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길

 

 

행군을 했다. 어느 언덕 어디쯤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차에 치였나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검은 아스팔트가 뒤덮은 길이 아니었고 주변엔 그 가련한 것을 조용히 덮어줄 친절한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조용히 사라질 수 있도록.

 

근무를 하고 있다. 사무실 옆길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아스팔트로 덮여 있는 길이지만 바로 옆 작은 공터에 숨겨지듯이 누워 있었다. 오래 전에 죽었나보다. 바짝 말라 있었다. 이제 흙과 먼지가 되는 길만 남아 있는 듯했다.

 

지금까지 직접 본 죽음의 현장, 아니 살육의 현장은 길 위에서였다. 비둘기, 쥐, 고양이,,, 너구리도 한 마리 보았었다. 죽음이 일어났던 현장도 무수히 보았었다. 길 위에 하얀 스프레이로 그려진 한 인간의 형상, 그 위로 시커멓게 들러붙은 핏덩이의 자국, 로드킬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가리지 않고 언제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가 많으면 많을수록 도로가 많으면 많을수록 인간의 길이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죽음은 더더욱 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

 

촛불 집회 당시 8차선 도로 위로 걸어보았었다. 너무나 자유로웠다. 차들이 이토록 많은 공간을 차지해버리는 것이 어째서 언제나 당연시되었던 걸까. 더 빠르게 살기 위해, 더 편하게 살기 위해라고 말하지만 더 많은 이들을 ‘지속가능한 불행’ 속에 빠뜨리는 그것들에게, 그리고 가끔은 한 삶 자체를 끝내버리는 그것들에게, 어째서 이토록 많은 공간을 허락해버린 것일까? 그리고 그 빠름과 편함이 차를 통해서만 유지 가능한 것일까? 아니, 그 빠름과 편함이 정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일까?

 

자전거 도로라고 멀쩡한 흙길을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짓거리, 이미 차고 넘치는 것 같은 도로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계속해서 산이 갈리고 뚫리고 들판이 덮이고 또 덮이고 그 길을 따라 달리는 차들은 늘어나고 그 옆, 그 위, 그 아래로 죽음만 늘어가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처럼 세상은 조용하다.

 

농담 삼아 진담삼아 모든 개인 승용차를 금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대중교통을 지금보다 훨씬 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늘리면 지금 사용되고 있는 도로의 절반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마 그럴 것 같다. 개인용 승용차는 참 시답잖다고 생각한다. 그럴 것 같다.

 

언제나 차들로 꽉꽉 차 있는 널찍한 도로와 인간에게 허락된 비좁은 길, 동물에겐 허용조차 되지 않는 길, 그 길마저 오토바이, 스쿠터, 자전거가 가끔씩 돌아다녀 버리는 그 길 위에서만 오늘도 걷고 내일도 걷고 또 걷는다. 멀 것 같지만 되도록 가깝길 바라는 어느 미래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지만 지금 하는 것이라곤 텀블러를 쓰고 있을 뿐인 마쯔,

4대강 반대 집회라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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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불편편안

 

불편편안

 

불편한 사람들, 불편한 자리, 불편한 시간들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흐느적대며 보냈던가. 그리고 그걸 보상받고 싶었던지 근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편안한 사람들, 편안한 자리, 편안한 시간들 속에서만 살고자 또 얼마나 발버둥 쳤던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 왔던 수많은 것들에 지쳐 버렸을 때, 심지어 혹은 당연하게도 단결 – 투쟁의 구호마저 불편해져 버린 어느 순간 천천히 나는 편안한 내 방안 구석으로, 한정된 편안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으로 스르륵 숨어버렸다. “피곤하다.” “지쳤다.”라는 말과 함께…

 

방 안에서 편안히 소파에 누워 가끔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왔던 수많은 것들을 비웃어대며 또 어떤 때는 무기력감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냉소와 썩어버린 미소로 시간을 채워나갔다. 마치 TV를 보는 것처럼 세상만사에 대해 심드렁한 인간. 그러던 어느 날 편안하다고 느껴졌던 내 방이 불편해져 버린 것을 깨달았다. 벽과 문에 무수히 많은 가시가 달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방 안을 나서는 순간 마주칠 불편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분명 수만 번은 느끼고 반복했던 그 불편들인데, 마치 처음 겪어야 하는 것처럼 무서워졌다. 나의 편안한 방이 어느 순간 불편에 대한 공포로 둘러싸인 ‘편안한’ 감옥이 되어 있었다.

