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미정

지금 와서 돌이켜 보건데, 나는 어렸을 적에 스스로를 ‘여자’에 가깝다고 여겼다. 인형을 갖고 놀 때나 어떤 행동에 대해서 ‘남자답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이 싫었다. ‘나는 왜 남자답지 못 하지?’라는 의문이 들면서도 ‘남성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을 뿐, 그 외의 다른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내 정체성을 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계기를 찾으라면 남자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나니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되나? 난 정말 여자가 되고 싶은 걸까? 그럼 성전환 수술을 해야 할까? 여기에 이르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난 남자로서 남자를 좋아하는 거지, 여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야.”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나는 ‘트랜스젠더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었고, 하나는 수술에 대한 공포였다. 당시에는 트랜스젠더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지 못 하고 수술을 꼭 해야 하는, 어떤 결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수술에 대한 공포는 말 그대로 ‘몸에 칼이 닿는 것’에 대한 공포였다. 페니스를 떼어내면 아프지는 않을까 하는 원초적인 공포들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여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도 스스로가 남자에 가깝다고 느껴본 적 없던 내가 남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이런 표현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쩌면 편하게 가고자 하는 얄랼한 생각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트랜스젠더와 게이의 개념에 대해서 정확하게 자각하고 있진 않았겠지만, 트랜스젠더를 하나의 정체성이 아닌 고쳐야 할 결점이 있는 무언가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생물학적으로 나를 바꾸려는 시도’보다 ‘게이로서의 정체화’가 더 쉽게 느껴졌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이성애 중심적인 압박이 왜 생겨났는지 알게 되었고, 그러한 것에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별과 정체성에 나를 속하게 할 필요도 없고, 속하게 하는 틀도 결국 편견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러자 나의 정체화 방식이 이성애 중심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에 근거해 스스로를 게이로 정체화 했지만, 성별에 근거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방식으로 정체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의문이 들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내가 게이로서 살아온 경험도 분명히 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런 내 경험들을, 성별에 입각해 정체화를 하면서 억눌러야 했던 내 욕망들처럼 또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방식으로의 정체화가 내 필요가 아닌 외부의 요구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든다. ‘정체성’이라는 정의 자체에 대한 의문도 계속 일어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정체성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에 기대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다 집어치우고 ‘나는 나에요.’라고 소리치고 싶기도 하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범주가 없다면 그냥 ‘나’이고 싶다. 게이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면 그것도 그것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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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

나는 여성이다, 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 성별 정체성만으로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 은 아니다. 그 말이 나의 성별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여성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의 공간에서 여전히 남성으로서―남성답게와는 다르다― 살고 있으며, 남성의 몸이라는 요소 역시 나의 성별 정체성을 구성―그것이 좋든 싫든―하는 일부이며, ‘다른 여성’들과 다른 구석이 많은 탓이다.

그런 나를 위해 비수술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여기에다가 ‘pre-comingout’ 같은 말을 붙인다면, 문제는 대개 다 해결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프리 커밍아웃 비수술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이라는 말 따위가 입에 붙을 리가 없다. 너무 길어서다, 라고 얼버무려도 좋겠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다. 영어라서, 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익숙한 단어들이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거나, ‘트랜스젠더 라는 것―그러니까, 몸과 정체성이 서로 다른 성별이라는 것’, ‘여성(만)을 사랑한다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 몇 마디 말들은, 그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속성일 뿐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핍박하는 세상에 살아 가고 있기에 그것들은 나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 자체가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요소는 아닌 것이다.

곤란한 일이다. 정체성을 담은 한 마디는 나의 삶을 설명하지 못하고, 나의 삶을 설명하는 단어는 정체성을 설명하지 못하니 말이다. 몸의 성별과 정체성이 다른 나의 상황이 애초에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혹은 애초에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결국은 설명을 요구하기에, 일단은 비수술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을 받아 들이고 있지만, 나를 말하기 위해 택한 그 이름이 한 편으로 나를 누르고 있다.

