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나는 오늘 적을 만들기로 하였다. 프롤로그

 

나는 오늘 적을 만들기로 하였다. 프롤로그

 

어제의 친구는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은 그대로 적이 되고

<크라잉넛, 만취천국>

 

그들을 미워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들을 미워해야만 하는 때가 왔을 때, 나는 아팠다. 내가 잃은 만큼 그들은 잃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아니 그들은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울었다. 내가 아픈 만큼 그들은 아프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울었던 나의 시간에 그들은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전화를 받았다. 믿을 수 없었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내 편이라 말하길 서슴치 않았던 나의 기억을, 믿을 수 없었다.

 

내 잘못이었다. 종국엔 웃으며 다시 만날 것이란 기대를 어찌 그리 오래 품고 있었던가. 그들이 내 편이라고 어찌 그리 굳게 믿고 있었던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 그것으로 돌아올 비난과 비판으로부터 도망하기에 급급하던 자들이 어찌하여 나의 편이라 믿었던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믿음과 연대, 함께 추구했던 가치가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가진 보잘 것 없는 경력과 지위와 권위였던 것을, 나는 어찌하여 진심으로 설득하고 달래고 화를 내고 울었던 것인가.

 

지나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삶에 내가 어느 큰 부분이 되길 바랐던 그때의 내 모습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많은 비중을 허락하였다. 한꺼번에 그것들을 비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프게 뜯어내었던 그 무언가는, 그들의 존재가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연대와 우정의 기억이었음을 알겠다. 많은 사람들을 보냈다. 깊고 얕은 생채기를 주고받으며, 여전히 눈에 띄는 흔적으로 남은 상처를 새기고 새겼던 많은 사람들을 보냈다. 나는 그중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애초에 모르고 지나가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할수록 충격은 크고 흔적은 오래갔으나,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들 자신이 싸우고자 했던 세상의 논리, 바로 그것으로 나에게 자행한 그들의 폭력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모르고 지나가는 편을 택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오늘, 잠들지 못한 채 맞이했던 그날의 새벽에 그랬듯, 최선을 다해 그들을 마주하려 한다. 그들이 나에게 선사한 그 밤과 낮을 기억하며, 앞으로 올 그들을 여전히 마주하려 한다. 

 

적들을 주저하지 않으리라. 어제의 친구가 적이 된다 하더라도, 어제의 적은 그대로 적이라 하더라도, 나는 적들을 주저하지 않으리라. 그것만이 내 편을 만드는 길임을 알겠다. 적들과 불화하는 것만이 내 편을 찾는 길임을, 나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임을 알겠다. 그렇게 내 편을 찾을 것이다. 서로의 아픔을 돌보아주고, 서로의 울음을 아파하는 내 편을 찾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준 아픔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다. 적들이여, 그러니

미안하다 말하지 마라, 그저 스스로 부끄러워하면 족하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나는, 살아가기 위해 적을 만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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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아카데미아

알량하게도, 공부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이유로 공부를 선택했다. 소위 특수목적고를 나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손쉽게도 학교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 ‘학생’으로서 남아있을 수 있는,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남아있을 수 있을 정황이 드러난다. 이른바 재능, 사실 알고보면 이어져온 일련의 소속에서 드러나는 특권, 그리하여 점차 ‘능력’, 아니, 남이 평가할 건수가 늘어간다. 말하자면 에스컬레이터다. 한 발판에 올라서면, 다음 발판에 올라서기는 더 쉬워지고, 그것이 가속된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했을 때, 즉, ‘재능’이 ‘인정’받았을 때, 다음 수순의 기대에 더 부응하기 쉬운 위치에 올라선다. 그러다 미끄러지는 순간, 난간을 넘어 추락할 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첫 발판을 밟을 조건조차 없다.

 

 

아카데미아의 ’그들’이 말한다. (이탤릭)아카데미아에서 떠난 적이 있으면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대가를 스승으로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실 내가 알만하지 않은 (즉, 권위없는) 사람의 추천서를 받으면 그건 곧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공부할 수 있을때, 많이 공부하는 것이 좋다. 나중에 공부하지 않았던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공부할 기회도 있고, 돈도 충분히 받을 수 있을텐데 무엇을 고민하느냐.