 

내가 약해져 버린 것일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약해졌다. 가시덤불 속에서 뒹굴기를 포기하며 보낸 시간동안 찢겨진 상처와 멍들이 아물고 흉터 몇 자국만이 진하게 남은 내 피부는 분명 연약해졌다. 나는 약해졌다. 그렇게 약해진 가죽으로 밖을 나가면 분명 또 다시 찢기고 말 것이다. 피 흘릴 것이다. 무서워졌다. 좀 더.. 좀 더.. 그렇게 1년이 넘도록 어쩌면 2년이 넘도록 방 안, 편안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왔다.

 

그러던 중 마침내 기다리다 지쳤는지 불편이 흰 봉투 하나 고이 들고서 나를 찾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나오라고. 나는 도망갈 수 없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궁지에 몰렸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끌려나온 나는 그 속에서 살아남고자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짓거리들을 웃음으로 넘겨버리기도 하고 그걸 전복하고자 살짝 시도해보기도 하고 그러다 가끔 성공하기도 하고 대부분은 실패하면서…

불편과 편안 사이를 오가며 그 경계 위에 지금 나는 있다.

 

그리고 이 지점이 좋아졌다. 강제로 불려 나온 것이지만 그래도 좋다. 불편한 사람들과 편안한 사람들, 불편한 자리와 편안한 자리, 불편한 시간들과 편안한 시간들 사이를 오고 가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지만 그 사이에 있음으로써 활력을 얻었다. 싸워나가야 할 것들, 부딪혀야 할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TV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아닌 실제의 삶에서 부딪히며 느끼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선명한 옳고 그름, 그리고 그 사이의 흐릿한 알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기에 좋다. 물론 다시 부딪힘으로 인해 조금은 피 나고 조금은 멍들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마 어쩌면 무엇보다 좋은 것은 최소한 불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은 계속해서 알게 해주니까. 지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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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편해서 내 편은 아니다

편해서 내 편은 아니다

 

 

대학교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나서, 나를 취업 준비생으로 명명했다. (취업 준비생이라고 쓰고, 백수라고 읽는다.) 대학원에서 하고 싶은 공부가 돈벌이가 되기까지 얼마나 돈을 먹어댈지 알 수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가져다 줄 가난하고 불안정한 삶에 뛰어드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나에게 안정은 취업 준비생의 무리 속에 몸을 숨기고, 부모님에게 당당히 용돈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말처럼 간단한 삶은 아니다. 불안함은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엄습한다. 덕분에 내 생활은 매우 단조로우며, 친구들과 만나도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꺼내기 어려운 지루함뿐이다.

 

이기는 편 내 편, 취업 시켜주는 회사 내 편.

 

Input이 없으니, Output을 예상할 수도 없다. 애초에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은 없었으니, 기대하는 회사도, 업무도 없다. 취업하지 말고 시집 가라는 할머니나, 너는 무슨 회사에 들어가고 싶냐고 묻는 친구나 밉상이긴 마찬가지다. 희망업무가 생긴 건, 내 스펙을 받아주는 곳을 추린 것 뿐이다. 하고 싶은 업무가 일원화된 건, 그것이 모든 회사에 들어가는 자기소개서를 복사해 붙여넣기 편하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방법 외에 궁금한 것은 내가 받을 숫자 뿐이다. 기업 채용 설명회에서는 모두 당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를 더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인생선배의 조언을 주지만, 내가 챙겨나오는 것은 돈푼 나가는 일용할 기념품이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부터, 모든 일에 심드렁해지기 시작했다. 삼성이 서해에 유조선을 가져다 박았어도, 나는 삼성의 쏠쏠한 연봉이 받고 싶다. 이랜드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했어도, 나는 이랜드의 정규직 자리가 탐난다. 삼성에 가지 못한 건 탈락했기 때문이고, 이랜드에 가지 않은 건 내 인생에 기독교를 들여놓는 귀찮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학연, 지연 등의 사회의 부조리는 나에게 유일한 끈이다. 좀 더 빠르고, 정확한 방법으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끈. 이에 대한 죄책감은 어쩔 수 없다는 패배감에 쌓여서 점점 줄어든다. 나는 빨리 취업을 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운동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라고 쓰고 바랬다, 라고 고쳤다. 안정적인 생활과 운동이 함께 갈 수 있을 리 없다. “괜찮아, 나중에 후원금 내면 되지, 뭐”라고 말하지만, 난 네 편에게 100원을 벌어다 주고 10원을 받아 1원을 기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바뀌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글을 검토한 내 편은 말했다. 10원은 받을 수 있는거냐고. 못 받겠지.)

