성별을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남의 성별을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더 나쁘다고 느낀다. 매일써대는 글이 아니니까, 더 나쁜 일을 까야지.

이 글을 읽고 누군가 공감할 수 있을까. 시각은 새벽 다섯시, 감정은 분노(?), 멀쩡한 글이 나올 리가 없는 터라 잘 모르겠지만, 사실 맨정신으로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문단 세 개만 죽어라 썼다 지웠다 했으니까.

내가 움푹이라는 이름으로 완전변태에서 글을 쓴다는 건 완변 멤버들을 빼면 내 애인밖에 모른다. 그런데 내 지인들 중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혹은 글쓴이가 누군지 한 번에 감을 잡고 내게 성별을 물어오면 나는 뭐라 답할까. 엄청나게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 제대로 답하지 못하겠지만(아우팅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알려줬는데도 나를 남성으로 대할 게 무서워서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뭐 물론, 아무도 안 물을 걸 아니까 하는 생각이다.

처음으로 말해 본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난 남성의 몸을 갖고 태어났어요. 한 번도 스스로를 남성이라고 적극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이 20년 조금 넘게 살았어요. 그러다가 비수술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난 너무도 반가웠어요.

하지만 당장 그 말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어요. 여성으로 태어나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도 여성이에요’ 하고 말할 수 없었거든요. 결국은 남자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홧김에야, 그 말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나는 여성이에요, 라는 말은 아직도 서툴러요. 그러니 이렇게 말할게요. 여성으로서 살고 싶어요. 다른 여성들이 나를 여성으로서 대해주면 좋겠어요.(마초님들은 사실, 나를 안 대해 주는 게 제일 좋아요.) 다른 여성들이 나를 여성으로 대할 수 있도록, 정말로 여성에 가까운 여성이 되고 싶어요.

지금 당장은, 남자라고도 여자라고도 하기 애매한 그 사이 어디쯤엔가 있지만, 언젠가는 당당하게 ‘여자’라고 선택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 종종 물어 봐줘요, 나의 성별을.

 

 

 

덧. 나를 그렇게도 괴롭히는 남자들 중에, 또 누군가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나는 슬프다. 나 또한 어딘가에,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나는 두렵다.

나는 왜 순수하게 분노할 수 없는걸까.


나는 왜 순수하게 분노할 수 없는 걸까. 이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어떻게 그렇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오늘은 노래를 팔고 내일은 또 나의 사생활을 팔아서 무대 위에 올라가는 이름뿐인 공인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연예계의 불공정 계약 논란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님에도 이것이 시정되지 않는 것은 방송에서 비쳐지는 이들의 호화로운 삶이 보여주는 신기루가 가지는 힘 때문일까. 아름답게 타오르는 불을 보고 뛰어들었다가 제 몸을 다 태우고 죽어버리는 부나방 같은 사람들은 정말 모든 것을 다 알고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돌아보면 나는 내 짧은 인생의 절반을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에 바쳤다. 나는 분명 위안 받고 쉽게 뜨거워졌으며, 그 순간의 열정으로 일주일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나는 많이 실망하고 나의 얕은 욕망에 자기혐오를 느꼈으며 쉽게 그만둘 수 없는 나의 나약함과 의존성에 또 다시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많은 아이돌그룹을 좋아했지만, 가장 정을 많이 주었던 것은 동방신기이다. 내가 왜 동방신기를 좋아하는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분명하지 않은 그 반짝거림에 하루살이처럼 홀린 것이겠지만, 그것으로도 그냥 좋다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동방신기의 세 멤버의 소송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다시 한 번 내 마음에 굳게 가두어뒀던 마음의 짐이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줄곧 마음에 병이 생겼었다. 좋아하는 것 자체가 병이 되는 로맨틱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감히 이들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로 고민하게 만드는 이상한 슬픔들이었다. 내가 무엇을 통해 이들을 소비하는 것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상실감들이었다. 몸속에 언어화되지 못한 문자들이 떠다니는 간질거림을 견딜 수가 없었다. 목까지 차올라온 죄책감. 아이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언제나 가볍거나 지나치게 무거웠다. 정말 그저 그런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쉽지 않은 그런 이야기들을 꺼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예계에서 6년간 활동을 해오면서 130억원을 벌었고,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니며, 전 세계에 80만이 넘는 팬을 보유한 동방신기.(극적인 상황 연출을 위해 SM의 엣지있는 언론플레이를 빌려왔다.) 이들은 누구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온전히 평가받을 수 있을까? 이들의 계약서는 말한다. 당신은 노예라고.