 

 

 

아카데미아는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다. 연구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논문을 쓴다, 아니, ‘생산’한다. 박사 과정을 ‘학생’으로서 입학시키는 미국에서, ‘연구노동자’로서 계약시키는 유럽보다 대학원생에게 더 많은 돈을 준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학생’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어떤 특권인 것은 아닐까? 너는 이 아카데미아를 유지하게 될, 재능있는 적자야, 라는 선언. 이 선언은 이미 ‘지식’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써내려갔던 높은 곳의 사람들의 것이다. 학교의 드높은 이름이, 서로 알고 지내는 ‘그들’의 추천이 그 근거다. 그러면서도 그 ‘학생’은 지속적으로 평가받고, 남겨지거나 가차없이 바깥으로 던져진다. 그것은 논문을 나중에 잘 생산해낼 수 있나, 하는 감별이다. 이렇게, 마침내는 ‘그들’의 직접적인 감별을 거친 덩어리들은 그 곁에 머무를 수 있고, ‘좋은’ 논문을 쓸 수 있다. 이제 비로소 출하할 준비가 되었다. 다행히도 시장은 ’그들’이 함께 한 논문들을 본다. 아마도 살아남는다.

 

 

 

두려운 것은, 이 유예가 끝났을 때, 나는 무엇이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상상할 수가 없다.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이름 아래,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쓰지만, 남는 것은 논문, 그것보다도 논문 목록, 인용수, (이탤릭)curriculum vitae[1],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는, 그야말로 그것만을 위해 철저히 덜어내져버린, 내 몸뚱아리 뿐이다.

순수 학문이라는 환상, 그 속에 나는, 내 삶은 없다. 다만 ‘지식’이 있을 뿐이다. 내가 지식을 갈망하는 것인지, 지식이 스스로 쌓아올린 바벨탑에서, 좀 더 높아지려는 갈망으로 벽돌을 쌓아올릴 자들을 무심히 모아들이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 탑 안에서, 논문을 쓰지 않는 존재는 단지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다. 스스로 어떤 권위에도 무심한 듯 보이는, 오로지 순수하게 ‘지식’의 권위를 추종하는 이들의 무리는 살아 움직이며 공고한 탑을 세운다. 모르는 것은 전부 알아야하고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아래, 그러나 무엇을 모르는지는 사실, 무엇을 아는지를 통해 결정되는 그 체계 내에서, 그들은 단지 뿌리로부터 줄기로 이어진 논문의 계보를 이어나간다.
열심히 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은 이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재능이 있는 자, 열심히 해야한다, 는 그 오만함 또한 그러할 것이다. 지식의 권위 아래,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매겨진 서열은 다시 그 권위를 쌓아올리는데 급급하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을 얼마나 덜어낼 수 있느냐다. 얼마나 삶을 삭제하고, 그야말로 고대로부터 ‘고귀’한, 지식의 탐구자가 되느냐다. 누가 말했나,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정말 그렇다. 아카데미아에는 왕도가 없다. 아카데미아 그 자체에 복속되어, 스승의 스승, 스승의 스승의 스승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이어, 스스로의 존재를 단지 지식으로 변환시키는 것 외에 길은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덜어내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가 정말 게으르기 때문일 것이며, 그런 게으름이 바로 나를 나로서 남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교수의 이력서. 한마디로 학교이름 + 논문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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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구린 것은 어쩔 수 없다

 

구린 것은 어쩔 수 없다.

 

1.

간만의 학교. 오랜만의 조용한 분위기의 길을 걷고 있으려니, 쓸쓸한 기분이 든다. 과연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나를 이곳에 다시 적응시킬 수 있을까? 애초에 ‘적응’이라는 말이 맞기나 한 것인지. 3년간의 학교 생활은 지난 2년을 통해 새로운 경험으로 재구성되었다. 경험이란 절대적이지 않다. 지금 겪고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이 예전에 겪었던 것들 마저도 새롭게 느껴지게, 혹은 진짜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변하지 않은 이 곳은, 내가 너무 변했기에 새롭다.

 

굳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쳐두고 학교를 방문한 것은 되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이 지금 내게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련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얻은 것은 많다. 내 자신도 많이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내게 매우 의미있는 장소들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기피하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게, 그 곳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함께 노래하는 것도 즐거웠고, 다른 이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런 것들에 대한 미련일까.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불편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지고 있고, 이번에는 괜찮지 않을까, 또는 간만에 사람들을 보고 싶다, 는 생각으로 다시 그곳을 찾게 되는 것은.