 

A문항 10개, B문항 3개 : 꼼꼼한 완벽주의자! 자신감은 좀 채워야 할 듯?

 

대기업 공채는 각 회사마다 자신의 인재상에 맞는 인재를 뽑기 위해 인적성 테스트를 본다. 100여개가 넘는 문장들 사이로 Yes or No, 혹은 1~5까지의 숫자를 체크해야 한다. “나는 모든 일에 꼼꼼한 편이다.” Yes or No. 심리테스트와 비슷하다. A와 B 사이에서 열심히 답을 체크하다 보면, 내 성격도 보이고, 성정체성도 보이고, 연애 스타일도 보인다. 그리고 어떤 기업이 날 뽑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도 난다. 언어나 수리나 추리는 정해져있는 정답을 찾아내면 그만이지만, 인성 테스트의 정답은 내가 만들어내야 한다. 가장 구미 당기는 인재상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 둘 답을 체크하다보면 시간이 모자란다. “내가 이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상정한 가상의 나라는 인물의 성격은…” 이렇게 길게길게 생각하다가, “나는…” 이라고 주어를 상큼하게 잘라버려 시간을 절약한다. “인성 테스트는 정답이 없어요. 다만 일관성이 중요하니까 거짓말만 안 하시면 되요. ^^” 누구나 하는 거짓말이다. 이 말의 포인트는 일관성의 중요성. 앞의 두 세 문제에서 체크한대로 내 성격을 표현하다보니, 빼도박도 할 수 없었다. 꼼꼼함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버려야 했고, 인간관계를 버리지 못해 자신감을 버렸다. 자신감이 바닥을 친 꼼꼼한 완벽주의자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일관성의 늪에 빠진 것은 ‘인성 테스트의 나’ 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싸고 품질이 좋아도 삼성 물건은 사지 않겠다는 사람들 앞에서, 삼성에 낸 이력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이제 나는 내 편을 내 편이라고 하기 미안해졌다. 선택지도 없는데, 선택의 갈림길에 있는 것 같다. ‘나’와 ‘취업 준비생인 나’는 같은 편이 아니다. 둘 중에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까칠까칠 사포같이 불편한 나의 편

 

대충 이런 나의 상태를 보고 내 편은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게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제일 불편하다. 어렸을 때, 분명히 거짓말인데 엄마가 그러니, 하고 믿어버리면 참다못해 내 입으로 실토할 때까지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주위를 서성였다. 그러니까 이 글은 아마 그 실토다.

 

내 편은 절대 편하지 않다. 오히려 내 저편에 손짓하고 있는 저들이 나의 ‘편함’을 보장해줄지도 모른다. 내 편들과는 황금 같은 저녁 시간에 회의를 해야 하고, 그만하고 술이나 먹을까 싶으면 논쟁거리가 하나 더 나온다. 처음 내 편을 만난 건 편했기 때문이지만, 지금 내 편이 중요한 것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남들하는 대로만 하면 이 편한 세상에서 살 수 있을 현실에서, 원석 같은 논쟁거리와 이 세상에 벌어지는 똥 같은 이야기 100편 따위의 충격을 나누고 싶다고 굳이 퍼나르는 그들의 불편함이 나의 벼랑 끝 지푸라기다.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던 회사 회식자리에서 내가 담배를 필 수 있었던 것은 줄담배를 펴대는 회사의 마초들 덕분이었지만, 내가 담배를 필 수 없었던 것도 그들 때문이었다. 안락함과 금기를 당근과 채찍처럼 가져다 대는 그것이 남의 편, 그리고 고삐를 풀어 당나귀의 불안함을 증폭시키는 것이 내 편. 그래서 난 이렇게 내 방에서 줄담배를 펴대며, 자시소개서를 배경으로 띄운 채 워드 창의 오래된 글을 고쳐내고 있다. 혼자 있었다면 이렇게 글을 써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다 내 편 때문이다. 까칠까칠 불편도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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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나는 오늘 적을 만들기로 하였다. 2

 