나는 이들이 겨우 3-4시간 이동하는 벤 안에서 쪽잠을 자가면서 수많은 방송에 출연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정말? 하드한 스케줄 속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자동차사고를 겪은 아이돌의 기사를 근래에 들어서 많이 본 것 같은 건 그저 착각일 것이다. 무대에서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심장이 움푹 패일 만큼 크게 숨을 들이쉬는 것은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공연을 하면서 떠돌아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유전적으로 폐가 약한 것이겠지. “요새는 계속 콘서트 준비를 하느라고 새벽까지 연습실에 있어서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지는 것 같아요.” 식사를 조절하지 않아도 여전히 스키니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천상 아이돌로 타고난 방송용 멘트라고 시닉하게 넘어가준다. 한국에서 활동한 정규앨범은 4개, 일본의 싱글 앨범은 28개. 원래 에이벡스(동방신기와 계약한 일본 매니지먼트사)는 격월로 앨범을 내게 하는 게 프로모션의 기본 방침인가봐. 그런데 말이야. 왜 난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너넨 언제 쉬어?” 동방신기의 세 멤버가 소송을 한 상황에서 그들의 모든 이야기들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고 언제든지 지지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가장 바라마지 않는 것이 바로 “해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라는 간절하다면 간절한 바람. 어쩜 이렇게도 기만적일 수 있을까. 이들이 권리를 되찾기는 간절히 바라지만 부디 그 강만은 건너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가능할까. 나는 나의 이기적인 바람이 가져오는 상실에조차 눈을 감으려 한다.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는 지쳤다.”고 말하는 것을 제대로 들은 것일까? “더 이상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일까?


이번 소송을 지켜보면서 가장 뼈아팠던 것은 아무래도 이번 소송의 본질이 “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알면서도 눈 감아 왔던 진실에, 궁금해 하지 않는 미덕으로, 그리고 쉽게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만큼의 얕음으로 가려왔던 무언가에 상처를 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13년이라는 계약기간이 아이돌로서의 종신계약을 의미한다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어떤 아이돌도 13년 이상은 존재할 수 없는 현실에 압도되는 것이다. 아무리 동방신기일지라도 천년만년 아이돌일 수는 없으니, 그럴 거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 보겠다는 아주 조금 영악해진, 살며시 저울을 재보는 그 모습에 서글퍼지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로서의 역량이나 스스로의 음악적 발전보다는 버라이어티 연예인으로서의 잔뼈만 굵었다. 연극배우도 아닌데 짙은 무대(광대) 화장을 하고 라이징선을 부를 때, 30대의 자신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할까? 누구에게나 미래는 두려운 것이겠지만, 대체가능한 아이돌의 세계에서 미래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비슷한 외모를 가진 아이돌의 몸에 다른 이의 얼굴을 오려 붙여도 가장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이 바로 아이돌 인형놀이의 속임수이다. 약간 어색하긴 해도 어느 순간 그것은 가장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되고 그 다음 순간에는 또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만 그 빈자리는 또 다시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아이돌멤버의 영입과 탈퇴를 시스템화하기도 한다. ‘졸업’이라는 고상한 단어는 이런 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대체가능의 아이돌의 세계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기의 소멸을 의미한다. 동방신기의 세 멤버들이 자신의 소속사에 “이렇게 소모 되고 싶지 않다.” 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연한 사형수와 같다.


대중에게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렵기 때문에 자발적인 혹사에도 견딜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 햄스터를 쳇바퀴에서 끊임없이 돌게 만드는 것은 사랑해마지 않는 주인의 애정의 방식이다. 연예계의 과도한 거품과 인기 몰이는 쉽게 사랑받고 또 쉽게 버려지는 연예인들의 존재 자체를 상쇄할 만큼 압도적이다. 애초부터 관심이 있는 것은 이들을 어떻게 키워서 어떻게 팔아먹고 어떻게 나이가 들기 전에 새로운 아이돌로 대체할 것인가라는 상업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일뿐, 그 안에서 쳇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 하나의 인격에 대해서는 쿨하게도 돈을 던져주면서 ‘이것이 너의 가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예를 판다’는 것은 지금에 와서는 정말 상고적의 일이 되어버렸다. 아이돌그룹은 자신들의 얼굴을 뜯어먹고 사는 팬들에 의해 유지 된다. 이들의 노래실력이나 댄스실력, 작곡 능력 같은 것은 부차적인 뿐이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이들의 가수로서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귀여운 말투, 겉으로 보여 지는 착한 성품, 아이돌 그룹 내의 친화도와 이들간의 애틋한 우정들이 더욱 매력적인 아이템이다. 이러한 연예산업의 구조와 팬들의 ‘모에’아이템1)들에 길들여진 아이돌그룹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비슷비슷한 이미지 변신들을 통해 매력적인 옆집 소년에서 섹시한 청년돌로, 그 다음에는 연기자로 분해 더 많은 나이대의 팬들을 보유하고,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버라이어티에 출연하면서 MC로도 변신을 하고, 그러다가 한 번씩 음반을 내서 트렌드에 맞는 노래와 춤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연기/노래/춤/버라이어티의 장벽이 견고하지 않은 시대에 이러한 구도가 이들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 한 번 연기하는 것처럼 노래하고 노래하는 것처럼 춤춰보고 춤추는 것처럼 버라이어티하면서 살아 보라. 이들 영역이 무너지고 재편된 것은 그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재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라기보다는 제작자의 편의와 연예산업의 수익구조의 문제이다.