언어의 한계라든가, 불명확함 만이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문제는, 내가 나를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한 편으로는 설명을 요구받는다는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 구구절절 이름을 붙이면서는, 내가 실존하는 한 사람이 아니라, 백과 사전에나 실린 희귀종의 표본으로나 읽힌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설명이라는 것은 애초에 명확하지 못한 것, 간단명료하지 않고 복잡하고 어려운 것에 요구되는 일이다. 몸의 성별과 정체성이 서로 다르다는 나의 상황이 나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력 없는 이 세상이 나를 복잡하다고 여기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 설명을 위해 그냥 혼자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까 드는 의문일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걸까, 책 속의 글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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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문제가 없다.

‘바이 논란’에 대해서는 주워듣기만 했다.(성소수자 모임은 완전변태가 처음이다.) 남성을 사랑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남성과 연애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택한―혹은 확인한― 레즈비언 정체성을 부정당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래봐야 한 때 일이고, 언젠가 결혼할 거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고 들었다. 여고만 졸업하면 남자한테로 관심이 돌아갈 거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섹스를 할 때 페니스를 사용하면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낀다. 사용하지 않을 때, 혹은 최대한 소극적으로 사용할 때의 기분이 더 좋다. 하지만 대개는 사용한다. 내 몸에 있는 몇 안 되는 성감대 중 하나인 걸. 단순히, 페니스 달린 여자, 가 아니게 되는 순간 혼란을 느낀다. 정체성의 혼란은 아니다. 그냥 죄책감이다. 누구에게 무슨 죄를 짓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죄책감인 것 같다.
여성의 몸과 여성의 정체성을 갖고서, 여성 정체성을 가진 남성의 몸과 연애하는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사람의 사랑이, 혹은 연애나 섹스가, 이성애인지 동성애인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알기 어렵다기보다, 말하기 어렵다. 나는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일 테다. 어쩌면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여성 정체성을 가진 남성이라니, 에이 그냥 변태잖아, 하면 그만이겠지.
언니네 홈페이지에 글이 하나 올라 왔(었)다. 레즈비언인데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사랑일가요, 하는 질문이었다. 몇 개의 댓글들, 사람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레즈비언이라면 남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바이겠지요. 조금 고민하다가 댓글을 달았다. 남자를 사랑하는 레즈비언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게시판에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여성으로 등록된 아이디가 필요했다. 정체성을 확립하기 이전에 만들었던, 남성으로 등록된 아이디를 탈퇴 처리하고 아이디를 새로 만들었다.
성별 란에는 남성, 여성, 이렇게 두 가지가 있었다. 고민했지만 결국 선택했다. 죄책감을 느낀다. 페니스가 달려 있기 때문인지 페니스를 사용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선택했다. 평소에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이름을 써 넣고, 여성을 선택하고, 아이디를 만들었다. 남성을 사랑하는, 혹은 남성을 사랑했던, 남성과 연애하는, 혹은 남성과 연애했던 사람도 레즈비언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선택하는 거니까요. 물론 어디에선가 욕을 들을지도, 정체성을 부정 당할지도, 그래서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괜찮다고 생각해요.
나는 아직 애인을 누나라고 부른다. 야, 라고 부를 때도 있고 이름을 부를 때도 있지만 아무튼 누나라고 부른다. 가끔씩 언니라고도 부르지만 다른 느낌이다. 나는 애인을 누나라고 부르고 페니스를 사용해 섹스한다. 하지만 나는 동성애를 하고 있고 동성과 연애하고 있다. 나는 여성 정체성을 갖고 있다.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또 죄책감을 느낀다. 이번에는 어쩌면 그냥 민망함일지도 모른다. 나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들 앞에서 무심결에 누나, 라고 그를 지칭했다가 다시 그 사람, 으로 고쳐 말한다.