나는 오늘 적을 만들기로 하였다. 2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나는, 살아가기 위해 적을 만들기로 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좌절감, 곧 내가 ‘무소용’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의 결정적 계기가 ‘현재 무직’인 것은 옳지도 않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직업을 가지는 이유가 자아실현을 위해서였던 시절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 정도일 것이라고 섣불리 가정하면, ‘무직’의 사정이 나의 가치를 측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노동자에게 있어서 노동은 대부분 임금을 위해 추구될 뿐이며, 그 노동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여지를 주는 행위일 뿐이다. 노동이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세상이 노동하는 이들을 위한 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사람답게 노동할 수 있는 권리는, 임금을 위한 노동을 하는 외의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다른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윳돈을 보장받는 것이어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직업이 그런 요건들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구직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직이란 단어 뒤에 숨어있는 수많은 좌절을 어찌 다 열거할 수 있으랴. 나의 지난 세월은 당신네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자기소개서와 각종 서류들을 통해 증명하며, 이름도 모르는 면접관들에게 길어야 10분 안짝의 시간 동안 나의 열정, 감성, 이성, 지성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나는 무엇을 바라 여기에서 내 기억과, 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부풀리고 깎아내리고 덧칠한단 말인가. 생전 처음 만나는 당신에게 절절한 충정을 고백하는 까닭은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님을 설마 그가 모를까봐 걱정이다, 그러나 그 원하던 발각으로 낙오될까 역시 걱정이다. 그 어떤 정중한 불합격 통보도, 내 인생이 부당하게 재단된 후 내팽개쳐진 후의 씁쓸함을 위로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짧고 강렬한, 그러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는 권력에의 체험이다. 확언컨데, 면접장 안에서 그토록 거대해보였던 그들은, 실은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은 아닐 것이다. 허점도 많고, 취향도 별로이며, 서툰 인간관계로 욕을 먹거나 고통을 받기도 하는, 인생이 구질구질하다고 느끼는, 우리와 별반 다름없거나 대부분 우리보다 별로이거나 어쩌면 우리보다 조금만 나은 인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불합격이었고, 돈 벌 기회도 잃었다.

 

생활에 잡아먹히는 것을 차치했을 때, 노동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 고작 승진이나 연봉상승, 휴가라면, 그것도 정규직이나 되어야 가능할 그런 것이라면, ‘현재 무직’인 많은 ‘무소용’들은 극단적 좌절을 맛볼 이유가 없다. 우리가 느끼는 좌절감은 직업을 가져야만, 돈을 벌고 있다는 번듯하고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만 사람으로 취급받는 몹쓸 세상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그러나 대다수가 돈을 가질 수 없는 세상 때문이어야 하며, 아마 그럴 것이다. 나는 쓸모없지 않고,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하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직업 그 자체를 위해 지나치게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직업을 구하는 과정에서 겪는 불필요한 좌절과 가당찮은 굴욕에 자신을 하찮게 여기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 자신의 일상을 조직하는 것이 온전히 취업을 위한 것이어야만 비로소 열심히 하고 있노라 안심하게 되는 강박, 다른 이름의 현실도 지겹다.

 

그러나, 다만 나를 욕하는 것이 가장 쉬울 뿐이어서이다. 세상은 거대하고 사람들은 지독하기 때문이다. 상대하기보단 외면하고 싶기 때문이고, 외면하기보단 그 무리에 속하고 싶어서이다. 외면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겠으나, 그 무리에 속하려는 것은 타인의 욕망이고, 나는 오히려 그들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 나를 욕하는 것이 가장 쉬울 뿐이어서 나는 나를 무소용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리고 기뻐한다, 이제, 나만 바뀌면 될 뿐이어서이다.

 

실은 자기만족이라는 것을 누가 모른단 말인가. 세상을 ‘옳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착취와 혹은 자행하는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세상을 향해 자신과 같은 삶을 살 것을 설파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 누구도 자신을 피해자나 가해자로 명명하고 싶어 하지 않기에,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에 타인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른단 말인가. 내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은 직업을 가졌는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가 아니라는 것을, 그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러니 이제 그만 기죽고, 그만 자학하고, 그만 반성하자. 보라, 저들이 적이다. 어떻게 더 자신을 괴롭힐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적들을 상대할 것인지를, 좀 더 공들여 생각해보자. 나는, 그리고 당신은, 적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 다만 잘 싸우면 될 일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싸워서 이기면 될 일이다. 나는 아직, 그 방법은 모르겠다. 그저 내 편이 아니라는 것만 안다. 당신도 아직, 모를 수 있다. 다만 당신만이, 지금 이 순간엔 단 하나 있는 당신의 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적부터 만들자, 그래야 편이 늘어난다. 살기 위해, 그리하여 적부터 만들자.