 

내가 맺어온 관계는 너무도 취약했다. 요즘 뭐하세요?/요즘 뭐해? 라는 가벼운 질문에도 말문이 막힌다. 앞으로 무얼 할 생각이냐는 말에도 답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 1년간 나는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관계를 많이 맺어왔다. 그런 관계들은 정말 내 자신과, 내 정체성과, 나의 정치와 강하게 연결되어있는데, 그것을 전혀 드러낼 수가 없다. 커밍아웃을 날려볼까? 그러기엔 ‘이 사람들’에게 굳이 커밍아웃을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 약한 관계다. 단지 ‘같은’ 장소에 속해있다는 것은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 이름으로만 묶여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 대부분의 사람이 서로 잘 묶여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묶일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홈커밍데이’라는 이름 아래에 찾아간 그 공간은 내게 너무도 낯설었고, 사실은 예전부터 낯선 공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존재였고, 앞으로는 더 낯선 곳이 될 것이란걸 어렴풋이 느낀다. 내가 그 곳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함께 노래한다’는 그것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 외의 모든 감성에서 나는 배제된다. 모두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공유하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것들’이 내겐 없다. 그럼에도, 내게도 ‘그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모두들 가정하고, 난 점점 말을 잃어간다. 이렇게 말을 해도 난 다시 찾아가겠지. 함께 만들어낸 소리가 좋아서, 그 소리 속에서 내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네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지 ‘합창’밖에 없어. 미련을 버려라, 제발.

 

후배와 선배, 남자와 여자, 연애를 하지 않거나 하거나, 하는 그런 ‘관계’들이 뒤섞인 공간에서 감수성이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내게 다가와 깍듯하게 인사하고 말을 거는 사람들, 선배랍시고 후배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미안해하지도 않고, 남자와 여자를 ‘자연스레’ 연결시키고, 남성 간의 ‘그런’ 상황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단지 노래가 하고 싶다. 정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차라리 노래만 함께 하는 공간일 수 있다면. 날 여기서 좀 꺼내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사람들을 버릴 수 있을까. 분명 노래, 그리고 합창이라는 것에서 많은 감성을 공유하고 몇 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그렇다면 이 사람들을 바꿀 수는 있을까. 어느 쪽도 절망이다. 믿을 만한 사람들인가? 믿을 만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내가 맺어온 관계는 결국 내 근처의 몇 명이었는데, 나는 얼마나 되는 범위에게, 나의 정체성을, 그것이 유일한 자원인 것 마냥, 매번 꺼내들어 그런 이야기를 해야하는 것일까? 힘들고 어렵다. 나는 아직도 약하다.

 

2.

7년을 알아온 친구들이 있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3년을 지냈고, 또 대학에서 4년을 같이 지낸 친구들. 그런 친구들 중에서도 특별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몇 명이 있다. 언제나 같이 몰려다녔고, 매일 밥을 같이 먹었으며, 심지어는 전공까지 같아 수업도 같이 들었던, 술보다는 수다를 좋아했고, 언제나 쓸데없는 헛소리를 하며 즐거워 했던, 농답이랍시고 수학 이야기를 하는 그런 친구들. 그리고 그 ‘밖’이라고 느껴지는, 그러나 친하다고는 말할 수 있는, 또 한 무리의 친구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이 안팎을 나누는 기준은 너무도 명백했다. ‘안’의 친구들과 나를 모아 ‘우리’라고 표현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수학 이야기나 뭔가 ‘보통의 남성’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성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는 것 처럼 보였고, 연애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밖’의 친구들이 우리를 계층짓기를, ‘그래서 연애를 못하는’ 사람들이라 했다. 연애를, 그것도 ‘이성애 연애’를 해야만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그 기준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세상과 동떨어진 집단이었으며 그럼에도 어떻게 저렇게 ‘연애에’ 관심이 없는데다가 즐거울 수 있을까, 하는 ‘신기함’을 낳는 집단이었다.

 

지난 가을과 올 봄에 걸쳐, 나는 몇 명인가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그 중에는 ‘안’도 있었고, ‘밖’도 있었다. 근데 이 반응들은 뭐지? 동성애에 대한 혐오감을 내게 직접 드러낸 이는 없었지만, 기다려보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이젠 좀 식상한 제안도 있었고, 여러가지 반응을 볼 수 있었다.

 

‘밖’의 경우, 나름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우호적인 듯 말을 한다. 그러나 결국, 구체적인 ‘연애’ 이야기를 할 때 나의 ‘연애’가 단지 그들의 (이성애) 연애에서 ‘여성’을 ‘남성’으로 치환한 것, 혹은 나를 ‘여성’으로 치환한 것이 될 뿐이다. 이게 상상력의 한계일까. 구리고구리고구린데 그래도 다난한 커밍아웃을 지속해야 하는 것일까. 그 과정에서 내가 설득해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모르겠더라. 내가 무얼 하고 싶어서 이렇게 하는 것인지. ‘커밍아웃’을 해도 계속 자극을 가하지 않으면 결국 잊어버리고 없던게 되고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런 에너지를 갖기가 참 어렵다.