몸과 정신의 정체성이 다른 것이 문제라면 수술을 하면 해결이 되는 걸까. 페니스를 없애 버리면 나는 괜찮아 지게 될까. 수술을 하면 나는 여자가 되는 건가. 아니면 그냥 트랜스 젠더가 되는 건가. 수술 후의 나를 가끔 상상해 본다. 나는 여성이 될까 수술한 사람이 될까. 수술을 해야겠다, 수술을 하면 되겠다,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무엇이 될지는커녕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중요한 것은 외양이 아니라 지향이다, 라고 애인의 수첩 어딘가에 적혀 있다. 여전히 남자 옷을 입고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고 페니스를 사용해 섹스를 하는 애인에게 혹시나 하게 될지 모를 실수를 생각하며 썼을 것이다. 그는 내게 실수를 하지 않지만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누구에게 무슨 죄를 짓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느끼는 것은 죄책감인 것 같다.
그러니까, 라고 쓰고 싶다. 실은 하지만, 이지만, 본심은 아무튼, 이지만, 그래도 왠지 그러니까, 라고 쓰고 싶다. 남성을 사랑하는 레즈비언도, 페니스를 사용해 섹스하는 여성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유도 없는(실은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죄책감을 느끼는 것만 뺀다면 인생은 꼬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그래도 또 어딘가 꼬일 것도 알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외양이 아니라 지향이다, 라고 애인의 수첩 어디엔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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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대신 이 년 저년

가뭇가뭇, 또 수염이 자란다. 또래 애들보다는 늦게부터 나기 시작한 수염이고, 덥수룩하게 자라지도 않지만 그래봐야 수염일 뿐이다. 아무리 적다곤 해도 며칠에 한 번씩은 면도를 하는 수밖에 없다. 수염이 자라는 것은 끔찍하게 싫지만, 그렇다고 면도를 부지런히 하지는 않는다. 키스 할 때 따갑다거나, 보기 지저분하다거나, 아무튼 누군가의 지적이 있기 전까지는 그저 내버려 두고만 있는다.
귀찮아서는 아니다. 의식하고 싶지 않아서다. 수염이 자라는, 남성의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염이 자란다고 해서 어라 너 남자구나, 하고 지적하는 사람은 없으니 신경을 쓰는 것은 오로지 나 뿐이다. 남성들과 어울려 다니지도 않고, 특별히 남성성이 두드러지지도 않는 내게 있어, ‘남성의 몸을 갖고 있음’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면도인 것이다.
그런 탓에, 가끔씩 하는 면도 역시 기괴한 꼴을 하고 있다. 면도기와 면도크림, 아니면 비누거품만으로도 몇 초면 끝낼 수 있는 것을, 괜히 면도기를 쓰지 않느라 몇 배나 되는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면도기는 고사하고, 멀쩡한 전기 면도기마저 어딘가에 묵혀 둔 채, 눈썹칼을 갖고 면도를 한다. 맨살을 칼날로 긁어대는 통에 코밑은 화끈거리고, 제 용도가 아닌 탓에 말끔히 면도가 되지도 않지만 굳이 굳이 그것을 고집한다.
우아한 플라멩고처럼 생긴 분홍색의 칼이다. 비록 남성의 몸을 갖고 있지만, 남성들처럼 살지는 않는다는, 혼자만의 작은 증거다. 물론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애지중지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다. 웃옷을 벗은 모델이 얼굴에 잔뜩 크림을 바르고 한껏 멋을 부리며 면도하는 모습을 수염을 깎을 때마다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갖고 산다는 것에는, 이런 식의 자잘한 증거들이 필요하다. 나의 몸이 내게는 아무런 증거가 되어 주지 않는 탓에, 행동이나 습관에서 나타나는 증거들이 필요한 것이다. 남에게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기대기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컵을 쥘 때 새끼 손가락을 펴거나, 웃을 때 입을 가리거나, 그런 것에서 시작했다. 중학교에 다닐 때쯤 의식적으로 만든 습관은 다행히 지금까지도 잘 이어지고 있다. 우습게도 그런 습관들은 ‘여자 같은 남자’라는 호명을 통해 뜻하지 않게 남성의 몸을 갖고 있음을 환기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묘한 자긍심을 주기도 한다.