 

집안에 돈이 많다면, 가능한대로 지원받고, 대신 주변의 가난한 자들과 나누면 되는 문제이다. (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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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나는 오늘 적을 만들기로 하였다. 1

 

나는 오늘 적을 만들기로 하였다. 1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나는, 살아가기 위해 적을 만들기로 한다.

 

 

 

‘다이어트’를 하는 나의 욕망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스스로 ‘뚱뚱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지금에서 좀 더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건강한 몸을 유지한다는 명목에 가려진 채 실현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체중을 감량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를 위해 몇 가지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참이다. 그러니까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페미니스트라는 자가 다이어트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경우에는 굴욕감을 느끼는데, 주변 사람들에 의해 식욕을 제지당했을 때, 혹은 스스로 식욕을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때에는 거의 분노마저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다이어트를 선언하의 선언과 실행을 지켜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식탐’에의 경멸, 타인에게 그 경멸적 상황을 들켜버리고 말았다는 수치심에서 오는 감정일 것이다.

 

결국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본인이 견디지 못하는 문제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나만 떳떳하면, 내가 만든 기준에 따라 행동하면 그만인 것 아닌가.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낮은 자존감이 나를 속박하고 옭아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능한 명제인가? 다이어트는 그 자체가 타인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 시선들을 견디지 못해 다이어트를 시작했으면서, 거기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시선을 따로 떼어내어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시선에 관한 한,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여성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이 곧 다이어트가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풀이될 수 없는 이유이다.

 

기준에서 벗어나는 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자존감’을 통해, 즉 개인적 선에서 해결가능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사회적 시선은 오히려 누구보다 자신으로 하여금 ‘사회적 눈’의 임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게 하는, 하여 내가 나의 몸을 훨씬 혹독하게 평가하고 재단하며,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엔 몸에 붙어 있는 살보다 음식을 향한 욕망에 좀 더 집중적으로 자기혐오가 발생한다. 많이 먹는다, 잘 먹는다, 그만 좀 먹어라, 등의 말을 들었을 때, 혹은 그렇게 자신을 질책할 때, 나는 어느 때보다 나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내 배고픔과 식욕은 ‘욕심’이고, 내 몸은 마치 그 욕심의 증명인 마냥. 누군가의 건강을 손쉽게 판단하는 잣대는 특히 여성에 있어서 ‘몸집’이다. 어떤 여성이 큰 몸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는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동시에 건강하다고 ‘놀린다’.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이중 잣대는 새삼 놀랄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 갈피를 못 잡는 내가 있다는 것은 새삼스런 발견이다.

 

나는 배고픔을 참고 싶지 않다. 나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지나친 배부름도 겪고 싶지도 않다. 조미료를 지나치게 사용한 음식도, 탄수화물 밖에 없는 식사도, 내가 먹고자 하는 양에 비해 지나치게 많고, 지나치게 비싼 식사도 싫다. 하루 세 끼로 정해져 있는 식사 횟수도 싫다. 나는 적절하게 나의 배고픔을 해소하고 싶다.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먹게 되는 라면이니 냉동식품이니 과자며 배달음식도 이제 그만하고 싶다. 배고픔을 배고프지 않은 상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정도를 원할 때마다 섭취하고 싶을 뿐이다. 기존의 식습관을 간편히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이어트에 대해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냥 나는 자기 반성대신, 그리고 나를 사랑하려 노력하는 대신, 나를 괴롭히는 많은 것들을 미워하는 편을 택하겠다. 나는 나의 배고픔 대신 태어난 후로 줄곧 계속 속하고 싶었던 어떤 편, 그러나 인류의 탄생 후 단 한 번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적으로 완벽한 몸’을, 적으로 돌릴 것이다. 내 이마에 붙어 있는 ‘사회적 눈’을 당장 뽑아버릴 순 없겠지만, 서서히 잠들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마른몸도태화 전략을 세워 보았다. step1, 누군가의 체중의 증감에 대해 비록 느끼고 있더라도, 칭찬하지 말 것(지적하고 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고). step2, 마른 몸을 가진 사람이 부럽더라도 안 부러운 척 할 것, step3, 그리고 옷을 많이 살 것. (읭?)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사랑받을 것이고, 그들은 나의 몸을 사랑해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적으로 돌리길 서슴지 않으리라.

나는 어떤 당신들에게는, 사랑받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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