 

구린 정도는 좀 덜했을지 몰라도, ‘안’도 내게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안’과는 연애 이야기나 ‘성’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었다.  이성애 중심성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려면, 그 과정에서 ‘성애’적인 것이 부각될 수 밖에 없다. 그 와중에, 평소에 워낙 그런 이야기를 서로 하지 않는 데다가, 관심도 없고, 오히려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섹슈얼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그 안에서 이야기를 하기란 너무도 힘든 일이다. 게다가 그런 무관심한 듯 보이는 ‘안’에서조차 비이성애적인 것은 내가 커밍아웃하기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으니. 그리고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무감한 그 반응은, 그래도 나의 커밍아웃은 조금이나마 반응해주기를 원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나의 불편함을 미리 상상하여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이 되어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요즘들어 ‘안’의 친구들이 거센 공격을 받고 있다. (이성애) 연애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밖’의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이야기의 중심이 모두 ‘그런’ 쪽으로 흘러가는 것, 게다가 다른 이야기, 특히 알아듣지 못하는 전공 이야기를 한다던가 게임 이야기를 한다던가, 뭐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너희는 그래서 안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째서 그들은 ‘여자는 어떻고 남자는 어떻기 때문에’ 로 시작하는 말을 밤새 할 수 있는걸까. 왜 ‘이성애 연애’를 하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걸까. 아마도 ‘진짜 남성’은 (그것도 그들이 말하는 ‘진짜 여성’과) 연애하고 싶어한다, 라는 생각을 하는거겠지.

 

구린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안’에게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은 좀, 사실은 많이, 덜 구리기 때문일까. 너무도 구린 ‘밖’의 ‘친구’들이 ‘안’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까. 연애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외모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진짜 남성’이 아니게 될 것 같은 기분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들을 좀 해볼까. 구린 세상에, 더 구린 인간들에게서 ‘진짜 남성’이 아니라고 이름붙여지고 있는 이 (좀 덜 구린) 친구들의 편이라도 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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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삐—익

 

삐—익, 잠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터폰으로 연락해주세요.

삐—익, 잠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터폰으로 연락해주세요.


고작 3층을 (정확히는 지하에서 3층으로면 4층이지만) 오르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던, 그리고 타왔던 내게 갑작스레 닥쳐온 상황은 당황만을 안겨주었다. 특히 저 반복되는 삐—익, 하는 전자음은 사람을 굉장히 불안하게 만든다. 발단은 단지 내가 엘리베이터에 탔고, 사실 이것이 원인인지 아닌지 조차 확신할 수 없지만, 내가 약간 큰 동작을 했으며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는 것이다. 2층과 3층 사이에 멈춘 것 같은데, 저 경고음성이 나옴과 동시에 모든 버튼이 작동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갑자기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층수를 알리는 디지털 숫자가 2를 나타내게 바뀌었다는 것은 더욱 공포였다. 이대로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함께 일단은 인터폰 버튼을 누른 나는 벽을 두드리며 ‘아저씨’만을 연호할 뿐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어릴 때의, 지독하게도 오랜 기간동안 반복적으로 꾸었던 꿈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엘리베이터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건물에 관한 꿈이었고, 화재가 난 건물에서 지하의 통로를 통해 간신히 탈출하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꿀 때면 항상 심장박동이 귀로 들릴 지경이었다), 엄청나게 넓고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동네에서 집을 찾아가야 하는 꿈이었다. 죄다 재난스러운 상황들이긴 하지만, 어쨌건 어제의 경험은 첫 꿈을 상기시켰다. 엘리베이터가 원하는대로 작동하지 않고, 서서히 올라가다가 천장에 부딪혀 장렬히 산화한다던가, 아래로 추락한다던가, 문이 열렸는데 층과 층 사이의 벽이라던가, 그런 쓸데없는데다 해롭기까지 한 상상을 갇혀있던 5분동안 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엘리베이터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내가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일까). 결국은 문이 열렸고, 나는 내릴 수 있었지만 반복되는 경고음성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심지어 그 소리는 집 안에까지 들렸고,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청했다.


어떻게 이토록 무력할 수 있을까. 어떤 위기가 닥쳐왔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너무 슬프다.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춰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그리고 외부에 구조를 해달라고 부르짖는 것 — 그 마저도 인터폰이던 휴대폰이던 제대로 기능해야 가능한 것이 고작이다. ‘안을 볼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많이 줄어왔다. 어쩌면 할 수 있는데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먹을 것이 없으면 편의점에 가서 다 만들어진 ‘삼각김밥’ 따위를 사와서 먹으면 되는거다.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널려있는 자판기에 동전을 몇 개 집어넣고 버튼만 한 번 누르면 된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으면, 차를 타면 된다. 아파서 쓰러지면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고 약을 받아서 먹으면 되는거다. 얼마나 간단한가?

