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하게도, 공부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이유로 공부를 선택했다. 소위 특수목적고를 나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손쉽게도 학교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 ‘학생’으로서 남아있을 수 있는,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남아있을 수 있을 정황이 드러난다. 이른바 재능, 사실 알고보면 이어져온 일련의 소속에서 드러나는 특권, 그리하여 점차 ‘능력’, 아니, 남이 평가할 건수가 늘어간다. 말하자면 에스컬레이터다. 한 발판에 올라서면, 다음 발판에 올라서기는 더 쉬워지고, 그것이 가속된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했을 때, 즉, ‘재능’이 ‘인정’받았을 때, 다음 수순의 기대에 더 부응하기 쉬운 위치에 올라선다. 그러다 미끄러지는 순간, 난간을 넘어 추락할 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첫 발판을 밟을 조건조차 없다.
아카데미아의 ’그들’이 말한다. (이탤릭)아카데미아에서 떠난 적이 있으면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대가를 스승으로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실 내가 알만하지 않은 (즉, 권위없는) 사람의 추천서를 받으면 그건 곧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공부할 수 있을때, 많이 공부하는 것이 좋다. 나중에 공부하지 않았던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공부할 기회도 있고, 돈도 충분히 받을 수 있을텐데 무엇을 고민하느냐.
아카데미아는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다. 연구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논문을 쓴다, 아니, ‘생산’한다. 박사 과정을 ‘학생’으로서 입학시키는 미국에서, ‘연구노동자’로서 계약시키는 유럽보다 대학원생에게 더 많은 돈을 준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학생’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어떤 특권인 것은 아닐까? 너는 이 아카데미아를 유지하게 될, 재능있는 적자야, 라는 선언. 이 선언은 이미 ‘지식’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써내려갔던 높은 곳의 사람들의 것이다. 학교의 드높은 이름이, 서로 알고 지내는 ‘그들’의 추천이 그 근거다. 그러면서도 그 ‘학생’은 지속적으로 평가받고, 남겨지거나 가차없이 바깥으로 던져진다. 그것은 논문을 나중에 잘 생산해낼 수 있나, 하는 감별이다. 이렇게, 마침내는 ‘그들’의 직접적인 감별을 거친 덩어리들은 그 곁에 머무를 수 있고, ‘좋은’ 논문을 쓸 수 있다. 이제 비로소 출하할 준비가 되었다. 다행히도 시장은 ’그들’이 함께 한 논문들을 본다. 아마도 살아남는다.
두려운 것은, 이 유예가 끝났을 때, 나는 무엇이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상상할 수가 없다.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이름 아래,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쓰지만, 남는 것은 논문, 그것보다도 논문 목록, 인용수, (이탤릭)curriculum vitae[1],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는, 그야말로 그것만을 위해 철저히 덜어내져버린, 내 몸뚱아리 뿐이다.









<편> 나는 오늘 적을 만들기로 하였다. 프롤로그
나는 오늘 적을 만들기로 하였다. 프롤로그
어제의 친구는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은 그대로 적이 되고
<크라잉넛, 만취천국>
그들을 미워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들을 미워해야만 하는 때가 왔을 때, 나는 아팠다. 내가 잃은 만큼 그들은 잃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아니 그들은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울었다. 내가 아픈 만큼 그들은 아프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울었던 나의 시간에 그들은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전화를 받았다. 믿을 수 없었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내 편이라 말하길 서슴치 않았던 나의 기억을, 믿을 수 없었다.
내 잘못이었다. 종국엔 웃으며 다시 만날 것이란 기대를 어찌 그리 오래 품고 있었던가. 그들이 내 편이라고 어찌 그리 굳게 믿고 있었던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 그것으로 돌아올 비난과 비판으로부터 도망하기에 급급하던 자들이 어찌하여 나의 편이라 믿었던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믿음과 연대, 함께 추구했던 가치가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가진 보잘 것 없는 경력과 지위와 권위였던 것을, 나는 어찌하여 진심으로 설득하고 달래고 화를 내고 울었던 것인가.
지나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삶에 내가 어느 큰 부분이 되길 바랐던 그때의 내 모습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많은 비중을 허락하였다. 한꺼번에 그것들을 비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프게 뜯어내었던 그 무언가는, 그들의 존재가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연대와 우정의 기억이었음을 알겠다. 많은 사람들을 보냈다. 깊고 얕은 생채기를 주고받으며, 여전히 눈에 띄는 흔적으로 남은 상처를 새기고 새겼던 많은 사람들을 보냈다. 나는 그중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애초에 모르고 지나가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할수록 충격은 크고 흔적은 오래갔으나,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들 자신이 싸우고자 했던 세상의 논리, 바로 그것으로 나에게 자행한 그들의 폭력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모르고 지나가는 편을 택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오늘, 잠들지 못한 채 맞이했던 그날의 새벽에 그랬듯, 최선을 다해 그들을 마주하려 한다. 그들이 나에게 선사한 그 밤과 낮을 기억하며, 앞으로 올 그들을 여전히 마주하려 한다.
적들을 주저하지 않으리라. 어제의 친구가 적이 된다 하더라도, 어제의 적은 그대로 적이라 하더라도, 나는 적들을 주저하지 않으리라. 그것만이 내 편을 만드는 길임을 알겠다. 적들과 불화하는 것만이 내 편을 찾는 길임을, 나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임을 알겠다. 그렇게 내 편을 찾을 것이다. 서로의 아픔을 돌보아주고, 서로의 울음을 아파하는 내 편을 찾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준 아픔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다. 적들이여, 그러니
미안하다 말하지 마라, 그저 스스로 부끄러워하면 족하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나는, 살아가기 위해 적을 만들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