이제 스물 셋이라 아이돌그룹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으니 연기라도 진출해보는 게 어때? 처음에는 다 시트콤으로 출발하는 거야, 지금 인기 있는 배우들도 다 처음에는 시트콤했어. 사실은 처음부터 2회 정도만 출연하기로 했었어. 첫술에 배부를 수야 없지. 넌 연기는 좀 아닌 것 같다. 이참에 버라이어티에 고정 출연하는 건 어때? 원래 버라이어티라는 게 다 그런 거야. 사생활도 좀 까발리고 그래야 시청률도 오르고 자극적인 의상도 좀 입어주고 섹시댄스도 좀 추고 그래야 되는 거야. 네가 언제부터 가수였다고 음반을 내달라고 그래, 요새는 팔리지도 않아. 그걸 다 아는 사람이 그래. 이번에는 새로운 시트콤이야. 이것만 잘 되면 새로 하는 월화드라마에 조연으로 넣어줄 수도 있어. 잘 해봐.


잘 팔리면 혹사시키고 안 팔리면 버린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연예구조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래’ 라고 대답해왔던 것일까. 왜 연예인들은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일까? 편의가 좋아서 그 어느 회사에서도 모두 통용되는 월급제라는 문명의 이기는 왜 이 산업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가장 리스크가 높은 것이 가장 수익률도 높아야 한다는 것은 언제부터 진리가 되었나? 우리가 지금 고삐 풀린 금융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들의 가치는 팬들에 의해서 결정지어 지는 것도, 연예산업에 의해서 결정지어 지는 것도 아니다. 이들의 가치는 언제나 임의적이고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리고 우리가 이건 내 일이 아니라고 그저 안타까워하기만 할 때 이들의 위치는 더욱 흔들릴 것이다.


그냥 좋아하면 안돼? 이런 고민들로 무엇이 변할 수 있을까? 그냥 다른 수많은 팬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아이돌가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으로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까?

굳이 ‘나의 위치는 어떠했나’, ‘나는 어떤 결정들을 해왔나’, ‘나는 무엇을 지지해왔나’ 생각해보자면 나는 항상 팬이면서도 팬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자리에 있었다. 좋아하면서도 나의 ‘좋아한다’는 감정에 엄격했고, 좋아하면서도 스스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비웃었고, 좋아하면서도 그런 것은 애정이 아니라고 잘라 말하면서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쉽게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런 애매한 위치에서 지금 ‘나는 왜 진심으로 분노할 수 없었는지’가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동방신기 팬들이 보여주고 있는 대처도 그저 안타까워하기만 하는 것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스스로를 진정한 팬이라고 칭하며 동방신기를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들은 그다지 순수하지도 영리하지도 않다. 팬의 진정성라는  그다든 것이 누군가를 위한 순수한 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이번 사태에서 팬들이 보여준 SM사와의 생사대적의 결투가 동방신기를 놓고 벌이는 소유권싸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연습생 시절부터 고이고이 키워왔으니 내 것이라는 사람이는 내가 줄곧 아끼고 좋아해왔으니 내 것이라는 사람이는 그 누구도 동방신기의 의견을 묻지 않고 있으니 이 어찌는 황당한 상황인지 객관적으로 물어보고 싶다. 팬들의 연예인에 대한 흥미는 것에한 영역들을 가진다. 스스로가 사랑하고 싶은 동이만을 사랑하고 믿고 싶은 동이만을 믿는 취사선택과 그것을 가릴 수 있는 순진한 열정, 그래서 항상 다치지 않을 수 있고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편하게 연예인을 좋아할 수 있으며 거기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잔인한 진실. 나는 어떻게 동방신기를 소비해왔나 이 소비가 동방신기어나지금전적인 이득으로 돌아갔나? 에 대한 반성보다는 내가 동방신기를 소비하는 것 자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동방신기의 소송을 지지하지만 해체는 원하지 않아요. 믿어요.’ 이 말에서 나는 이들이 진정으로는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이들은 진정으로 분노한 것일까? 지금 당장은 죽지도  동이 슬픈 팬일지사람이곧 있으면 햊지도 않다. 결국비하는이 내가 그동안 내 혼신의 힘지도다해 좋아해왔기 때문이든지 해체를 감당할 수 없는 나의 여림 때문이든지 그동안의 나의 소비가 이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괘씸함 때문이든지 이들은 진정으로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들의 분노는 자신들의 피해감에 대한 응당한 분노일 뿐이다. 왜 항상 이렇게 얕을 수밖에 없을까? 언제나 이렇게 얕았던 것일까? 우리는 진정으로 분노할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처절하게 잔인하게 깊게 생각해보자.)



1) ‘모에’아이템은 일본어 ‘싹이 나다‘에서 온 말로, 팬들이 특정 아이돌가수에게 좋아하는 부분이나 좋아지는 포인트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안경을 쓴 모습을 특히 좋아한다면 그 안경이 모에아이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