 

그렇다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자고 할 수도 없다. 앞으로도 나는 엘리베이터를 탈 것이고, 게다가 가파른 계단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찌할 건가. 또 나는 커피도 마시고, 차도 계속 타고, 병원도 가겠지. 세상에 너무도 많은, 속을 알 수 없는 기계들과 편리하게 보이는 ‘문명’. 그것이 안전하다고, 편하다고 이용하는 나. 애초에 이런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속이 편하련만, 엘리베이터의 경험은 좀 (많이) 무서웠고, 그것이 뭔가 세상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런데 삶의 방식을 어떤 식으로 가져나가야 할 지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안 써야지, 라던가 모여서 우리끼리 살자, 라던가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건물을 모두 없애고, 자동차도 없어진 세상을 상상해보지만, 그 상상의 빈곤함과, 애초에 그런 상상을 허용하지도 않는 세상 — 내 자신을 포함하여 — 이 스스로를 숨막히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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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가만히 내버려둬

 

처음 완변에 발을 들여놓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1월의 다과회였나, 나는 그 홍보물을 친구사이의 홈페이지에서 발견했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 그리고 사실은 괴악한 그 웹자보 디자인에 끌려, 혼자서 마쯔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하여 처음 만난 그 사람들은 신세계, 아니 안드로메다쯤 되려나. 손님은 내버려두고 뭔가 하려는 기색도 없고 나는 뻘쭘하게 그곳에 앉아있을 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삐졌다는 것은 아니고 어쨌건 그랬다. 재미있는 것은 그 때에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을 때, 내가 ‘친구사이’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한 것이 조금의 의미라도 있었을까?

 

나는 남의 이름을 잘 모른다. 잘 묻지도 않는다. 나이도 잘 묻지 않고, 성별도 잘 묻지 않는다 (이건 좀 문제다. 멋대로 상대의 성별을 가정해버릴때도 있으니까). 이건 나의 상대에 대한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이름이나 나이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2명이 대화를 할 때면, 사실 이름이 필요없다. 결국 그 사람을 소리내어 부르거나, 제 3자와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서만 이름이 필요하다. 결국, 이름은 1인칭도 아니고 2인칭도 아닌, 3인칭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랴. 이름이 바뀐다고 부르는 대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면 사실 이름은 스스로가 불리우기 원하는 것, 일 때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름이 뭐예요?”라는 질문은 사실 “뭐라 불러줬으면 좋겠어요?”라는 뜻 아닐까. 자기 소개를 한다는 것은, 나를 이렇게 불러주었으면, 그리고 나를 어떻게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이야기 없이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자기소개를 한다. 그런데 이런 자기소개가 때로는, 아니, 종종 공허하게 느껴진다. 몇몇 단어들로 나를 말하려 들어도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나를 아무리 포장해도, 그 ‘포장’은 포장일 뿐인데. 그런 생각에 짧은 소개를 하고 나면, 물어오는 것들이 있다. 학교를 물어본다던가, 나이를 물어본다던가. 하지만 그런 것은 나를 전혀 표현해줄 수 없는 요소인데, 나는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마냥 대답해주고, 질문한 사람은 나에 대한 특정한 인상을 갖는다. 짜증나. 나는 그런 것들로는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어떤 것인데.

 

그러니까, 가만히 내버려두라.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자기를 어떻게 드러내고 싶은지, 스스로 설명하도록 내버려두라. 물어볼 것은 소속이나 학교나 나이나 성별 그 자체가 아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그것을 물어보라. 처음 완변에서 받은 질문은 “왜 왔어요?” 였고, 거기에 상당히 당황했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 적절한 질문이다. 겉을 물어보지 말고 속을 물어보라. 멋대로 대답을 가정하지도 말라. 자신이 어떻게 불리우고 싶고, 왜 이 곳에 있는 것인지 말하게 가만히 내버려두라. 제발,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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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ewmonde 감사합니다. :) in reply to GabhrielTorres 2011-12-23
    • 완전변태 게릴라 전시프로젝트#1 '몽마르뜨' 첫 모임이 내일 4시에 열립니다. 저세한 건 홈페이지에서 확인해주세요. :) wanbyun.org 2011-12-23
    • 몽마르뜨 변경된 장소를 참가 신청하신 분들께 메일로 보내드렸습다. 확인해주시고 문의 사항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201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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