여성 정체성을 가지면서는, 또 다른 증거가 필요해졌다. 이전까지는 그저, 스스로가 보기에 ‘여자 같은’ 구석들이 있으면 되었지만,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여성으로 존재해야 했다. 몰래 하는 면도나, 혼자만 신경쓰는 자잘한 버릇들이 아니라, 나와 타인 사이에 오가는 증거가 필요해 진 것이다.
그래서 늘 ‘언니’라는 말이 부러웠다. ‘여자들끼리'(물론 ‘여성주의자끼리’의 성질이 크지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식의 이름을 나도 하나쯤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남성의 몸에서 나오는 언니라는 말은 그런 의미를 갖기 어렵다. 최소한 내가 아는 남성들 중 ‘언니’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장난으로 사용한다. 악의가 없다고는 해도, 거기에는 무언지 모를 비하의 느낌이 깔려 있다.
아아, 그래서 나는 엇나가고 말았다. ‘여자들끼리’의 또 다른 호명, ‘년’을 선택해 버린 것이다. 어쩌면 델마와 루이스 쯤 되는 활동적인 여성상에 대한 클리셰 중의 하나일 뿐이겠지만, 친근한 사이의 여성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년이라는 말 역시 ‘언니’와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을 선택한 것이다. 남자가 사용하면 ‘욕’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그래서 남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단어―그 말을 입에 올려 본 것이다.
애인에게, 혹은 그만큼 친한 몇몇 친구들에게, 때로 이 년 저 년 하면서 논다. ‘놈’은 욕이 아닌데 ‘년’은 욕이라는 사실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님을 알지만, 그것이 한 편으로 내게 위안이 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비하하는 욕을 서로에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연대감의 일면이다. 연대라는 것은 약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특권이기에, 내가 그것을 누릴 수 있음은 우습게도 내게 위안이 된다.
일단은, 다행히 괜찮더라. 뜻하지 않게 과격한 사람으로 비치게 되기도 했지만, 내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더라. 그래서 기뻤다. 신이 나서 한창 쓰고 다녔는데, 요즘은 좀 사그라들었다. 내게 이 년 저 년 소리를 들은 친구는 괜찮았는데, 친구가 아닌 사람이 놀라더라, 아니, 싫어하더라. 실은 그 사람이 옳았던 것이겠지만, 삶의 증거 하나를 잃는 기분은 씁쓸했다.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자에요, 하는 말을 들은 상대가 나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하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자격지심이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듣는 ‘실수’들에 대한 노이로제다. 하루종일 의심하며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니 증거가 필요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무엇이 과연 좋은 증거가 될 수 있을지. 무언가 나를 증거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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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방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여러 사람과 산다. 그리고 좋아하는 아역배우는 서울 오기 전에 좋아한 친구와 똑같이 생겼다. 공교롭게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틈에 그래서 사진도 여러 장 모아두고는 했다. 무슨 연기를 하는 줄도 모르는 아역배우의 여드름 역시 꽤 오랫동안 조용한 금기. 중학교 교무실을 좋아하고 지하철에서 본 열 살 아이의 아름다움에 대해 일기장에 장황하게 쓴다면 아무래도 변태인 걸까? 공동생활은 어려운 걸까? 지금 이 문단은 커밍아웃인 걸까?
“바이논란”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소수자의 개념, ‘이성애자 아닌 것’의 폭을 ‘우리’도 고민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왜 다수의 이성애자는 트랜스섹슈얼과 호모섹슈얼을 구별하지 못할(않을)까? 그들에게 ‘레즈비언 아닌 성소수자’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성애자 아닌 것’은 그대로 동성애자로 간주되는 이분법이 날 항상 돌아버리게 했다. 그 단순명료함 아니 단일함 앞에 어떤 말도 무력하게 느꼈다. 결코 동성애자도 ‘쏘쿨한’ 이성애자도 아니었다. 왜 구멍이 될 수 없었을까? 왜 경계에 걸터앉아 짓뭉갤 수 없을까?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은 진부한 기존의 담론 안에 흡수되고 말았다. 오히려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말려들고 답습하며 대수롭지 않은 풍경 하나. 우리 안에 다른 분류를 만들어내든 우리 밖으로 튀어나가든, 알맹이는 잃어가면서 껍질만 단단해진다는 기분이 나날이 두터워져갔다.
내가 무엇일까? 자기자신을 알기 위해 말을 입기도 한다. 그간 숱하게 집어든 말들이 그랬고 스스로 허락했던 문장들이 그랬다. 하나. 둘. 더해서 부피를 키우고 무게를 늘렸다. 또한 자기자신을 명료하게 하고자 말을 벗기도 한다. 셋. 넷. 덜어내고 밀치고 버리며 앙상한 나만의 핵심을 남기려 했다. 그래서 난 무엇이 되었을까? 덧셈과 뺄셈은 날 어떻게 만들었을까? 스스로 부를 수 없는 덩어리가 되거나 숫자 영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니. 소리를 내기가 참 힘이 든다. 공동생활 속에서 내가 아주 간단한 절차를 거쳐 ‘여성’으로 판명날 때. 그것은 ‘편의’라는 옷을 입었고 이성간에는 같은 방을 쓰기 곤란하다고 발언한다. 그것은 그저 배워서 익힌 습관이다. 하지만 이제 ‘누구하고라도 비슷하게 곤란한 일’이라 말하기는 그만뒀다. 나는 지금 ‘여자방’을 쓰고, 앞으로도 쓰기를 원한다. 또는 내가 쓰는 방을 ‘여자방’이라고 부르고, 앞으로도 부를 것이다. 두 문장의 순서조차 정할 수 없고 그 ‘여자방’이 동거인들 사이에서 나를 ‘여성’으로 인식시키는 요인인지도 명확치 않다. 다만 ‘여성’과 ‘이성애자 여성’은 아주 많이 닮은 말임을 안다. 둘 다 이성애중심주의와 긴밀한 연관 속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입을 다문다. 만약 누군가 “(너는 이성애자 여성이다, 그러니 당연히) 남자친구를” 만나지 않느냐 물어온다면, 그 질문 안에 나는 없다. 아마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지워지고 있어 여기 있으면서도 없어지고 있어 아무리 소리친대도 그것이 중차대한 절박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때때로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만이 절박한 것이 문제도 아니요 내가 얼마나 떠든들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요 심지어 두 문장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고립과 해결불가능은 그저 동시적인 별개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너에게 독방을 줄게’ 라고 누군가가 제안한다. 난 되묻는다. 그러면 ‘여성’이 아닐 수 있는 거야? ‘개인’이 되는 거야?
상황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난 어쩌면 어디서도 별로 튀지 않고 잘 섞여들어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남성’을 ‘남성’으로 지칭하면서 그런 대로 연애를 하고 함께 살 궁리를 하게 된 지금, 내가 누구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안개 속이다. 고민들은 전혀 뭉개지지 않았고 사실인즉 많은 것들 훨씬 선명해졌지만 ‘여성’ 또는 여성 아닌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은 절로 줄어들어간다. 피할 수 없었던 질문조차 이제 다가오지 않는다. 항상 ‘여자방’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은 ‘남자친구’와 섹스할 수 없는 방이기도 하고 ‘여자’기 때문에 레즈비언섹슈얼리티가 삭제될 수도 있는 공간이다. 또한 ‘여자방’이 아닌 공간에서 위축될 가능성도 심어진 장소다. 늘, 늘 그런 작은 방이 있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던 길 ‘노출증’이, 혐오범죄를 행사하던 내 뚜렷한 대립항이 나타나기 전에도 그랬다. 기꺼이 들어가야 하는 방, 조금은 어울리고 조금은 불편한 그 방은 ‘나만의 방’ 이전부터 버티고 있었다. 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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